리버티니즘과 성혁명(2): 프랑스혁명에서 1차 성혁명까지

리버티니즘과 성혁명(2): 프랑스혁명에서 1차 성혁명까지

2021-08-09 0 By 월드뷰

월드뷰 AUGUST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글/ 민성길(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4. 18세기 프랑스혁명과 섹슈얼리티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8일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혁명가들은 그들의 지배자였던 왕족과 귀족 그리고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당에서 하나님 대신 이성의 신을 예배하게 했다. 혁명은 10여 년 만에 유혈이 낭자한 채 끝났다.

프랑스 혁명은 인권을 위한 혁명이었으나, 성의 해방은 물론 여성의 해방을 위한 것은 아직 아니었다.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rights of man and citizen)” 선언에는 성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 혁명의 ‘여신’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해방을 이끌었지만, 아직 ‘여성들의 평등권’은 개선되지 못했다. 휴머니즘이나 계몽이나 낭만은 남자 엘리트들만의 일이었다. 칸트(Immanuel Kant) 같은 계몽철학자들이나 계몽사상가들마저도 여자의 공간은 여전히 가정 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칸트나 루소(Jean-Jacques Rousseau), 심지어 19세기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나 니체(Friedrich W. Nietzsche) 등 철학자들을 여성 혐오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성 혁명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 혁명에서 ‘자유는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나오고, 이것이 20세기 성 혁명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 또는 사람은 “자유의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대중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현재 누리는 성적 자유, 자율성, 사생활(privacy)에 대한 태도 등은 18세기 광범위한 사회적, 지적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개인적·사회적·도덕적 카오스였다. 도시는 더러웠고, 매독이 만연했고, 인구는 감소하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리버티니즘은 방탕적 계몽주의(libertine enlightenment)라고 부른다(20세기 성 혁명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방탕적 계몽은 17세기 크롬웰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왕정복고 리버티니즘을 계승한 것으로 이미 문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서 사드(Marquis de Sade)는 ‘자유’에 기초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륜과 성도착에 대한 것을 글로 표현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성적 자유에서 사디즘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에서 유혈로 점철되어 갔음에서 그대로 보여 준 바와 같다. 그래서 20세기 성 혁명가들은 사드 후작을 성 혁명의 선구자로 칭송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방탕 문학으로 드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의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1782)>가 있다(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조선상열지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시대에 방탕주의·쾌락주의로 유명한 난봉꾼(libertines)으로 사드 후작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알려져 있다: 프랑스 소설가 시라노 드 벨주락(Cyrano de Bergerac),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이탈리아 모험가 지아코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등등. 이런 난봉꾼들은 여러 도시로 성적 모험의 여행을 하곤 했는데, 실상 그 모험의 대상은 대개 매춘부였다. 돈 환(Don Juan)은 가상 인물로서 방탕주의의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돈 지오반니>를 작곡했는데 (그는 당시, 위선적인 비엔나 문화에 냉소적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돈 지오반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5. 19세기 리버티니즘 문화


19세기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주아는 새로이 출현한 정치·경제적 세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탕한 귀족계급이나 농부나 혹은 새로 출현한 노동자계급과는 다르다는 정체성의 한 근거로 엄격한 섹슈얼리티를 이용했다. 이 시대의 중산층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단추를 꽉 채운 엄격하고 우아한 사회적 매너’이다. 부르주아는 겉으로는 성적으로 엄격한 가족체제를 신봉하는 듯 보인다. 그 전형적인 모습으로 남편들은 자유롭게 창가를 들락거리며 마음대로 성을 즐길 수 있었던 반면, 부인들은 가정 안에 갇힌 채 집안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순수하고 안전하게 비치된 우아한 가구 같은 존재로 살았다. 심지어 집안의 책상이나 피아노의 ‘다리’도 외설스럽게 보이지 않게 천으로 감쌌다. 여성은 열정을 표현하면 안 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여성의 히스테리였다(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분석함으로 정신분석 이론을 창안했다). 이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혼란과 위선은 이후 페미니즘에서 보듯, 오랫동안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 대도시에 향락산업이 번성했다. 매춘은 거대 산업이 되었다. 영국의 경우 1887년 의학학술지 <The Lancet>은 2백만 인구의 런던에 약 8만 명의 창녀가 있다고 추정했다고 한다. 런던의 가난한 젊은 여성들은 남자 불량배들의 지배를 받으며 매춘을 하면서 술중독과 절망에 찌들어 갔다. 자연히 성병과 매독이 창궐했고, 손님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감염을 일으켰다. 뇌매독에 의한 정신병자들이 정신요양원에 넘쳐났다. 당시 성병은 비도덕성에 대한 천벌이었다. 당시 매춘은 부르주아 도덕성과 사회질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었다. 이에 따라 깨끗한 처녀가 대단히 소망스러운 상품이 되었으나 속이기도 쉬웠다. 그외 리버티니즘 현상으로 신성모독, 술 취함, 동성애, 자위 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자위에 집착했고, 자위를 못 하게 하느라고 정조대 같은 기구가 고안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문란한 세기말 성문화는 “La Belle Époque(아름다운 시절)”라는 말로 대변된다. 이 시절(1880~1914)은 낭만적 자유연애(프리섹스)와 화려하고 쾌락적인 성문화가 특징적이다. 당시 파리의 성문화 역시 매춘업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베르디(Giuseppe Verdi)의 오페라 <La traviata(타락한 여자)>가 도움이 된다. 엘리트 남자들은 부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는 별도로 별세계(demimonde, 화류계)로 가서 그곳에서 쾌락적 성적 문란을 즐기면서 음주, 마약, 도박, 극장과 발레 감상, 경마, 고급 패션 등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하고 “라 트라비아타”의 시대는 사라진다.

프랑스 리버티니즘의 선구자인 사드 후작의 방탕 레퍼토리는 더욱 확대되어, 도덕적 허무주의, 유미주의, 낭만적 데카당스 운동 등의 세기말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이다. 그는 쾌락주의자로서 동성애로 재판받고 투옥되었다. 그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libertine의 경망한 행동과 통제되지 않은 쾌락 추구가 어떻게 궁극적인 재앙을 초래해서 한 남자의 영혼을 파괴하는지를 ‘미학적으로’ 보여준다.

이같은 방탕의 사조에 반대하여, 기독교인들, 미국의 경우 특히 감리교에서, 19세기 중반부터 도덕 재건 운동, 매춘반대 운동, 금주운동 등에 나섰다.


6. 20세기 성혁명


서구인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디오니소스축제(dionysia)와 고대 로마의 박카스축제(bacchanalia), 르네상스와 방탕적 계몽주의의 에로티즘에서 보듯이 끊임없이, 무슨 핑계를 대면서라도, 성 해방(sexual liberation)를 추구해 왔다. 그 과정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17세기까지는 상류계층에서 리버티니즘, 즉 방탕 문화가 유행했으나, 19세기에는 부르주아의 퇴폐문화로 확대되어 나타났다가, 20세기에는 드디어 ‘모든 사람’과 특히 ‘여성’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가히 성에서의 혁명(revolu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성 혁명이란 용어는 1960년대 미디어가 성도덕과 성행동에 대해, 사회, 철학, 정치에서 ‘허용적’ 사회로 획기적으로 변화한 현상에 대해 붙인 명칭이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1920년대에 사용했던 용어인 sexual revolution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미디어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의 지각과 실행이라는 의미에서 1920년대에 한 차례 성 혁명이 있었다고 보고 이를 1차 성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1960년대에 더 광범위한 ‘해방’과 자유를 향한 운동과 더불어 보다 근본적인 성에서의 혁명이 나타났다고 보고 이를 2차 성 혁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실은 성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크고 작은 형태로 여러 차례 나타났고,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고, 또 가속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 혁명이란 결국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행동에서 전통적 윤리 또는 전통적 기준(code)에 반대하는 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그 핵심은 자유연애(free love), 즉 프리섹스(free sex)이다. 프리섹스는 혼전 성관계와 불륜은 물론, 성욕과다증(Hypersexuality) 내지 성 중독(sex addiction)의 문화, 일회성 섹스( casual sex, “Hookup” culture), 동성애, 소아성애, 다자연애(polyamori) 등등으로 그 범위를 넓혀나가게 된다.


1차 성 혁명

1920년대의 1차 성 혁명은 19세기의 진화론, 막시즘, 데카당한 방탕주의,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반기독교 사상, 그리고 히스테리 연구로 시작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이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 1차 세계대전과 크게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전쟁 동안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매춘이긴 하지만 ‘자유로운 성’을 경험했고, 후방의 젊은 여성들은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휴가 나온 병사들과 ‘자유로운 성’을 즐길 수 있었다. 전통적 기독교적 성윤리는 이미 전쟁 통에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전후에는(전쟁을 통해 크게 발달한) 폭발적인 산업기술의 발달로 자동차, 여행, 전화, 유성영화, 라디오, 가전제품 등 여유와 즐길 거리가 많아졌다. 전후에 경제는 다시 부흥했고, 섹스어필한 영화배우나 스포츠 스타가 대중 미디어에 나와 기업의 상품을 광고했다. 일상생활에서 현대적인 스타일과 정교한 공예기술과 고급재료를 접목한 새로운 디자인이 사치, 매혹, 풍요 등을 자극했다. 이러한 전후의 사회변화에 따라 이전까지 억압되고 누적되어오던 성적 욕망이 무분별하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전통을 압도하는 ‘모던함(modernity)’과 더불어 미국의 재즈와 술판과 찰스턴댄스 같은 떠들썩하고 새로운 생활방식이 인기리에 대서양을 오가며 교환되었다(이 시대의 성문화를 이해하려면, 미국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캣츠비(1925)>,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1927)>를 참조할 수 있다).

이전에 엘리트들이 도전했던 방탕 사상 또는 방탕 문화가 사회 전반, 대중사회와 특히 ‘여성들의 세계’에도 침투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남자들은 이미 성도덕을 잃은 상태였다. 젊은 플래퍼(flapper) 여성들이 성 혁명을 이끌며 당시 성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이전에 한국에서 사용되던 ‘후라빠(왈가닥)’라는 일본식 용어는 이 플래퍼에서 나온 듯하다). 그들은 진하게 화장하고, 자동차를 몰며 자유롭게 이동하고, 바에서 재즈를 들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으며, 밤에는 카바레에서 춤을 즐겼다. 플래퍼 여성들은 기존 사회적 규범이나 성적 규범을 조롱했고, 섹스를 ‘casual manner’로 생각했다. 이즈음 여성의 투표권 같은 페미니즘 운동도 본격화하였다.

이런 성 혁명적 현상이 서구 대도시들 즉, 뉴욕, LA, 시카고, 베를린, 런던, 파리, 시드니 등지에서 두드러졌다. 그 문화는 퇴폐적이고 도덕적으로 파괴적이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제정된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불법 술집이 번창했다. 소위 카바레 문화가 꽃피었다. 이 시대를 미국에서는 소위 “the Roaring Twenties(마시며 떠들어대는 20년대)” 또는 “the Jazz Age”라고 했고, 프랑스에서는 “the années folles(Crazy Years)”, 독일은 “the Golden Twenties”라고 부른다. 서구 도시에 퇴폐와 더러움, 신경쇠약증과 결핵과 성병이 폭증했다. 히틀러는 이 시대의 베를린을 “악의 항구(a haven of vice)”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치스의 고위직들은 대개 성적으로 리버틴들이었다) 이 시대의 도시에서의 성 혁명을 대변하는 소설들이 등장했는데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1922)>, 로렌스(D. H. Lawrence)의 <차타레이부인의 연인(1928)>,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북회귀선(1934)> 등이 출판되었으나 곧바로 금서가 되었다.

1920년대 카바레에서 재즈에 맞추어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 있다.

당연히 이런 방탕 문화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플래퍼 의상이 거의 벗은 것이라고 하며, 그런 여자들을 경박하고 무모하고 무지하다고 비난했다. 우파들은 이런 문화는 퇴폐적(decadent)이며 사회적, 도덕적으로 파괴적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성 혁명

소련혁명 초기에 성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다. 19세기의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공산주의 사상을 전 세계에 퍼트렸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반대하면서, 대신 자신들의 신조들을 최고 종교적 지위로 높였다. 섹스에 있어 그들은 남녀 문제를 계급의 이슈로 재해석했다. 1884년 엥겔스는 “첫 계급억압은 남자에 의한 여자에 대한 억압이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을 때, 레닌과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첫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할 곳이 결혼이라 보았다. 전 유럽에서 리버티니즘 문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성 혁명이라고 부를만한 사건은 이미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소련 혁명가들은 결혼과 가족에 관련된 ‘부르주아 도덕’은 계급 없는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성취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러시아 정교회에 기반한 결혼과 가정체제를 없애려 했다. 1918년에 “결혼제도의 철폐”, “시민연합(On civil partnership. 동거를 의미), 자녀 및 소유”에 대한 법 등이 제정되었다. 공산당은 시민의 가족을 해체하고 집단으로 거주시키며, 여자도 생산 활동에 참여시키고, 아이들은 국가가 책임지고 집단으로 키웠다(어린이들의 집단 양육은 복종적 공산주의자 시민을 키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는 대단히 급진적인 혁명적 실험이었다.

러시아 혁명 초기, 볼셰비키 중 성 혁명의 지도자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였다.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혁명위원회와 레닌 치하 공공복지 인민위원회의 첫 여성 위원이었다. 콜론타이의 성 혁명관은 ‘a glass of water’로 대변된다, 즉 섹스는 ‘물 한잔’을 요청하듯 쉽게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신여성(new woman)”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신여성은 결혼, 가사 및 육아의 억압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었던 어린이 교육(성교육까지), 음식. 주거, 복지 등등, 모든 잡일은 사회와 국가가 맡았다. 공공 주거(communal houses)가 설립되었고, 공공식당(communal dining hall)에서 아이들과 시민을 먹였다. 또한, 여자가 요구하면 언제든 이혼이 가능해졌다. 여성들은 남편이 아내를 때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 낙태도 합법화되었다. 여성으로 하여금 ‘결혼과 매춘 사이의 선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자유연애가 장려되었다. 이는 현대사회의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도 매우 급진적이다. 놀랍게도, 혁명 초기 레닌은 프리섹스를 허용하고, 모스크바 강변에 누드 비치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서구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즉, 정부나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침범당하지 않는 한 성에 대해 절대적 불간섭 정책을 폈다. 1922년 형법에서 성행동에 대에서는 조회할 수 없게 되었다. 매춘도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정부는 창녀들이 쉽게 치료받도록 해 주었고, 다른 직업을 갖기 위한 훈련기회를 제공했다. 성범죄는 “생명, 건강, 자유, 위엄”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으로 기술되었다. 소련의 새로운 법은 동성애, 소도미, 기타 성적 도착증 등을 전적으로 ‘자연적’ 성교로 취급했다. 자연히 게이와 레즈비언의 생활방식이 번성했으며, 여성의 경우 동성혼도 인정되었다. 이런 급진적 변화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1920년대 전반까지 성 혁명은 최고조에 달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 강변의 누드 수영장.

그러나 전통의 파괴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했다.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성적 문란이 나

타났다. 성병이 창궐하고, 가정 파괴로 고아들이 양산되었다. 공식 보고에 의하면 1923년까지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이 불륜의 자식이었으며, 그들은 영아로서 버려지기 일쑤였다. 강간이 흔한 일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남자들이 과거 귀족이나 부르주아였던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해도 이는 ‘계급 정의(class justice)’로 간주되었다(21세기 성 혁명도 이런 과정을 밟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은 이런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너무 가난했다. 소련은 공산혁명은 물론 성 혁명이 서구의 부자 나라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볼셰비키는 견디지 못하고, 성 혁명을 10년 만에 중단시켰다. 서구에서 성 해방이 한창 진행될 때 소련은 다시 전통가치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도로 가족이 사회의 기초 단위가 되었고, 사라졌던 결혼법이 돌아왔다. ‘의무적 가족’이 다시 지원되기 시작했고, 어린이 양육의 집단화는 중단되었으며 어린이들의 양육책임은 부모에게 돌아왔다. 혁명 과정에서 어린이들의 자율성을 위해 권위주의적인 교육제도를 없앴는데, 이제 다시 권위주의적 교육으로 번복되었다. 1930년대 권력을 잡은 스탈린(Joseph Stalin)은 더욱 황급히 전통으로 회귀했다. 스탈린은 프리섹스, 나체 수영장, 동성애, 낙태 등을 금지했다. 과거 거리 퍼레이드에서 ‘수치심을 버려라’라는 구호와 더불어 유행하던 공공적 신체 노출(nudity)도 억제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정부는 다시 철저한 남성 우월주의로 되돌아갔다. 이데올로기적 금욕주의가 재등장하여 소련 젊은이들의 프리섹스를 억압했다. 여성 인권 운동은 억제되었고, 이혼도 어렵게 되었다. 콜론타이의 ‘신여성’은 단지 10여 년간만 새로웠을 뿐이었다. 결국, 여성은 혁명도 해야 했고, 어머니, 부인, 요리사, 청소부 역할도 해야 했다. 사람 살기는 더 어려워졌고, 어쩔 수 없이 여성들의 매춘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동성애 역시 다시 범죄가 되었다. 1934년 주요 도시에 동성애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었는데, 게이는 8년까지 징역형을 받았다. 동성애자들은 스스로를 감추었고, 그들의 자살이 증가했다. 반동성애 담론은 2차대전 때 러시아와 나치 독일 간 전시 선전에 이용되었다. 스탈린은 “동성애를 없애면, 파시즘은 살아질 것이다”라고 했고, 히틀러는 “동성애는 공산주의 타락”이라 불렀다.

이러한 볼셰비키 성 혁명의 압축된 역사는 성 혁명의 교훈을 웅변해 준다. 이러한 소련이 성 혁명에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실망했다. 특히 정신분석가이자 공산주의자이자 성 혁명 이론가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분노했다. 그러나 라이히는 정신분석학회에서 추방되고 나치에게서도 쫓겨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Freudo-marxism을 근거로 성 혁명적 활동을 계속하다가, 사기죄로 감옥에서 죽었다. 그 Freudo-marxism은 이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루카치나 그람시 등의 문화 막시즘으로 계승되어, 본격적인 2차 성 혁명의 불을 지폈다.

공산주의 선언 발표 후 불과 70여 년 만에 러시아 공산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크리스천은 1920년대 라이히에 의해 선언된 막시스트 성 혁명을 결코 가볍게 보면 안 된다.

<skmin518@yuhs.ac>


글 | 민성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의대 교수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종신회원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및 효자병원 진료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최신정신의학>, <화병연구> 등 다수가 있으며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 선구자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