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절대적 권리인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절대적 권리인가

2021-06-22 0 By 월드뷰

월드뷰 JUNE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2


글/ 장지영(이화여대 서울병원 임상조교수)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란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현대판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도 불리는 ‘제네바 선언’을 서약하며 의사로서 첫걸음을 뗀다. 11가지의 서약으로 이루어진 이 선언 중 덜 중요한 것이 있겠냐마는 가장 핵심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라는 서약일 것이다.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회복시키고 유지시키는 것은 의사의 가장 큰 의무이자 의사의 전문성을 보장해 주는 근원이다.

의사의 의무는 환자의 권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데 환자는 진료받을 권리, 알 권리 및 자기 결정권,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 상담/조정을 신청할 권리 등 4대 권리를 갖는다. 이 중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침적·기본적 인권이자 의료체계 내에서 환자가 자신의 치료방법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치료방법, 시기, 결과, 대안, 예상치 못한 합병증 등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는 환자의 ‘알 권리’이자 의사의 ‘설명의 의무’이다.

전통적으로 의사-환자의 관계는 의사의 전문적 권위에 따른 능동-수동의 관계가 일반적이었으며, 대개 의사가 의사(意思) 결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즉 의사는 의료체계 내에서 자녀에게 좋은 길을 제시해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환자의 알 권리와 자기 결정권이 중요한 권리로 대두되면서 의사와 환자를 동반자적 관계로 보는 관점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의사 결정 과정에서 환자의견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환자가 선택한 치료방법이 의사로서는 합리적 결정이 아니더라도 의사는 환자의 결정을 따라야 하며, 이는 객관적· 의학적 사실로서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리는 의료체계 내에서 의사의 생명 건강 유지 의무와 충돌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경우, 의사의 정상적 의료 행위 의무와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모순이 발생한다.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자기 결정권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거부한 환자가 수술 중 사망하더라도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당시 62세였던 환자는 ‘인공 고관절 치환 수술’을 앞두고 수혈을 거부한다는 의사(意思)와 이로 인해 발생 가능한 모든 피해에 대해 의료진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책임면제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환자는 수술 중 발생한 대량 출혈로 사망했고, 담당 의사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대법원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할 의무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충돌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우선하지만, 자기 결정권이 생명과 대등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생명보호를 우선으로 하지 않더라도 처벌할 수 없다 하여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특별한 경우는 ① 환자의 나이, 지적 능력, 가족관계 ② 수혈 거부라는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 배경과 목적 ③ 수혈 거부 의사가 일시적인지,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해 온 확고한 종교적 또는 양심적 신념에 기초한 것인지 ④ 수혈을 거부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자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⑤ 수혈을 거부하는 것이 제3자의 이익을 침해할 여지는 없는 것인지 등이다.

법리적으로 담당 의사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러한 결정이 생명 윤리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결정이었는지는 논의가 필요하다(현실적으로 의사는 환자 가족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고소해 형사재판에 넘겨질 위험, 의학적 필요에 따라 수혈을 하고 환자가 소생한 경우 위자료 청구소송을 당할 위험이 여전히 있다). 종교적 신념에 의한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의사의 생명보호 의무 중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할까? 생명의 위협과 직접적인 연관이 된 자기 결정권이라도 보호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생명과 대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평가되는 특별한 사정은 누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의 가치를 과도하게 확대해 생명과 건강을 해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다. 의사는 환자 개개인과 계약관계를 맺고 있지만, 생명의 유지와 회복이라는 공적 의무(면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극단적인 환자의 자기 결정권마저 관대하게 수용하면 의사 본연의 의무를 유기할 여지가 생긴다. 수혈하지 않을 경우 생명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수술이라면 수술을 거부하거나, 환자의 종교 신념을 존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민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더라도 수혈을 하는 것이 생명 윤리적 관점에서 더욱 합당할 것이다.


자기 결정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의사의 생명 건강 유지 의무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의 충돌은 연명치료 중단, 임종 시 생명의료 윤리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2019년 서울신문이 한국환자단체연합회(544명), 대한전공의협의회(183명), 사법연수원(64명)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조사자의 70% 이상이 소극적 안락사에 찬성하며 윤리적으로도 정당하다고 답했고, 환자 측의 과반 이상은 적극적 안락사에도 동의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신생 변호사 단체인 사단법인 ‘착한법 만드는 사람들’은 ‘존엄사 입법 촉구’세미나에서 직접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존엄사 입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양한 의견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우선 안락사, 연명의료중단 등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여러 단어가 혼재되어 사용되면 문제의 본질을 불명확하게 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데 안일한 태도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안락사는 환자의 동의 능력과 의료진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그 범주를 구분할 수 있다. 우선 환자가 죽음에 자발적인 동의를 할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실제 동의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반자발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 비자발적 안락사(non-voluntary euthanasia)로 구분된다. 자발적 안락사는 환자 자신이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의사가 개입하면 이를 의사 조력 자살이라 부른다. 이는 대부분 국가에서 불법이지만, 스위스 소재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를 통해 매년 200여 건의 조력 자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사가 처방한 치사량의 약물을 환자가 스스로 복용하고 의사가 약을 직접 주입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적극적 안락사와는 구분된다. 2016년과 2018년에 한국인 2명이 디그니타스를 통해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자발적 안락사는 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의도적인 죽음으로, 살인의 범주에 속한다. 비자발적 안락사는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없는 신생아, 혼수상태, 노인성 치매 환자 등을 상대로 행해지는 경우로 역시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다음으로 의료진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적극적 또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적극적 안락사는 치사량의 약물 주입과 같이 죽음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네덜란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금지되고 있다.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지연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일반의료(물, 영양분, 단순 산소공급 등)와 특수연명의료(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를 모두 유보 또는 중단하는 경우와 일반의료는 시행하면서 특수연명의료만 유보 또는 중단하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전자는 살인의 범위에 속하며, 후자는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에 속한다. 소극적 안락사와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연명의료중단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존엄사(death of dignity)’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하는 용어이다. 존엄사의 개념은 1994년 미국의 오레곤 주에서 제정한 ‘존엄사법(Dead with Dignity Act)’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최초로 조력 자살을 명시적으로 허용한 법안이다. 따라서 일부 언론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을 존엄사법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연명의료중단은 회복이 명백히 불가능한,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상태에서 과도한 의료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존엄하고 순리적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환자를 돕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만 중단 가능한 연명 행위에 포함되었으나, 2019년 3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술’을 추가함으로써 혈압상승제, 체외생명유지술 등이 중단 가능한 시술로 포함되었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영양분, 물,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환자의 동의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대리 결정의 경우에도 환자의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된 이후 3년 동안 약 80만 명의 사람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실제 임종 과정에서 연명의료를 중단하기로 한 임종기 환자도 누적으로 13만 5천여 명에 이른다.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이 삶의 질의 척도로 자리 잡고 있다. 한 개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하게 맞이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윤리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안락사가 ‘자기 결정권’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을 끝내는 것은 타당하다’, ‘내 삶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와 같이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의 인권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위험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절대 넘어서는 안 될 금단의 선을 철저히 지켜내야 한다.


맺음말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조건 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의사 결정의 과정이 복잡해지고,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가치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의료진과 국민 모두에게 “윤리적 민감도(ethical senseitivity)”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lidia0826@hanmail.net>


글 | 장지영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현재 이화여대 서울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연구팀장, 기독교 보수주의 청년단체 트루스포럼의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