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반공주의
2021-03-10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글/ 이상규(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체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한 일이다. 그는 평생 반공주의자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살았다. 이승만의 건국이념은 반공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사회 균등 주의 등으로 표현됐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었다. 1899년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1905년 초 세례를 받았고 일생을 기독교 신자로 살았다. 1919년의 만세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그가 수반으로 추대되었을 때 벌써 기독교 건국론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것은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의 실현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반공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지향했던 이른바 기독교 건국론은 용공주의와는 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공사상의 형성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해방공간에서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유영익 박사가 지적하듯이, 그는 청년기부터 제정 러시아에 대한 공로증(恐露症) 혹은 혐로(嫌露)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반러시아 의식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반공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 사상이 처음 표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던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 부당(當不當)”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논설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인민 평등주의는 조선의 신분제도인 상반(常班)의 철폐와 반상 제도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으로 보아 합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재산을 공유하자거나, 자본가나 지식계급을 없애자거나, 종교단체를 혁파하자는 주장이나, 정부나 군사를 없애자는 등 5가지 주장은 현실성 없는 부당한 허위 선전이라고 보았다. 사유재산제도가 불평등을 주장한다고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노동 의지는 감소 될 것이며 결국 모두가 가난하게 되는 피해를 보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불리는 소련 공산당 정권이 등장하지 불과 6년이 지난 때였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많은 지식인이 거짓된 유토피아 사상에 열광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란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판단했고, 이런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을 피력한 것이 위에서 지적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논설이다.
이런 글을 발표한 배경에는 공산주의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1921년 초 상하이에 부임했을 때 당시까지 임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 한인 공산당 중앙위원장인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1873~1935)였다. 함경도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에 가담한 바 있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이용해 사회주의운동을 확산하고자 했다. 사실상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 개혁안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격한 논쟁을 벌였던 이동휘는 결국 임정을 탈퇴했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한인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사실상 이승만을 탄핵하려는 이들은 이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심화되었고,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공산화되자 공산주의 사상은 동유럽으로 확산되었고, 동쪽으로는 몽골까지 확장되었다. 지식인들은 실험되지 않은 허황한 유토피아 사상을 환호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과 연계해 독립자금 지원이라는 사탕발린 독약을 받아먹게 된다. 이동휘와 박진순이 중심이 되어 1918년 5월 31일 창당한 ‘한인사회당’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중국 공산당은 1921년에, 일본 공산당은 1922년에 창당된다),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승만이 쓴 공산주의에 대한 논설은 당시 한인 사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대륙세력인 중국이나 러시아를 택하지 않고 해양세력인 미국을 택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쇄(이념적 연계, Ideological chain)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두 편의 논설을 남겼는데, <태평양 잡지> 1924년 7월호에 쓴 “사회 공산주의에 대하여”와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에 쓴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변(一邊)으로는 우리 사람들이 이런 새 주의(主義)를 들을 적에 우리의 오늘 경우가 다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고 덮어 놓고 따라 나가다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함이라. 물론 우리 내외지(內外地)에 모든 인도자가 응당 앞을 보아 지혜롭게 인도할 줄 믿는 바이지만, 그중에 몇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一時) 풍조에 파동(波動) 되면 그 손해가 장차 전체에 미칠까 하는 근심이 없지 아니함이라.”
곳곳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흥기할 때에 쓴 이글은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논증한 세계 최초의 논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반공정신은 팽창주의를 지향하던 러시아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그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反) 유물론적 이념체계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반공사상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의 모스크바 방문 이후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유럽을 여행하고, 7월 19일과 20일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이때 공산주의 치하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또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과 1949년 중국의 공산화를 보면서 이후 한국이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크게 우려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반공주의
제2차 대전 이후(1944~45) 소련이 동독을 비롯해 동유럽의 약소국가들, 곧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을 점령했다. 소련은 공산주의를 이식해서 자국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1948년 2월에는 마지막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로 공산당 독재국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보다 앞서 1947년 9월에는 국제공산당(Cominform)이 결성되면서 동유럽의 공산화는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접한 중국에서는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 체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건국 투쟁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의 조선공산당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1945년 10월 21일 행한 중앙방송 연설에서, 그리고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공산당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절불굴(折不屈)하고 배일항전(排日抗戰)하던 공산당원들,” 혹은 “경제방면으로 근로 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라는 식의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그해 12월 17일과 19일 행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의 친소파 당원들을 소련의 세계적화 정책에 농락당한 반민족적 이기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6년 1월 13일 좌우합작을 위한 5당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 분자와 합동이 사실상 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성의를 다해 왔으나,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길을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재차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 동서냉전이 악화되자 이승만은 공산당이 계급 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1949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의 반공 운동은 ‘세계 모든 자유민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할 명분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것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혹은 건국과 함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새로운 이념 제시였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6.25 전쟁 이후보다 심화되어,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라는 보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발전했다. 이런 이승만의 신념은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적 확신이자 6.25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100만이 넘은 월남 인구도 반공주의의 심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는 건국 전후 좌익세력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좌우 합작운동 혹은 박헌영의 인민공화국 선포, 신탁통치안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 미소 공동위원회, 남한에서의 좌익 활동,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남북협상, 5.10 총선거 등 고비 고비마다 이념적 경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소련의 기도, 남로당의 활동,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무지 가운데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반공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승만의 지도력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미 군정은 공산주의와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원해 좌우합작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 충돌하면서까지 소련 편에 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적 가치, 국제정치 질서에 대한 인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건국 투쟁에서 3개의 이념 그룹이 대립하고 경쟁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익진영이었고, 둘째는,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좌익 진영이 있었다. 셋째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중간파 집단이 있었다. 임시정부 구성원 중에서도 우파는 우익진영을, 좌파는 공산진영을, 일부는 좌우 합작운동을 지지하거나 참여했다. 이런 혼란 대립 가운데서도 자유민주의 공화제 정부를 건국한 것은 이승만의 공헌이며, 특히 그의 반공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그의 건국 사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의 소극적인 측면이었지만, 그가 청년 시절부터 가졌던 반로(反露) 사상이 약 60년 이후 전개되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지침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의 공산혁명과 공산주의의 확산, 소련에 의한 북한에서의 공산화, 그리고 한반도 공산화를 기도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사상은 김재준, 한경직, 손양원, 김홍도, 김준곤, 조용목 등 교계 지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한국 교회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맺는말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고, 공산주의 실험은 끝났다. 지난 1세기 동안 자의건 강제였던 간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용공 사회의 결과가 어떠했던가? 이점을 관찰한다면 이승만의 공로증(恐露症), 반로의식(反露意識), 반공, 그리고 반공주의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지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 나라들보다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었는가?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의 북한만 봐도 알 수 있다. 3백만 명을 굶겨 죽인 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이 가능한 나라, 제노사이드 범죄의 나라, 죽음과 죽임을 무릎 쓰고 고향 집을 떠난 이른바 탈북한 자가 3만 명이 넘는 나라가 북한 곧, 소련 공산주의를 수용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볼셰비키 혁명 80주년을 맞는 1997년 프랑스의 역사학자 11명은 845쪽에 달하는 <공산주의 흑서(Le livre noir du communisme)>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자행된 살육의 역사를 정리했다. 흑서란 바로 이런 참혹한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레닌(Vladimir Ilyich Lenin) 이후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자를 1억 명가량으로 계산했다. 소련 2천만 명, 중국 6천5백만 명, 베트남 1백만 명, 북한 200~300만 명, 캄보디아 200만 명, 동유럽 100만 명, 아프리카 170만 명, 아프가니스탄 150만 명 등이다.
공산주의의 역사는 압제, 공포, 범죄, 학살의 기록이다. 저명한 정치학자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1989년 <대실패, 20세기 공산주의의 출현과 종말(The Great Failure: The Birth and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ury)>를 썼다.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는 점을 지적한 반공주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그다음 날 불가리아의 공산 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Todor Zhivkov) 서기장이 축출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다. 뒤를 이어 38년간 1인 공산 독재 권력을 행사하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권좌에서 밀려나 12월 25일 처형되었다.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마무리되었고, 1991년 12월에는 7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공산당 독재 권력이 붕괴되었다. 이른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USSR)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중국도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북한만은 버티고 있다.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지적처럼 공산주의는 수 없는 압제와 고통, 폭력과 전쟁, 인명 살상의 범죄를 자행한 실패한 이데올로기였다. 폴란드 출신의 망명 철학자 레젝 콜라콥스키(Leszek Kolakowski) 는 “사회주의는 공산당 1당 독재로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은 물론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산에 공산주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어떤 신학 교수는 “반공주의는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공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문제시할 수 있으나 반공주의 자체를 정죄할 이유는 없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는 이승만의 반공사상 혹은 반공주의의 결과로 얻은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axsglee@hanmail.net>
글 | 이상규
고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호주 장로교신학대학(PTC)에서 교회사를 연구했다. 호주신학대학(ACT)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칼빈 대학, 메노나이트 연합성경대학, 그리고 호주 메쿼리 대학교 초기기독교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은퇴한 후 현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학술상 등 여러 학술상을 수상했고, 『역사의 거울로 본 교회 신학 기독교』 등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