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인가?
2021-02-03
월드뷰 FEBR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글/ 김철홍(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국가의 권한
2020년에 전염병이 우리 사회에 준 부정적 영향은 국가의 역할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개인의 노력보다 집단 전체의 노력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는 한 층 더 강화되었다. 정부가 전염병에 대한 모든 정보를 독점하면서 국가는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모두 떠맡았다. 이런 변화는 좋지 않은 변화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문재인 정부 하에서 국가의 역할과 권한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전염병 때문에 국가의 권한이 엄청나게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하에서 국가의 권한은 단지 보건·의료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증가하고 있다. 경제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가 개입하고 간섭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하고 억압해도 많은 사람은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가 하는 일에 박수를 치고 더욱더 강한 지지를 표명한다. 왜 그럴까? 분명 우리가 모두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왜 그들은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017년 7월에 발표한 문재인 정부의 5대 국정 목표 중 3번이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였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슬로건이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는 모든 사람에게 불투명하고 불안정하고, 불안하게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취업은 어렵고, 현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 때문에 경기는 더 나빠지고 있는데 전염병까지 덮쳤다. 폐업 속출에 파산 속출이다. 살기는 더 팍팍해지고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이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는 너무나 달콤하게 들린다.
국가가 국민의 의식주를 비롯해 국민의 삶 전체를 책임진다는 약속은 내 맘속에 있는 미래를 향한 모든 불안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마태복음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무색하게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는 것은 내일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다. 생존을 염려하는 것이다. 미래의 나의 생존은 모든 인간의 고민이고 염려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우리를 향해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왜? “국가가 너의 삶을 책임져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머지않아 기본소득을 매달 지급해주고, 임대주택을 대규모로 지어 거주하게 해줄 것이므로 국가가 하는 일은 모두 정당성을 갖게 된다.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나를 위한” 일로 보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기업의 경영권을 약화하고,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최저임금을 계속 올리는 것은 다 “나를 위해” 정부가 하는 일이므로 옳다. 국가를 향한 이런 믿음이 무너지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의 힘찬 박수와 지지는 멈추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높게 나오는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핑크빛 꿈 뒤에 숨겨진 어둠의 현실
정말 국가가 나의 삶을 책임져주면 좋은 것일까? 솔직히 너무 좋을 것 같다. 천국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 번 생각이란 것을 해보자. 국가가 모든 국민의 삶을 다 책임져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먼저 국가는 지금보다 더 많은 권력과 권한을 가져야 한다. 모든 국민을 먹여 살리려면 지금보다 더 큰 관료 조직을 가져야 한다. 국가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야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 “내 삶을 책임지려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걷는 것으로는 당연히 부족하다. 한 나라에서 일 년에 발생하는 모든 생산의 수익을 다 가져가야 일 년 동안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돈이 생긴다. 삼성이고 현대고 뭐고 간에 기업을 다 국유화해서 그 수입을 국가 재정에 넣어야 한다. 더 큰 국가, 더 큰 정부가 필요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계획해서 생산하고 공급하려면 거의 무제한의 권력과 권한을 국가가 가져야 한다. 행정부는 당연히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하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 행정부는 만능이어야 하고, 그 권력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것 다 해” 정도는 되어야 국가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국가, 이런 사회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딱 맞는 명칭은 바로 전체주의다.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가지 않고도 국가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핑크빛 꿈이다.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도 “내가 지금 가진 자유와 권리는 그대로 유지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바보다. 국가가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지려면 국가는 국민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통제해야만 한다. 계획경제 사회에서 모든 일반인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포기하고 국가가 지정하는 생산 현장에 가서 국가가 지정하는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물론 지배계급은 예외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거주 이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등을 포기하지 않고도 국가가 “내 삶을 책임져 달라”라고 요구한다면 도둑놈 심보고, 양심 불량이다.
핑크빛 슬로건 위에 도사리고 있는 이런 어둠의 현실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치 눈이 먼 사람들처럼 눈을 뜨고도 못 보고,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 20세기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 모두 실패했는데도 “중국을 보라”면서 꿈을 버리지 않는다. 중국몽(中國夢)은 바로 이 전체주의 국가를 향한 꿈이다. 이사야서 5: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분들의 눈과 귀는 막혔다.
국가라는 메시아를 믿는 신흥종교
국가가 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죽을 때까지 책임지고 제공해준다면, 국가는 나를 이 험한 세상에서 구원해주는 구원자다. 국가가 메시아고, 그 국가의 지도자가 나의 메시아다. 국가가 나의 삶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맹목적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거짓 종교가 탄생한다. 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더는 하나님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일용한 양식은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가 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 6:34)”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거짓 종교에서는 국가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이 신흥종교에서 국가는 하나님을 대체하고,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 전체주의에서 국가는 우상이 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국가 지도자가 쉽게 우상화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전체주의 이념 자체가 종교성을 띠고 있고, 전체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참된 종교와 항상 적대적 관계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다.
국가를 나의 구원자로 섬기는 이 종교에 빠지면 필로폰 중독자가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중독 상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는 순간 험난한 이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종교에 더욱 심취하게 된다. 누가복음 16:13의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에서 재물은 헬라어로 ‘맘모나스’다. 여기에서 ‘맘모니즘’(Mommonism)이란 말이 유래한다. 맘모니즘은 ‘배금주의’(拜金主義)라고 번역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배금주의는 무엇인가? 바로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이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바로 맘모니즘이다. 국가가 매달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국가가 나를 100% 취직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살 집을 내가 장만하지 않아도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이 가진 ‘배금주의’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누가복음 16:13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국가를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paulstudy@naver.com>
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과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