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를 지켜내야 진정한 종교의 자유도 있다
2020-08-04
월드뷰 08 AUGUST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이호선(국민대 법대 교수)
표현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기 위해 취하는 모든 언어, 비언어적 행동을 말한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말이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언어적 수단 외에 무엇을 그리거나 표지를 남기고 특정한 행동이나 상징적인 동작을 취함으로써, 심지어는 아무런 말없이 침묵을 지킴으로써 표현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를 통한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언어적 표현은 개인의 신앙을 드러내고, 구원을 얻음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로마서 10장 10절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요약,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체계화한 하나의 교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 누가복음 12장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연약함은 이해하셔도, 믿음대로 표현할 것은 강력하게 요구하신다. 표현이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 구원과 멸망을 좌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일관된 메시지이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릴 때 놋뱀을 바라보는 최소한의 표현을 자기 믿음으로 고백한 자들은 살아났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죽었다고 구약은 기록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정적들의 노림수에 빠져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탄압당할 때 땅에 내팽개쳐진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권력 앞에 그 쉬운 표현을 하지 않아 순교를 당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일제의 신사 앞에서 머리만 숙이면 되었는데 그걸 거부함으로써 비참하게 옥사당한 믿음의 선배들이 이 땅에 있었다.
표현은 개인적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요체이기도 하다. 어떤 모임에 가입하는 것, 어떤 모임에서 활동하는 것은 더 확대된 표현이며, 보다 적극적인 표현이다. 마음속의 뜻이 바깥으로 표현되고, 이것을 나만이 아니라 남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될 때 표현의 자유는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 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한데 묶고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집회·결사의 자유’가 바로 교회의 자유인 것이다. 이 확장된 표현의 자유가 없거나 제한된다면 비록 헌법 제20조처럼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되어 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이요,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준(準) 내심의 자유’로서 순전히 한 개인 속에 있는 양심과 사상, 종교의 자유만큼이나 그 보호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존엄한 인간 가치는 그 내면의 자유, 그 내면을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 그 표현을 남들과 같이 공유하고 집단적으로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를 구성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이기에 그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그 한계 지우는 기준을 법적인 관점에서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 공공복리”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익적 요구가 있더라도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까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를 공익적 요청에 의해 어디까지 제한하며, 최소한 어느 선은 건드려서는 안 되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여야 하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하여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교회를 코로나 전염병의 온상인 양 취급하여 정규 예배만 허용하고 나머지 모임을 금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단속과 처벌에 나서겠다고 하고 있다. 역대 어느 정권, 아니 대한민국 외의 어떤 외국의 사례에서도 예배의 성격을 정권이 정의하고, 처벌을 예정하는 사례는 없었다. 이것은 정책이 아니라 사실상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이라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불특정 다수인이 커피숍에서 모일 때 그 동석한 사람들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면 정규 예배 외의 모임으로서 금지되고, 그렇지 않다면 전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소모임으로 모였다 하더라도 교회와 무관한 척하면 괜찮고,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고 드러내면 처벌된다는 기막힌 현실 앞에 한국 교회가 놓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한 세기가 지나지도 않은 현대사의 사건들을 놓고 성역화 하여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처벌하겠다는 입법이 시도되고 있다. 보편적 상식 속에 저절로 걸러질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법으로 강제한다는 것은 현대판 ‘신성모독죄’를 만들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를 통해 특정 집단에 의하여 어떤 기억은 강제로 기억하고, 어떤 기억은 강제로 잊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다. 나아가 선(善)을 독점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오만한 발상은 우상화로 발전될 수밖에 없다. 북한 김일성 사교(邪敎) 집단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기독교인들이 무엇보다 지켜내야만 하는 가장 신앙적인, 그러면서 시민적인 소중한 가치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종교의 자유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 북한 헌법에도 종교를 가질 자유는 명시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언제나 권력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인간에게는, 통치자의 지위에 있을 때나 같은 시민의 입장에 있을 때를 불문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좋아하는 것을 행위의 준칙(準則)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제하려는 성향이 있다.”라고 경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한번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권력은 그 달콤함을 못 잊는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념을 강요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막는 수단으로, 심지어 성역화를 통한 우상화의 수단으로서 표현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이념적 차별인 것이다.
이 이념적 차별을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로서 구 유고슬라비아의 부통령을 지냈던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는 이렇게 경고한다. “이념적 차별이 팽배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한 눈에 보아도,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처방을 엄격하게 고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하나의 새로운 종파(new religious sect)’가 등장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산주의자는 사실상 종파는 아니지만 종파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인종·카스트·민족 등에 기인한 차별이 이념적 차별대우보다도 나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러한 차별 형태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더 야만적이지만, 실제로는 정교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이런 차별들은 사회 내에서의 개별 활동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데올로기 차별은 사회 자체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개개인을 상대로 한다. 다른 형태의 차별대우들은 인간을 육체적으로 망가뜨릴지 모르지만 이데올로기적 차별 대우는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로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정신에 대한 압제는 폭압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고 가장 야만적인 형태이다. 모든 압제가 이것으로 시작하고, 이것으로 끝난다. 공산 체제하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차별은 한편으로는 다른 이념들을 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이념을 배타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두 가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압제의 가공할 형태를 띠고 있다.”
낙타가 텐트를 차지할 때 처음에는 머리, 그 다음에는 앞 다리, 다음에는 몸뚱이 이런 식으로 차츰 들어와서 결국은 텐트 전부를 차지하고 주인을 내쫓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가 공권력의 간섭과 제한도 이와 같이 될 우려가 높다. 처음에는 공중보건을 이유로 한 모임 금지가 나중에는 직접적인 종교적 표현에 대한 제한 – 법률로 곤란하면 언론과 대중 여론을 조작해서라도 –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이라도 한국 교회는 교회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대하여 “노(No)”할 수 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기독교인들이 나서야 한다. 그 길은 그저 권력에 순종하여 따르는 길보다 분명히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hosunlee@kookmin.ac.kr>
글 | 이호선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수료 후, 영국 리즈대학교(University of Leeds)에서 ‘EU 및 국제비지니스법’을 공부하였다. 2005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총무처장과 기획처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성곡도서관장의 직을 맡고 있다. 경실련 법제위원, 대한변협 기획위원, 사단법인 전국법과대학 교수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모임(정교모)’의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최근 출간한 밀로반 질라스의 <위선자들>을 비롯하여 〈완역 유럽연합창설조약〉, 〈기적의 자신감 수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