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 증명 4: 인류학적 논증

신 존재 증명 4: 인류학적 논증

2020-05-18 0 By worldview

월드뷰 05 MA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인류학적 논증은 인간의 인격이 지닌 자아 개념, 자유 개념, 도덕법 개념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논증법을 가리킨다.

첫째로,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 인격적인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슈퍼마켓을 생각해 보자. 슈퍼마켓 안에 있는 물품들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일목요연하게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다. 슈퍼마켓의 물품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슈퍼마켓의 주인이 있음을 증명한다.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들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아마도 하루에도 수만 가지 이상의 정보들이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정보들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들어온다. 만일 마구잡이로 들어온 이 정보들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그대로 쌓인 것이 인간의 마음의 전부라면, 인간의 마음은 거대한 쓰레기산과 같은 것이 될 것이며,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서 분열된 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청난 분량의 무질서한 정보들이 주제별로 혹은 시간별로 잘 분류되어 정돈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 꺼내다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많은 양의 정보들은 마음의 기억에서 퇴출당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작업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슈퍼마켓의 물품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인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정보정리 현상은 우리 안에 인격적인 주체가 실재함을 증명한다. 이 인격적인 주체를 자아라고 부른다. 자아는 놀랍고 경이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아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각기 다른 많은 무질서한 정보들이 몰려 들어와도 분열되지 않고 인격적인 통일성을 견실하게 유지하면서 이 모든 정보들을 장악하여 분류하고 정리하고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한다.

그러면 이 자아는 어디서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자아를 만들어서 넣어 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세계가 이 자아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도 없다. 자연은 인격체가 아니므로 인격체를 넣어 줄 수가 없다. 이 자아는 내가 아닌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 인간이 이 자아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도 없고 또 넣어 줄 능력이나 방법도 없다.

그런데 이 자아는 하나가 아니다. 자아를 가진 존재는 현재에도 수십억 명 이상이며, 과거에 이미 등장했던 인간들을 합하고 또한 미래에 등장하게 될 인간들까지 합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이 모든 인간들의 자아를 만들어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라야 할까? 스스로가 인격적인 주체이자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든 자아들을 어거(馭車)할 수 있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한하시면서도 전능하시고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밖에 없다.

둘째로, 인간의 자아의 특징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들어오는 정보들을 자유롭게 분류하고 정돈할 수 있는 것도 자아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선택의 자유를 나에게 넣어 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이 선택의 자유를 나에게 넣어 줄 수도 없다. 선택의 자유는 인격적인 존재에게서만 가능한 것인 반면에 자연 그 자체는 비인격적인 사실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를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일단 본인 자신이 인격적인 존재로서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온 세상의 모든 인류가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가 모두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 모든 인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넣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무한하고 전능하시며 동시에 인격적인 존재로서 스스로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들의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많아도 이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택의 자유는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이 선택의 자유는 한 존재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이런 조건에 맞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능하시고 무한하시며 동시에 인격적이시고 주권적이신 기독교의 하나님밖에는 없다. 주권적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구사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인간에게 도덕법이 있다는 사실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기능들 – 이성, 감성, 의지, 감각 등 –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인격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판단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판단기준이 없이는 옳다 또는 그르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 옳은 일은 해야 하는 의무이고 옳지 않은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온 인류의 마음속에 있는 이 판단기준을 “마음 판에 새겨져 있는 도덕법”이라고 한다.

도덕법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헌이 모세의 율법인데, 모세의 율법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도덕법과 매우 유사한 도덕법이 모든 인류의 문명권에서 확인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문명권에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관념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하늘의 개념이나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성경적 개념과 타 문명권의 개념이 상당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은 경배의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틀은 같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는데, 이 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한다. 서양의 경우에 칸트의 정언명령 제1항은 어떤 도덕적인 격률이 바른 격률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경우에만 적용하여 타당성을 인정받아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의 입장에 서서 적용했을 때도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황금률의 세속적 버전이다. 동양에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격언이 있는 바, 이 격언이 바로 황금률이다.

제5계명인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적으로 인륜의 길로 제시된다.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물론 각 문명권마다 합법적인 결혼제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문명권에서는 일부일처를 말하고, 어떤 문명권에서는 일부다처를 말하고, 또 어떤 문명권에서는 다부일처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 밖에서 행하는 성관계가 바른 인류의 길이 아니라는 원리는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제9계명인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명령과 유사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도 모든 문명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실을 사실 대로만 말하라는 뜻은 아니고 이웃을 상해하고자 하는 의도로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특정 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제10계명은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욕심꾸러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처럼 모든 문명권에 바른 인류의 길의 원리들에 대한 인식이 공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도덕법은 누가 새겨 준 것일까? 내가 도덕법을 내 마음 안에 새겨 넣은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나에게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에게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가 자신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새겨 넣은 기억이 없으니 이 도덕법은 인간으로부터 –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으로부터 이 도덕법이 올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비인격적인 사실의 세계로서 인격적인 관계에서라야 통용되는 도덕법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욥은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 인고”라고 물은 후에(욥 28:12, 도덕법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에 대한 물음),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고(욥 28:13, 도덕법이 어떤 인간으로부터도 기원하지 않았다는 뜻), 그렇다고 해서 깊은 물과 바다와 모든 생물과 공중의 새 곧, 자연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욥 28:14,21, 자연에서는 도덕법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는 뜻)고 한탄한다. 도덕법을 새겨 준 자는 인간이 아니고 자연도 아니면서 어떤 인격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완전한 도덕법의 소지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천문학적인 숫자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법을 심어 줄 수 있는 분이라면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존재여야 한다. 이 조건에 맞는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밖에는 없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천문학적인 분량의 무질서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고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분류하고 정돈하여 요리하는 자아,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인 도덕법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전능하고 무한하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한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