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진격의 거인

2020-03-22 0 By worldview

월드뷰 03 MARCH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이영진(호서대 평생교육원 신학과 교수)


이처럼 정제된 지면에 영화라는 매체를 통한 담론을 전개할 때면 언제나 마음 한편에 깃드는 노파심이 있다. 독자들이 생각할 때 여기에 소개하는 그 모든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할 것만 같은 우려이다. 영화중에는 모두가 꼭 보면 좋은 영화가 있고, 굳이 볼 필요 없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예 해악을 끼치는 영화도 많다. 그렇다면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아닌 것들은 여기 왜 소개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굳이 찾아다니며 볼 필요는 없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에 의해 소비되고 생산된 영물(靈物)이기에 그 소비자들의 배설을 반영한다. 이 배설(defecation)을 가리켜 우리가 흔히 신화(mythology)라 부르는 것이며, 그 신화가 문화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특히 선거철만 되면 맹위를 떨치기도 한다.

이 글은 엄청난 소비량을 자랑하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더 정확히는 우리와 동시대 현대인의 섭식 행태, 그리고 그 행태가 미친 사회 현상에 관해 <진격의 거인>을 통하여 관찰한 글이다. ‘먹는다’고 하는 이 기초적인 문제는 개인 식생활의 관습 차원을 넘어 사회·문화는 물론 정치 범주에까지 파급력이 있는데, 일찍이 포이에르바하는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통찰을 하였다.    

이 글은 다음 네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만화인가 서사인가, ‘진격의 거인’.
둘째, 오락인가 본성인가, ‘먹방’.
셋째, 식인인가 섭식인가, ‘카니발리즘’.
넷째, 작물화인가 가축화인가, ‘민주주의’.

실사 어벤저스.
에반게리온.


1) 만화인가 서사인가, ‘진격의 거인’


미국 만화는 초창기 월트 디즈니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영화 중간의 삽화 수준이던 만화를 총천연색 장편 영상물로까지 도약시켰고, 스티브 잡스라는 거장을 만나 입체 만화로 기술적 도약을 이룩하면서는 영화와 만화 사이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후 워너브라더스(영화사)가 DC코믹스를 인수함에 따라 월트 디즈니사는 경쟁적으로 마블사를 인수하였는데 그 결과가 <어벤져스>, <아이언맨>,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등 영화인지 만화인지 경계를 허문 실사판 만화이다. 이처럼 평면 만화가 영화 세계로 진입함에 있어 <미녀와 야수>나 <알라딘>처럼 서정적인 동화 이미지는 본래 만화 업자였던 월트 디즈니에서 그대로 독점하는 양상을 보인 반면 원래 만화 제작자도 아닌 워너브라더스 같은 기존영화사가 마블사/DC코믹스사 같은 평면 만화 업자와 합병한 사례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소재의 빈곤을 드러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엄밀한 의미에서 ‘미녀와 야수’나 ‘알라딘’은 이미 미국산 이야기가 아니며 다양한 영웅들 역시 상당수 북유럽 신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미국 전통의 이미지로서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 만화는 이야기의 원천성보다는 단지 기술 집약적으로 발전한 산업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스티브 잡스의 <토이 스토리>나 월트 디즈니의 <알라딘> 같은 기술적 측면이 아닌 서사적 측면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가령 <너의 이름은>, <갓파쿠>,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헤아릴 수 없는 명작들은 일본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겪는 지엽적 재앙(화산 또는 지진)이 어떻게 세계적인 환경의 의미로 극대화될 수 있는지 인간의 깊은 내면적 유대와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반게리온) 같이 서구의 문명과 사조를 일본 특유의 고립된 내면 구조 속에 넣고 완전히 해체했다 재조립해 세계 시장에 다시 내놓은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고도로 개성화된 특유의 고립감은 고립된 섬나라 환경에 기인해서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특유의 개인화된 서사로 탈바꿈시키는데 능하다는 점에서 기술집약적 미국산 애니메이션을 압도한다.

이를테면 <에반게리온>에는 ‘시토’라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시토는 사도(使徒)의 일본어 독음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의 ‘시토’에 관한 절묘한 묘사는 원작자 안노 히데야키 개인의 작품성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참으로 탁월한 서사인데, 어느 신학자보다 탁월한 ‘사도’에 관한 이해를 작품에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에 따르면 대체 어디서 보냈는지, 왜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나타나는 존재가 시토들이다. 제거해도 계속 보내온다. 아무리 제거해도 그치지 않고 계속 보냄을 받아 출현하는 것이 바로 이들 ‘시토’라는 존재이다. 그냥 그런 것이 ‘시토’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απόστολος) 본성에 관한 탁월한 이해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몇 명만이 사도라 주장하거나 심지어 현대 들어 부쩍 단 몇 명이서 자신을 ‘신’사도라 참칭하는 주장이 명백하게 오류임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출현하는 사도는 반대편 거악으로서, 우리는 반대의 입장에서 형식상의 우리 사도와 직면할 수밖에 없기에 거기서 빚는 생경함은 주로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하는 미국식 영웅의 폭력과는 다른 양상의 폭력을 경험케 된다. 익숙하고 무뎌진 종래의 정의(定義)가 반대의 입장에서 더욱 효과적 인식으로 상쇄되는 이러한 현상을 길항작용(拮抗, antagonism)이라 규정한다면, 바로 이 작용이 <에반게리온> 같은 고립성 일본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주도하는 것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진격의 거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에반게리온>과 유사한 규모의 서사 구조를 공유한다. 하나는 종말, 다른 하나는 식인(食人)이다. 특히 식인은 전자인 종말을 향해 치닫는 연속 관계의 고리로서 주된 행동 양태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사도에 대항하려고 만든 생체 로봇 에반게리온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사도를 물어뜯어 먹음으로 자기 각성을 일으켰다면, <진격의 거인>에서의 식인은 모든 문제를 잇는 행위의 연쇄이다. 거악에 공격받는 행위도 식인이지만, 그 거악을 방어하거나 상쇄시키는 행위도 식인이라는 점에서 길항작용이 더욱 충만하게 발전한 이야기라 하겠다.

바로 이 <진격의 거인>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통찰이 있다.

식인 행위는 우리 사회 여러 면에서의 표본으로 남아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우리의 사고, 행동 양식, 관습 따위를 고도로 관념화해내는 모종의 길항체(antagonist)로서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저 끔찍한 식인 풍습은 악습으로 규정 받아 비록 오늘날은 사라져 관습의 터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것은 비단 고고학 따위의 단층에서만 찾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매우 깊숙하고도 교활한 방식으로 우리와 근접 거리에서 관념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관념을 운영하는 형식이 <진격의 거인>에 아주 잘 보전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격의 거인>은 명백하게 서사(敍事)라 할 수 있는데 ‘서사’란 만화로 치면 일종의 ‘실사’란 뜻이다. 아울러 현대인의 관념에 남아 상쇄 작용을 일으키는 저 식인 앤터고니즘의 표본을 지금 당장 여기서 지목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먹는 것’을 주제로 삼는 모든 콘텐츠 행위, 흔히 우리가 ‘먹방’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진격의 거인.


2) 오락인가 본성인가, ‘먹방’


먹방은 ‘먹는,’ ‘방송’이라는 신조어이다. 이 ‘먹는 방송’이 소셜 미디어를 점령해 국민의 비만율을 높이고 있다며 ‘규제해야 한다’는 이상한 정책 방안을 정부가 공론화할 정도로 먹방은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신종 문화다.

물론 한국은 ‘먹방’의 발상지도 아니며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미국 푸드 파이터 대회 1위 경력의 맷 스토니라는 유튜버는 구독자가 1천만 명에 달하며, 쇼 일회 당 1만 칼로리를 먹는 것으로 알려진 아담 모란은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이다. 작은 체구의 일본 여성 키노시타 유카는 무려 520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녀는 지난 2014년에 우리나라 TV 프로그램 출연해 카레 30인분, 햄버거 30개, 우동 10그릇을 먹어 보인 유명 푸드 파이터이다.

우리나라에서 먹방은 아프리카 TV에서 선보인 이래 콘텐츠가 유튜브로 대거 이동하면서 스물두 개의 라면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송출해 단번에 십만여 명의 구독자를 얻은 유튜버가 있는가 하면, 이 ‘먹는 방송’ 한 가지로 3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도 등장했다.

비교적 후발 주자임에도 성장 규모 면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그리는 한국식 먹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까지 나서 규제하려 했던 대목도 그렇지만 ‘먹방’이라는 한글 신조어가 아예 해외에서 외국인이 올리는 먹방 영상에서조차 영어 ‘Mukbang’으로 명명될 정도로 한국식 먹방은 독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근접 거리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서양인처럼 산처럼 쌓아놓은 엄청난 양의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양’으로 승부하거나, 얼마나 빨리 먹느냐 ‘속도’로 승부하는 정도가 먹방의 전형이지만 유독 한국인 먹방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 먹방은 ‘보는 먹방’인 반면 우리 먹방은 ‘소리의 먹방’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양과 속도에 맞추어 자극하더라도 먹는 장면만큼은 놀라는 표정이나 만족하는 표정 정도의 묘사에 그치고 직접 묘사를 피하지만, 우리는 먹는 소리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서양인은 먹는 자리에서 자기들은 코도 풀면서 먹을 때 입에서 내는 소리에는 극도의 혐오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후루룩 쩝쩝 입속에서 나는 소리의 혐오에 흥행 비결이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러한 혐오를 동반하는 먹방은 분명 흥미로운 볼거리일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인에게 먹방의 의미는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한국 먹방은 한마디로 ‘무엇을 먹는가’ 즉 그 식성에 관심이 몰려 있다. 여기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명제는 단지 어떤 청결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에 대한 지향성이 아니다.

맷 스토니나 키노시타 유카 같은 외국 유튜버가 우리나라 음식에 도전했을 때 ‘무엇을 먹을까’ 고른 메뉴는 매운 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불닭 볶음면’이라는 인스턴트에 도전했는데, 그 이름을 보면 단지 맵기로 작정한 음식이다. 음식이 갖는 다른 본질은 없다. 정크 푸드란 본래 그런 것이지 싶겠지만 ‘무엇을 먹는가’라는 이 식성은 불닭 볶음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삶은 돼지머리에서 혀 뽑아 먹기’, ‘낙지 통째로 먹기’ 등 헤비 유튜버들이 고르고 수많은 대중이 열광하는 이 괴식들은 인스턴트 가공 음식이 아니다. 하나 같이 정성스럽게 조리한 천연 음식들이다.

그러므로 그 식성은 ‘어떻게 먹는가’라는 방식이 아닌 ‘무엇을 먹는가’ 라는 철저한 괴식성에 있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을 경악시키는 저런 괴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괴식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흔한 잡식이기도 하다.

먹방이 왜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그 동인에 관하여 이르기를, ‘현대인의 가족 단위 파괴,’ 그리고 거기서 야기된 ‘외로움’으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픈 욕망이 먹방을 탄생시켰노라는 서정적 해설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식사할 때 삶은 돼지머리에서 혀를 뽑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문제는 더욱 넓은 의미의 식습성을 포괄한다. 한국인은 대체 무엇이 먹고 싶은 것일까?

‘어떻게 먹을 것인가’ 또는 ‘왜 먹는 것인가’보다 ‘무엇을 먹는가’라는 식성은 강력한 집단성을 전제한다. 어떻게/ 왜 먹느냐보다는 ‘무엇을 먹는가’에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식성이 발현시키는 이 집단성은 먹방에서의 경우 ‘무엇이든 먹어 치우겠다’는 집단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길항체로 작용하여 강력한 앤타고니즘으로 발현하였을 때는 파괴적인 동물성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앤타고니즘을 우리는 이른바 ‘광우병 사태’ 때 목격한 바 있다. ‘삶은 소/돼지머리에서 혀를 뽑아 먹는’ 잡식성이면서도 “미국산 소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라며 일어난 길항작용이었는데, <진격의 거인>에 따르면 이러한 작용은 무지성(無知性) 거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식인의 집단성으로 분류할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먹방’은 오락이라기보다는 본성이며, 바로 그 무지성 본성이 식인의 습성을 따라 “청산가리를 먹겠노라”라는 집단성에서 거룩한 촛불을 드는 집단성으로 옮겨 다니도록 만드는 것이라 하겠다.


3) 식인인가 섭식인가, ‘카니발리즘’


고기와 촛불. ‘고기’로 충혈된 분노가 거룩한 ‘촛불’의 분노로 이행하는 이 기현상의 표본을 우리가 그 식습성 외에 다른 모델에서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근/현대기 모든 혁명의 모델로 추앙받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주제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였던 점을 고려할 때, “고기가 아니면 청산가리를 달라!”라는 주제는 참으로 독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고기에 대한 그 같은 애착은 그렇기에 ‘무지성 거인’의 식습성 외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다 한 것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런 무지성 거인의 출몰로 시작을 고한 후, 지성을 지닌 아홉 거인의 단계별 출몰로 동심원을 그려나가며 전개된다. 그리고 그 동심원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거인의 관계는 세 단계 성벽이 밖에서 안으로 차례로 붕괴하면서 비밀 해제와 함께 또 한 축의 동심원을 형성한다. 벽이 하나씩 붕괴되면서 거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왜 식인을 하는지 봉인이 해제되어가는 것이다.

아홉 종의 거인은 시조 거인, 초대형 거인, 갑옷 거인, 전퇴 거인, 짐승 거인, 여성형 거인, 진격의 거인, 차력 거인, 턱 거인, 각각의 능력과 특성에 따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들은 무지성 거인과 달리 지성을 지녔다. 목적을 구사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을 지녔다 하여 식인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무지성 거인과 달리 먹는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계승’이다. 각 거인의 능력을 타자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먹히거나 먹는 것이다. 목적에 의거한 식인이란 다음과 같다.

최초의 거인인 시조 거인은 에르디아 왕국의 설립자 프리츠를 도와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노예 소녀 유미르였다. 심성이 착한 유미르는 초월적 힘을 얻은 후에도 노예처럼 왕의 명을 따라 문명을 일으키고 적성국인 마레를 무너뜨리는 데 헌신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왕의 명에 따라 왕의 아이까지 낳는다. ‘명’에 따라 낳은 아이들은 딸 셋이다. 그러나 유미르는 왕의 아내가 되어 제국 발전을 위해 그토록 수고하고 딸을 셋씩이나 낳았지만, 노예 같은 삶에 환멸을 느껴 적국 마레의 병사가 던진 창에 왕 대신 맞아 죽음을 택한다.

이때 왕은 잔혹하게도 세 딸이 자기 어머니를 먹게 했는데, 그 세 딸이 각각 셋씩 낳은 자식들 그들이 바로 아홉 거인이다. 그러니까 속성의 계승은 친자조차도 생식 기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식인을 통해서만 계승된다는 점에서 무지성 거인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식인을 구현하는 셈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처럼 식인이라는 잔혹한 매개를 통하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오늘날 흔해 빠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는 세습이라는 전통적 계승 방식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최근 현직 국회의원이 무려 6선이나 했던 지역구를 아들에게 승계하려는 정치 세습이나 한 국립대 법학 교수가 아들 대신 에세이 시험을 치러준 교육 세습 따위는 유연하게 여기는 경향성을 보였다. 세습이라기보다 동질 집단 내의 지성적 식인(食人)에 입각한 정당한 계승으로 간주한 탓일 것이다. 이 같은 집단적 편식의 이중성은 <진격의 거인>에서 조명하고 있는 지성적 식인의 계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저 프리츠 왕의 145대손 칼 프리츠 왕은 어찌 된 일인지 적성국과의 전시 체제를 부정하고 변방의 작은 섬 파라디로 수도를 축소해 삼중 벽을 쌓고 자기가 선호하는 국민만 쏙 빼내어 데리고 들어가 버린다. 게다가 여덟 거인까지 모두 적성국에 줘버렸다. 이상한 평화를 구축한 것이다.

그 이상한 평화를 상징하는 삼중 벽의 이름은 바깥에서부터 월 마리아(Wall Maria), 월 로제(Wall Rosé), 월 시나(Wall Sina)로서 각 구간의 백성에 따라 차등을 두어 주거시키고 기억은 아예 몽땅 지워버린다. 칼 프리츠 자신이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시조 거인 속성을 보유한 까닭이다. (벽 이름 마리아, 로제, 시나는 시조 거인 유미르의 세 딸들 이름이다.)

모든 백성에게는 성벽 밖에 괴 거인이 있다는 터부만 전수된 채로 무려 100년이 흐른다. 바로 그 시점에 마레의 전사들이 된 거인들의 습격으로 월 마리아부터 차례로 벽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벽들이 지닌 기호가 무엇인지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붕괴된 벽 월 마리아. 월 마리아는 어머니이다. 주인공 에렌은 이 성벽이 무너질 때, 자신의 어머니를 무지성 거인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두 번째, 월 로제는 사랑이다. 로제(Rosé)는 장미를 뜻하는데 여기서 에렌은 전사로 거듭나지만, 함께 전우가 된 사랑하는 친구를 잃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위험 속에서 거인과의 싸움을 본격화해간다.

세 번째, 월 시나(Wall Sina)는 최종 방어벽이다. 그 벽 안에는 정치도 있고, 종교도 있고, 핵심 비밀도 은닉되어 있다. 시나(Sina)라는 독음은 ‘사이나’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사이나는 유대인의 성산 ‘시내산’의 ‘시내’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시내’의 어근인 신(סִין)은 수메르어로 달의 신(the god of the moon)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 구역에 ‘월교’(月敎)의 사제들이 있는 것이다. 이 월교는 무지하게도 벽을 숭배한다. 벽을 달처럼 숭배하는 이 자들은 백성이 무지성 거인들에게 무참히 잡아먹히는데도 당연한 듯 방치하며, 벽에 의존한 자신들의 안전한 계승 사회를 구축해간다.

따라서 이들의 식성이 섭식인가 식인인가에 관하여서는 이들이 먹는 것이 ‘무엇이든’ 그 본성에 기인하기에 형식상 식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지성이냐 무지성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무지성 거인.


4) 작물화인가 가축화인가, ‘민주주의’


식인(食人)의 악습이 미개 종족에 의한 무지성 내지 종교적 관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지식이 발달한 사회적 식습성에도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앞서 은유 속에 알아보았다면 이제 은유가 아닌 사료 하나 검토하고 마치려 한다.

우리와 동시대 카니발리즘은 기근이나 사고로 고립 시 생존을 위한 사례 정도에서 접할 수 있지만,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당시 광시성 식인(食人) 사건은 우리가 논의해온 집단성을 단번에 포획할 수 있는 사료일 것이다. 혁명의 적폐들을 마을이 통째로 잡아먹으며 벌인 이 살육의 축제는 불과 1960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살피는 이 기획의 초점은 미개인의 무지성이나 공산당 이념성이 아니라 앞서 굳이 ‘먹방’에 대한 관찰을 경유해 왔듯이, 음식과 그 식성 자체가 가져다주는 영향을 추인하고자 함이었다. 미개인은 미개하기 때문에, 공산당은 공산당이기 때문에 벌이는 괴식이었지만, 세계 경제 상위권을 자랑하던 우리나라에서 어찌하여 이처럼 괴이한 섭식 행태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연원을 살피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료는 그런 우리와 연관성이 밀접한 최적의 사료로 판단되어 골라봤다.

뉴질랜드 원주민으로는 우리에게 마오리족이 잘 알려져 있는데, 애초 뉴질랜드 동부에는 마오리족만 아니라 모리오리족이 번성했다 한다. 그러나 모리오리족은 1835년 12월 하루아침에 자유를 잃고 말았다. 마오리족 때문이다. 그해 11월경 배를 타고 도착한 500여 명의 마오리족 선발대가 모리오리족을 노예화하려 부락을 돌며 폭력을 행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모리오리족은 이를 평화롭게만 해결하고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나눠주기로 하고 평화를 제의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보름 상간으로 400여 명이 추가로 당도한 마오리족은 선발대와 합세해 모리오리족 부락들을 돌며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숨어 있는 사람도 다 찾아내 죽이고는 시체들을 요리해 먹었다 한다.

이 사건은 19세기 일이고 마오쩌둥의 카니발은 불과 50~60년 전 일이니 마오쩌둥의 카니발이 훨씬 섬뜩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마오리족의 살육이 더 시사성 있다.

마오리족과 모리오리족은 AD 1000년경에 똑같이 뉴질랜드에 당도한 같은 종족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오리족이 모리오리족을 멸족시킬 수 있었느냐? 사실은 살육당할 당시 인구도 두 배나 더 많았다는데.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광시성 대학살에서 발생한 식인 풍습 사례는 쟁이(Zheng Yi)라는 언론인이 지방정부 문서와 목격자 증언을 기반으로 저술한 Scarlet Memorial: Tales of Cannibalism in Modern China라는 책을 통해 폭로되었다.

인류학자들은 마오리족의 품성이 모리오리족보다 악했다든가 하는 따위의 추상적 근거에서 그 답을 찾지 않았다. 마오리족의 식량화에서 그 근거를 찾아냈다. 마오리족은 더 빠르게 식물을 작물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식물의 작물화는 식량화로 이어지고 쌓이는 식량을 운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잉여는 곧바로 전투력으로 환원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모리오리족은 뉴질랜드에 도착한 시기도 동일하고 모든 조건도 동일했지만 ‘식량화’에 늦었다. 식물의 작물화나 동물의 가축화를 복잡하게 여겨 보다 단순화시켰고, 그러다 보니 수렵 및 채집에나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전투력으로 환원할 자산이 되어주지를 못했다는 결론이다. 흔히 농경인은 온순하고 수렵/채집인은 야성적이고 폭력적일 것이라고 여기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고찰인 셈이다.

식물을 작물화시키고 동물을 가축화시키는 과정의 부단한 시행착오와 그 과정에서 동·식물은 세균에도 강한 근성으로 변모하기 마련인데, 모리오리족은 마오리족보다 뒤졌고, 아프리카는 유럽보다 뒤졌기에 세계는 정복자와 피정복자로 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물화와 가축화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해에 둔감한 것이다. 우리는 성급하게 스스로 방호벽을 파괴하고 철책을 걷어냄으로써 작물화와 가축화를 포기한 나라가 아닌지, 망상의 평화 삼중 벽만 믿고서 우리의 최강 거인들까지 넘겨주지는 않았는지, 급격히 퇴행하고 만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칼 프리츠 왕가가 적성국 마레에 여덟 거인을 스스로 넘겨주었을 때 그들은, 대형 근육에서 뜨거운 스팀을 뿜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초대형 거인,’ 적의 칼날이 뚫을 수 없는 갑옷 두른 ‘갑옷 거인,’ 몸을 단단하게 경질화 시켜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전퇴의 거인,’ 짐승처럼 날렵한 ‘짐승 거인,’ 섬세한 공격이 발달한 ‘여성형 거인,’ 아주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려 오래 버틸 수 있는 ‘차력 거인,’ 날카로운 치아 턱과 손톱으로 단단한 것을 부숴버릴 수 있는 ‘턱 거인,’ 그들 모두가 적국의 병기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스스로 거부하고 적국으로 넘어가지 않은 거인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진격의 거인’이다.

뉴질랜드 원주민 전통 복장.

진격의 거인은 왜 넘어가지 않았을까. 진격의 거인의 속성은 꺾이지 않는 끈기/인내, 그리고 빠르게 재생되는 복원력으로 알려졌는데, 이 속성의 근원을 ‘자유’로 규정한다. 즉 강력한 자유의 속성을 가졌기에 프리츠 왕가도 적성국 마레도 이 자유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격의 거인은 삼중 벽 밖에서 은둔하면서 적성국 마레가 정치범들을 무지성 거인으로 만들어 낙원행 시킬 때, 자신의 계승자를 찾아내 자신의 살을 나눠주고 그를 ‘진격의 거인’으로 계승시킨다. 그 계승자가 바로 ‘진격의 거인’ 에렌의 아버지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작물화 내지 가축화인가? 아니면 자유인가?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은 작물화에도 실패했고 가축화에도 실패하여, ‘민주주의’ 껍질만 쥐고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꾀하며 적성국에만 호소하고 있다. 이 절체절명의 계절에 자유의 속성이 충만한 ‘진격의 거인’들은 4월 앞으로ㅡ 進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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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며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영혼사용설명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