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위대한 일
2020-03-21
월드뷰 03 MARCH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소설가)
결혼하고 3년이 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집안의 어른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50세가 넘은 막내 고모가 특히 더 걱정하셨다. 고모는 자녀가 생기지 않자 대신 개 한 마리를 10년째 키우며 살고 계셨다.
“아가! 한나처럼 기도하고, 그래도 아니면 늦기 전에 입양도 생각해봐라.”
쓸쓸해 뵈던 고모의 얼굴이 마음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남편의 유학이 결정되기를 기다리며 집사님 몇 분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 모임에 아기를 기도 제목으로 내놓았다.
“기도해주세요. 제가 기도하다 보면 제 아기 기도는 생각이 안 나 못하게 되네요.”
당시 나는 철야 기도회 등에 참석하며 나라와 민족, 선교지, 신학교, 교회, 남편의 유학, 집사님들의 개인기도 등 온갖 기도를 다 했는데, 새벽에 집에 오려고 택시에 앉으면 그제야 아, 아기 기도를 안 했네, 하고 생각이 났다. 며칠 후 집사님들은 남편에게 먹이라며 한약 한 상자를 집으로 가져오셨다. 아마도 아기가 안 되는 것이 몸무게가 50 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던 남편의 허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기도는 저희가 열심히 할 테니 잊지 말고 꼭 챙겨드리세요.”
그리고 몇 달 후 어느 아침,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 냄새가 싫었다. 그럴 리가! 조금 마셔보았다. 도저히 역해서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단박에 알아차리셨다.
“아기가 들어선 것 같구나!”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시작된 입덧은 나의 30년 인생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고약한 경험이었다. 내 코는 주변의 모든 냄새에 반응하고, 무엇이든 입으로 들어가면 식도를 통과하기 전 위가 그 음식물을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나마 조금 먹을 수 있는 것이 비빔냉면과 바나나였다. 혼자 음식점에서 밥 먹는 일을 못 하는 딸을 위해 엄마는 매일 버스를 타고 와서 함께 냉면을 드셨다. 동생은 어렵게 생긴 조카를 위해 기꺼이 바나나값을 대주었다. 바나나가 한 개에 이천 원 정도 해서 대여섯 개 달린 송이에 만원이 넘을 때였다. 신기하게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남편은 임신 사실을 안 그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에 손을 대고 아기에게 속삭이듯 기도해주었다. 다섯 달이 지나자 아빠의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기도할 때 아기가 툭툭 발길 짓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온 가족이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며 한 생명을 기다렸다. 그렇게 못 먹어도 몸무게가 10 킬로그램 이상 늘고, 걸음조차 편히 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바로 누워도, 옆으로 누워도 편치 않았다. 그럴 즈음 진통이 시작되었다.
산통!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 겪어보는 그 간헐적 고통을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어 그냥 울었다.
“산모님, 지금 우시면 힘 빠져서 아기 나올 때 힘을 줄 수 없어요. 제발 그만 우세요.”
내가 너무 운다고 생각한 간호사가 날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끊임없이 엄마를 불렀고, 결국 간호사는 규칙에 어긋나는데도 산모가 너무 우니까 잠깐 면회를 시켜준다며 엄마와 남편을 만나게 해주었다. 서른 살의 딸이 철철 우는 모습을 본 엄마는 내 눈물을 계속 닦아주시면서도 어이없어하셨다. 밖에 아버지와 시아버지도 오셔서 기다리신다고 했다. 조금 진정이 되고 침대가 이동하여 분만실로 들어갔다.
“힘을 주세요! 아기 머리가 보여요!”
내가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나는 약 40분 코마 상태로 들어갔고, 많은 하혈을 했다고 후에 들었다. 다행히 딸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난산으로 태반 찌꺼기가 덜 나왔다고 1주일 후 나는 다시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아야 했다. 아기는 많이 울다가도 아빠가 안고 조용한 목소리로 어르면 열 달 동안 기도해준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 울음을 그쳐 신기했다.
둘째 딸은 우리 가족이 미국 필라델피아 리누드가든에 있을 때 나에게로 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피머신에 물을 붓고 커피를 채워 넣었다. 3월의 그 날 아침, 커피 통을 여는 순간 이상했다. 어? 하면서도 커피를 채우고 버튼을 눌렀다. 꾸루룩꾸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가 떨어지자 그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커피 향에 나는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았다. 아!! 나는 직감했다. 아기구나! 그날부터 아기가 나오는 날까지 나는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이 시작은 첫째 때와 똑같았다.
그렇게나 즐겨 마셨던 커피가 아기가 생기면 어째서 향부터 역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새 주거지로 나의 궁전을 택한 아기가 자리를 잡으며 카페인에 찌들어 있는 환경에 화들짝 놀라 더 이상의 카페인 출입을 거부하는 것인가? 당시 한 교회 목사님의 설교집 출간을 위해 원고를 정리하며 하루에 서너 잔, 많게는 대여섯 잔을 즐겨 마시던 커피가 거짓말처럼 싫어졌다.
석사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 남편과 세 살짜리 딸아이만 곁에 두고 치르는 입덧은 처참했다. 한국 음식들이 그리웠지만, 남편이 준비해줄 수 있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사가지고 오는 맥도널드 햄버거였다. 얼마나 못 먹었는지 아기 출산을 앞두고 몸무게가 늘기는커녕 평소 몸무게보다 2 킬로그램 덜 나갔다. 미국인 의사도 나도 걱정이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입덧은 막달까지 계속되었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오자 마지막에 몇 숟갈이라도 먹어야 힘이 난다며 가까이 사는 지인이 중국음식점에 데리고 가 이것저것 시켜주었다. 음식을 먹는 중 진통이 시작되었다. 딸아이를 지인의 집에 맡기고 친구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필라델피아 아빙톤병원. 다행히 그 병원에서는 진통하는 산모 옆에 남편이 함께 있도록 해주었다.
“한 번만 더 힘을 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오케이!!!”
아! 어떤 단어로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양수가 터져 흘러나가는 것, 아기가 세상으로 나가는 길에서 벌이는 힘겨운 몸짓, 아기의 몸이, 태반이, 뭉텅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 모든 것을 나의 온몸의 세포는 생생하게 느꼈다. 아기의 몸은 커다란 물주머니처럼 쿨렁, 빠져나갔고, 그 순간의 느낌은 세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원함과 쾌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출산이 고통만이 아님을 나는 또렷하고 생생하게 경험했다.
분만실 밖에서 응원해주는 가족 한 명 없이 출산했지만, 예후도 좋아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빙톤병원은 산모에게 음식 주문표를 주었다. 몸의 상태가 좋아 아이스크림과 사과를 표시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과를 베어먹으며 상했던 이는 이후 셋째를 낳고 몸조리를 잘해도 회복되지 않았다.
첫째를 낳은 후 엉덩이와 발등이 여름에도 시렸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누군가 발등을 바늘로 마구 쑤셔놓고 그 위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듯 확확 아렸다. 여름에도 엉덩이가 시려 일할 때 전기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첫째 때 태반 찌꺼기를 꺼내는 시술을 받으며 찬바람이 들어갔을 거라고, 산후풍이라 했다. 둘째를 낳고 몸조리를 잘하면 말끔히 사라진다고 했다. 나는 어른들의 말씀을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둘째를 낳고 이웃에 사는 한국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한 달간 몸조리했다. 미역국도 잘 먹고, 양말 꼭 신고,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친할머니는 엄마를 시켜 사흘이 멀다고 국제 전화를 해서 “100일이 되어야 벌어졌던 모든 뼈가 다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니 산모는 100일 동안 몸을 잘 보호해야 하는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씀하셨다. 정말 엉덩이의 시림과 발등의 후드득거리는 열감이 사라졌다.
네덜란드에서 남편이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또 커피 향이 역하게 느껴졌을 때 남편과 나는 당황했다.
“나 아기 만드는 일을 안 한 것 같은데….”
“어? 그럼 내가 동정녀 마리아??”
가난하고 힘든 유학 생활에 아이가 셋이 된다는 것이 둘 다 부담스러웠다. 그 말을 아기가 들었을까? 너무도 탐스러운 아기가 나의 몸에서 쑥 나오더니 나의 가슴에 안겨 젖을 쭉쭉 빨아 먹었다. 아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며 보니 아들이었다. 꿈이었다. 화장실에 가 소변을 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일어나보니 변기 가득 피였다. 9주 차 유산이었다. 유산 후, 후처리가 필요하다 하여 수술실로 들어가며 나는 많이 회개하며 울었다.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다. 애타게 아기를 기다리던 날도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온 아기를 박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후 1년 만의 임신은 우리의 회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표 같았다. 둘째 출산 후 5년 만이었다. 8살, 5살이 된 두 딸이 아빠를 대신하여 엄마 배에 손을 대고 기도하며 우리 가족은 셋째 아기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네덜란드는 병원이 아닌 가정에서의 분만이 보편화 되어 있는 나라다. 의사가 아닌 전문 산파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아기를 낳는다. 시 당국에서는 안전한 출산과 양육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 리스트를 주고 다 갖추었는지 집에 들어와 검사한다. 그 품목에는 출산 중 혹 발생할 정전에 대비하여 예비 전구와 퓨즈까지 들어있다. 나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심사에 통과했으나 첫째 출산 때의 코마 상태와 하혈이 걱정되어 의사와 상의했다. 결국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했다. 나는 사실 미국에서 둘째를 출산할 때의 그 신기하고도 벅찬 순간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기대에 출산의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 축복의 순간, 그 희열의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셋째의 출산은 너무도 달랐다. 나는 물이 가득 든 물 항아리 같았다. 가득 든 물이 밤새 겨울 추위에 얼어 팽창할 때 독이 갈라지고 깨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기가 힘든 몸짓으로 산도를 통과할 때 몸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두둑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놀랍고 두려웠다. 아, 죽는구나! 싶었다. 내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첫째 때를 기억하고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아기를 받아 든 네덜란드 할아버지 의사는 “아이고, 통통한 아가씨군요!”라고, 간호사는 “오!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탄성을 발했다. 네덜란드 아기에는 없는 검은 머리를 보니 신기한 듯했다.
셋째를 안고 집에 돌아와 한국의 권사님께도 전화를 드리며 이제 아기 기도는 그만하셔도 된다고 조크를 했다. 권사님은 “우리가 성별 기도는 안 했나 봐요.” 하시며 큰소리로 기뻐 웃으셨다.
나는 결혼할 때 남편과 함께 계속 공부하여 나도 학자의 길을 가리라 꿈꾸었다. 그러나 아기가 생기고, 열 달 가까이 계속되는 지독한 입덧에 감히 학문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남편이 나라를 바꿔가며 학위를 딸 때마다 나는 아기를 한 명씩 낳았다. 많은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첫째를 낳을 때는 철이 없고 어리광이 과해 난산 끝에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둘째와 셋째는 음식도 문화도 낯선 이국에서 홀로 낳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자 나는 단단해졌고 모두 순산했다.
이제 세 딸은 아름다운 성년이 되었다. 어제 일처럼 출산의 기억이 생생한데도 딸들이 나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사실 지금도 실감 나지 않는다. 한 생명의 시작과 탄생, 그 비밀과 신비로움을 어찌 이해하며 나의 우둔한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전도자의 말씀처럼 바람의 길이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함 같이 나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경험했고, 새벽이슬 같은 청년으로 성장한 세 딸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세 딸의 출산은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서 이루어낸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이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 127:3-5).”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