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과 정신 질환 –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악령과 정신 질환 –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2019-04-13 1 By worldview

악령과 정신 질환

– ‘거라사 광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

 

월드뷰 04 APRIL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청년 시절 출석하던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한 학생에게 성경 한 구절을 읽으라고 시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학생은 주저하며 읽지를 못했다. 그래서 좀 센 어조로 다시 말했다. “OO야~ 뭐하고 있어? 어서 읽지 못하고?” 그러나 이번엔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읽지 못했다. 그때였다. 바로 그 옆에 있던 학생 하나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OO야! 읽지 마! 에잇 씨… 읽지 마!” 그러고서는 둘이서 함께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느닷없는 사태에 깜짝 놀란 나는 ‘아, 정녕 이것이 성경에서 글로만 접했던 악령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제 이 글에서 방법적 틀로 사용하려는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도 그와 비슷한 섬뜩한 장면이 나온다. 악령 들린 소녀 영신이 갑자기 정색하며 쏘아붙이는 것이다.

 

“하지 말랬지!”

 

왜 <검은 사제들>인가

 

악령과 정신 질환.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돋우는 이 두 어휘의 조합은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악령은 종교적이지만 정신착란은 정신과학 표현이다. 그리고 악령은 자아에 대한 타자화이지만, 정신 착란은 대개 타자화에 실패한 자아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다가 종교적 악령에 대한 이해만도 인간이 지닌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정신 착란 역시 심리적 요인에서 뇌/인지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 분석도 다 다르다. 각기의 다른 이해의 이 같은 난립은 어떠한 전문성으로도 완벽한 해명에 도달하지 못한 현실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의 다양성은 종교냐 과학이냐를 가려내는 시도 이상의 가치를 갖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악령과 정신 착란’은 그 매개를 자처하는 우리 자신이 때로는 종교를, 때로는 과학을 오가며 펼치는 모종의 자아실현 속에서 자기 악(혹은 선)을 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출되는 상징들을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문화라 부르고 내면적으로는 배설이라 부른다. 이 글에서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를 해석 틀로 들여오려는 것은 바로 그 문화 배설의 예시로 적합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검은 사제들>은 성서에서 의인화된 악령이 인간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과 최초로 대면하는 장면에 관한 여러 이해를 담고 있다.

 

12형상인가 12간지인가?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 인류학의 위대한 역작 The Golden Bough(황금가지)를 남긴 제임스 프레이저에 따르면, 주술의 원리는 세 가지다. 유사 법칙(Law of Similarity), 접촉 법칙(Law of Contact), 감염 법칙(Law of Contagion). 이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는 ‘that like produces like’, 즉 ‘유사는 유사를 산출한다’는 법칙이다.

이 영화에서는 악령의 정체가 ‘12형상’ 중 하나라는 암시로 시작을 하는데, 마치 모든 고통과 질병, 기근과 전쟁, 심지어 평화의 진원지인 듯 소개되는 ‘12형상’이란, 황도대(黃道帶, Zodiac)로 불리는 태양계의 여러 천체(별자리)가 지나는 길의 12분할에 매겨진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 주기를 12별자리라 부른다면, 동양권에서는 12간지라 한다. 앞서 언급한 유사 법칙에 합리적 과학을 입힌 가장 보편적인 주술이 바로 전 세계를 관통하는 이 황도대 법칙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들 12동물상을 태어난 시(時)의 상징으로 보고 운세를 가늠하듯이 서양에서는 이 황도 12궁을 각기 타고난 운수라 믿는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고, 그 시간이란 이 천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원리가 운명에 대한 숭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범띠 구마사(퇴마사)를 선호한다. 그 호랑이 상징이 서구의 형상들과 우리나라 형상들 가운데 공통된 유일한 형상이기 때문이라는데, 서구의 사자자리를 호랑이로 대신 호환시켜 놓은 것은 사실 이 Zodiac의 인도 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양띠이다. 독자들께서는 이 주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가?

 

사제인가 퇴마사인가?

 

사람에게 들어간 악령을 쫓는다며 물의를 일으키는 뉴스 대부분이 개신교에서 발생하지만, ‘구마 의식’을 제도로서 명시하는 곳은 도리어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이다. 가톨릭의 교회법 제1172조는 교구의 허가를 받은 신부만이 구마 의식을 행하도록 명시하고 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김범신 베드로 신부(김윤석)가 바로 허가받은 구마 사제이다. 그렇다면 구마 의식이란 무엇일까?

<검은 사제들>에 소개된 구마 의식은 이런 장르의 고전과도 같은 영화 <엑소시스트(1978)>보다도 한층 고증에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바퀴벌레와 쥐 떼가 환영처럼 등장하긴 하지만, 적어도 악령 들린 사람이 천장에 달라붙어 뱅글뱅글 도는 공중 곡예 따위는 일체 절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고증된 그 의식 자체가 미신에 상당하는 요소로 채워져 있다. 레오 13세의 구마 기도문으로 알려진 ‘성 미카엘 대천사께 바치는 기도문(라틴어)’은 그나마 예문이라 치더라도, 강력한 힘을 동반한다는 일련의 소도구, 곧 십자가, 성경, 스톨(사제 목에 걸치는 천), 성수(유), 심지어 소금까지.., 그럼에도 영화에 등장하는 신학교 학장이 가톨릭을 ‘이성의 종교’라 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이성 종교’의 구마 의식은 영화 속에서 무속인 제천법사의 퇴마 의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속인은 빌며 달래고 검은 사제는 엄히 꾸짖었다는 차이는 있겠으나, 그 외적 주술의 요소는 양자가 무리 없이 잘 융합되고 만다. 이런 미신과 고등 종교의 의례가 혼합되고 버무려지는 것은 영화이기에 차치하더라도, 과연 개신교는 이 유사 법칙, 접촉 법칙, 감염 법칙의 원리와 행위로부터 자유로운지 또한 숙고해볼 일이다.

비록 이와 같이 미신적 구마 행위를 주된 소재로 삼은 영화이긴 하지만, 의외로 중대한 텍스트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김범신 신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라. 기혼. 아락세스. 이락투. 유카!” “거짓말의 아버지이자 태초의 살인자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어디서 온 것이냐!”

악령: “우리는 여기에도 있었고 저기에도 있었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다.” “우리는 2,430 명에게 옮겨 다녔다.”

김범신 신부: “언제부터 이곳에 온 것이냐!”

악령: “여기 너희 원숭이들이 3,254,640마리가 되었을 때 왔다.” “지혜 있는 자여. 들으라. 그냥 밖에 있는 사람처럼 못 본 척하고 살란 말이다!”

악령이 쏟아낸 이 말들은 이제 우리가 정위시키고 읽으려는 성서의 그 장면 곧, 인간의 몸을 입은 악령이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땅에서 첫 대면을 하는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 담긴 기호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긴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선 악령에 관한 고찰을 좀 더 한 후에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악령인가 정신착란인가?

 

저렇게 ‘대화’를 하는 존재로서의 인격은 실제로 악령인가 정신착란인가? 정신착란은 정말 악령인가? 왜냐하면 그 거라사인이 등장하는 공관복음의 묘사는, 영락없는 광인의 행동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 행동을 집중으로 다루는 분야가 있어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상심리학(異常心理學)이라 불리는 분야다. 이 분야는 ‘정신과’와도 차이가 있고 ‘심리과’와도 약간 차이가 있다. 정신과적 접근이 뇌 관련 약물에 해당한다면, 상담 심리는 약물이 아닌 심리적 접근이다. 그 중간 정도가 이 분야일 텐데 그 역사를 보면 원시 고대에는 악령론(트레핀)으로 접근하던 것이 그리스 시대에는 신체적 원인론(체액 이론)으로, 그러다 중세 들어 다시 악령론(마녀사냥)으로 변천해 온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이 변천사 속에 ‘종교와 과학’ 또는 ‘미신과 이성’ 간의 이견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상 행동을 전적으로 악령의 짓이라 보았다. 이상 행동이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마술적 힘에 의해 비롯된다고 본 그들은, 신체와 정신을 어떤 선과 악의 전쟁터로 보았기에 그 치유 역시 악령을 몸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문제는 트레핀(trephine)이라는 도구로 두개골에 구멍을 내어(trephination) 악령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는 데 있다. 그리스에서는 좀 다르게 이해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일찍부터 이 이상 행동을 일종의 뇌질환으로 파악하여 4개의 체액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황색 담즙, 흑색 담즙, 혈액, 점액). 예를 들면 황색 담즙 과다는 분노의 원인으로, 흑색 담즙 과다는 슬픔의 근원으로 보는 식이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요양과 금욕으로써 슬픔의 근원 담즙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 시대 역시 이 문명의 의술을 이어받았지만, 로마의 멸망은 잠재해 있던 악마론을 다시 깨운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성직자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이상 행동을 일체의 선과 악(또는 신과 악마) 사이의 대결로 해석하는 시대로 회귀했다. 지동설이 그러하듯 과학과 의술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참고 요약: <이상심리학:과거와 현재(시그마프레스)>]

중세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악마론 내지 그런 미개한 방법들은 힘을 잃어갔다.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악마론은 물러났지만, 수용소 시대가 되었다. 시설과 수용자의 증가로 인해 쇠사슬로 묶는다거나 구타를 하는 등의 문제가 야기되다가, 비로소 어떤 도덕적 치료 내지는 보다 체계적인 정신분석에 입각해 다루어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특히 프로이트(Sigmund Freud) 시대로 접어들면서 ‘내 정신’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열리게 되었다.

이상 행동은 악령인가 정신착란인가? 이 이견들은 역사적 발달 단계로 자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세대에 언제나 공존했던 소위 ‘영’을 대하는 일종의 도식적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도 역시 두개골 속에서 뭔가를 뽑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을 떨치지 못해 보인다는 점에서 유사, 접촉, 감염의 법칙인 까닭이다.

 

돼지인가 베헤못(하마)인가?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이야기의 테마를 마태복음 8장의 ‘거라사 광인’에서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단지 꼬마 돼지 한 마리가 등장하는 것 외에는 마태복음만의 특징이 없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사물(사람 몸)에서 나와 사물(돼지 몸)로 옮겨갔다는 이해는 성서가 말하려는 본질이라기보다는 유사, 접촉, 감염의 법칙에 따른 우리의 관습적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의식하지 못하고 담았을 법한 그 ‘악령과 돼지’의 진정한 기호가 이 필름에 보전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구마 행위 장면에서의 다음 텍스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도 있었고 저기에도 있었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다.”

 

마태복음(8:28-34)과 누가복음(8:26-39)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처음 판본은 마가복음(5:1-20)일 것이다. 성서에는 악령과 맞닥뜨리는 다른 이야기도 많은데 이 본문이 가장 짧은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는 유독 가장 길게 묘사되어 있다. 통상 마가복음의 짤막한 기사들을 언제나 더 길게 진술해 오던 마태복음에서 이 기사만큼은 짧게 줄여 놓았다. 그러고는 마가복음에서 악령의 정체를 ‘군대’라고 기록한 것을 마태복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으로 표현해 놓았다. 그러니까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군대’ 악령이 들린 것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악령 들린 ‘사람이 두 명’(복수)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관찰이다. 또한 직설적으로 단지 “군대가 들렸다”라고 기록한 마가보다 “많은 악령이 들렸으니 군대”라는 식으로 풀어쓴 누가의 진술도 세련되지만, 아예 악령 들린 사람이 “두 사람”이라고 설명해 준 마태는 대단히 탁월하게 요약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마태는 이와 같이 합리적인 탓에 예수님과 악령의 대화를 다 약(略) 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악령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검은 사제들>이 마태복음 8장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고 인터뷰한 제작진은 다소 문외한인 것이다. 차라리 마가복음을 참조했다고 했으면 모를까. 그래서 이 영화에 담긴 참된 기호를 정작 제작진은 의식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공관복음에 공히 기록된 이 거라사 광인 이야기의 핵심은 ‘악령(혹은 마귀)이 예수께 먼저 나아왔다’는 사실에 있다. 게다가 예수님께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막 5:6-7)”

 

이 장면은 전 신약성서상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구약성서에서 그 어떤 선지자도 이 같은 권위(authenticity)를 드러냈던 전례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악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 이 사건은 그 악의 정체가 드러난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동안은 사람의 관념 속에만 머물러 있던 악의 정체가 실존적인 존재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폭로해 도래시킨 세대의 교체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스스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만 ‘이 자’가 예수님을 마치 어디서 인가 만났던 것만 같이 행동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거라사 광인이 저 멀리서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서 달려 나와 인사를 하더라는 이 이상한 행동의 원인은 오로지 하나, 그것은 우리가 주로 악령에게 부여해왔던 마술적인 지식으로 알아맞힌 것이 아니라 필경 이 자의 경험 속에 ‘그분’을 어디선가 만난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도상의 표지로 간주할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 만났던 것일까?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

 

그곳은 오래전, 아주 오래전…, 아마 가장 오래전이었을 것으로, <검은 사제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 어디서 온 것이냐!”라고 악령에게 반복해 다그쳤을 때에 그 악령이 했던 말 “여기에도 있었고 저기에도 있었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다”라고 하는 그 낯익은 소리 속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전 태곳적에 그들이 만났던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6-8).”

 

결국 이들이 만났던 자리는 태곳적 천상의 공중이었으며, 이에 따라 신약성서의 ‘예수님과 거라사 광인의 대화’는 다름 아닌 욥기 1장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의 속편에 해당한다는 해석학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단번에 미리 알아보더라는 저 본문은 그야말로 악마의 힘을 빌려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저자의 시도로 전락하고 마는데, 자고로 신약성서 저자들은 광인이나 사탄의 신통력을 빌려 하나님의 아들을 존재로 규명하는 방식은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할 것이다. 악령에게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구현하는 유사, 접촉, 감염의 수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분명한 이들 두 존재의 해후(邂逅)를 묘사하는 문맥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신화적 담론 안에만 머물러 있던 모호한 악은 마침내 사람의 인격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옛) 뱀이라는 신화적 관념 속 악의 화신이자, 까닭 없이 욥을 괴롭히는 (막연한) 천상의 존재로 여겼던 악의 정체가 이제 우리 인간 자신의 인격 형태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계 12:9)”

 

또한 이와 같이 그 태곳적 천상의 존재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크게 분 내어 이 땅과 바다로 내려온(계 12:12)” 존재임을 직시했을 때, 비로소 우리 앞에는 저 거라사 광인 속 사탄이 옮겨가기를 청구했던 ‘돼지’에 은폐된 정체까지 폭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는 대체 왜 간청했을까. 돼지의 몸을.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막 5:12)”

 

욥기는 창세기의 프리퀄(prequel)이다. 동시대이거나 더 앞선 책이라는 뜻이다. 욥의 고난으로 대변된 이스라엘의 고난이 새로운 창조를 통해 극복되는 과정이 담겼다.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와 창조는 포로기 이스라엘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욥의 고통이 잉태해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조와 창조 이전의 상징들이 욥기의 도처에 분여된 것은 그 때문인데, 특히 빈번한 동물 목록이 그것이다. 여기에 신화적 동물 기호까지 포함한 이유는 그것이 동물 이상의 어떤 형상을 표지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Zodiac(황도 12궁)이 동물 이상의 동물 기호였듯이, 이를테면 리워야단(욥 3:8; 41:1)과 베헤못(욥 40:15)이 어떤 인공적인 생물로서의 한 집단을 상징하듯이.

 

그러므로 이와 같이 거라사 광인이 욥기의 천상 회의와 긴밀한 기호로서 상호 관계에 놓여 있다면, 그(악령)가 지목했던 ‘돼지’는 단지 어떤 영화 이야기 같은 우연이 아니라,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관통하는 반드시 숙고된 선택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그 태곳적 사탄이 옮겨가기를 청구했던 ‘돼지’라는 짐승은 바로, 때로는 리워야단(악어), 때로는 라합(용)과 연장선상에 있는 ‘베헤못’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히브리어 비헤못(בְּהֵמוֹת)은 더러 (돼지와 유사한) ‘하마’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인에게 이르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8, 9)라고 말한 것은 어떤 미신적 퇴마 행위도 아니요, 그렇다고 현대 심리학적 요법 행위도 아니며, 그것은 말 그대로 이 땅에 은폐되어 있던 모든 (열두) 형상의 총화인 (옛) 뱀을 향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의 모든 형상이 집약된 Zodiac, 곧 그 운명적 시간의 퇴행은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기호를 띠기 때문이다. 리워야단, 라합, 베헤못…, 그것들은 마치 태초의 강의 이름 ‘기혼’이 ‘아락세스’, ‘이락투’, ‘유카’라는 이름으로 변천해 온 것과 같이 옛 뱀으로 귀결된 것이다(창세기에 나오는 기혼강은 아시리아 연구가들 의해 아락세스 또는 아락투로, 톨린스에 의해서는 유카로 추정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라. 기혼. 아락세스. 이락투. 유카!”

“거짓말의 아버지이자 태초의 살인자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어디서 온 것이냐!”

 

군대와 리워야단

 

희랍어로 ‘악령’(δαιμόνιον)이나 ‘더러운 영’(πνεύματι ἀκαθάρτῳ)을 한글 성경이 일관되게 ‘귀신’으로 번역해 온 것은, 결과적으로 신약성서의 악한 영적 존재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둔감한 이해의 요인이 되었다. 그 어휘는 사실상 ‘죽은 사람의 남은 넋(鬼神)’이라는 선입견을 넘어서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사, 접촉, 감염의 법칙에 활력을 더하여 신약성서 저자가 투사했던 본래 이미지를 민속적인 것으로 단축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마치 사자를 호랑이로 대체시키는 것은 허용하면서, 베헤못을 돼지로 환유해 내는 데는 실패해 온 것과 같은 이치다. 민속의 악령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약성서 저자의 상징 속에 그려진 당초의 형상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과연 초대 교회의 설립자 및 신약성서 저자들이 그렸던 ‘군대’라고 이름 붙여진 악령의 형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구약성서에는 신기하게도 거라사 광인과 같은 귀신 들린 자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본문이 없다. 그러나 그것(귀신 들림)을 대체할 만한 본문이 딱 한 곳 있다. 어떤 악한 영적 존재와 사람의 신체가 혼합되는 유일한 구약 본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서 자식을 낳았다고 하는 네피림 본문이다(창 6:1-8). 현대인에게는 마치 성적 결합으로 연상되는 이 대목을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거라사 광인 이야기 본문의 악령 들림의 유사로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주술로서의 유사 법식(法式)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군대’의 정체를 표지하는 방식의 진수이기 때문에 그렇다.

네피림이 히브리어에서는 단순히 ‘거인’이 아니라 ‘떨어졌다’는 뜻의 나팔(נפל)에서 온 명사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그것이 ‘용사’ 또는 ‘기간테스(γίγαντες)’ 즉 ‘거인’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몸, 살, 영혼’에 관한 다음 본문을 보면 악령 들림으로써 네피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이 네피림에 관한 정보는 창세기 정경에 편입되고 남은 부분이다).

 

“… 몸과 살에서 품어진바 된 거인들은 땅의 악한 영들이라 불리며, 그들의 거처는 땅 위가 될 것이다. 악한 영들은 그들의 육체들로부터 역사하는데, 그들의 처음 시작이 거룩한 감시자로서 기반을 둔 ‘저 위’에서 창조된바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 위의 악한 영들이 될 것이며 (또한) 악한 영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늘의 영들은 하늘 위에 거처를 두며, 땅에서 태어난 땅의 영들은 땅 위에 그들의 처소를 둔다. 그리고 구름 위로 스스로를 옮기는 거인들의 영들은 떨어지고 파괴되며 전쟁하며, 땅 위에 있는 파괴와 악한 행실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음식을 취하지도 않으며 목마르지도 않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들 영들은 사람의 후손들과 대적하고 여인의 후손들과 대적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섞였다는 뜻?). 왜냐하면 그들은 살인과 파괴의 날에 그들을 움직일(조정할) 것이기 때문에… (에녹 1서 15:8-12, 사역)“

 

성서 저자들에게 있어 결국 이 ‘떨어진 자’들이 이 땅에서 모든 악령으로 활동하는 주체의 실제인 동시에, 특히 거라사 광인에게 뒤집어 씌었던 ‘군대’, 곧 레기온의 정체였던 셈이다. 따라서 돼지가 수몰되었다 함은, 창세기 노아의 홍수에 수몰당한 네피림의 종말에 상응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창세기, 욥기에 출몰했던 태곳적 악령의 결박 이야기는 세 개의 복음서상의 이 거라사 광인 이야기와 더불어 유다서, 베드로전·후서, 계시록 등에 기호와 편린으로 박혀 있다 하겠다(참고: 벧후 2:4, 5, 17, 22절).

그런 점에서 신약성서가 돼지(베헤못)로 소개한 군대(레기온)는 리워야단의 성격이 짙은 셈이다. 저 신화적 괴물은 언제나 우리가 항거하기 불가능한 인공적 권세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군대 지핀 거라사 광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이여” 하고 달려 나온 것과, 그것을 돼지 곧 베헤못·리워야단에게 옮기라 명하고 깊은 바다로 수몰시킨 사건이 담은 메시지는 매우 실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악령과 정신착란이라기보다는.

 

에필로그

 

악령과 정신 착란. 과거 청년 시절 그 아이들에게서 악령을 쫓아내는 체험을 한 뒤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첫째, 영적 존재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된 것. 둘째, 사람들은 개개인에게 지핀 악령에는 민감하지만 ‘군대’로서 악령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이를테면 타자에게 들린 악령을 향하여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묻는다.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라고 호통을 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대다수의 경우이다. 내가 그 시절의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안에 숨은 악령을 노려보기보다는 따뜻하게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악령과 정신 착란에 얽힌 난센스는 거라사 ‘돼지’라는 기호에 관한 해석의 부재만큼이나 무심함에서 기인하는 데, 바로 그 틈새를 ‘군대’ 또는 ‘세력’이 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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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며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영혼사용설명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