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에 대한 성경적 이해

구제에 대한 성경적 이해

2018-09-08 0 By worldview

구제에 대한 성경적 이해

 

월드뷰 09 SEPTEMBER 2018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발행사

 

2018년 9월호 발행사

 

성경은 곳곳에서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되기 이전의 로마시대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차별의식이 많았습니다. U.C. 버클리의 고대사학자인 로버트 냅(Robert Knapp)은 『99퍼센트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2011, 이론과 실천)』에서 로마 시민들은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대할 때 더 확실하게 군림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가난한 자나 노예를 매우 무시하고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로마 사회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가 보급된 이후입니다.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에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4세기 이후 중세까지 가톨릭 감독의 일차적인 의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었으며, 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혁명적 변화였다고 합니다.

중세 유럽 사회가 장기간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도 교회를 통해서 저소득 계층의 빈곤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세 시대를 소수의 호화스러운 사치생활을 하는 상층부와 비참한 하층부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중간층이 많이 있었고, 이 중간층이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재정은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충당된 것이 아니고, 각 지역 공동체의 소액기부자들 덕분이라고 브라운(Brown, pp. 114~115)은 말합니다. 공적으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제도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감독 법정(episcopalis audientia)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Brown, p. 139). 교회는 제국 전역에 걸쳐있는 연결망과 빈민구제 제도 등을 통해서 갈 곳 없는 수많은 도시 난민들과 이방인들을 정착시켰습니다.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가족으로 대했으며, 교회의 감독은 이방인 통합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자선행위는 서구 기독교에서 12세기와 13세기에 만발했습니다.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 순례의 길을 따라서 세워져 순례자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했으며, 병원들은 촌락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가난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했고, 가난한 자를 도우면 하늘에서 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사상은 부의 재분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수입의 1/3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중세에 만연했던 가난 문제를 해결하는데 교회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지국가 시대가 되면서 구제의 주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국가가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국가에서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국가에게 맡기고 교회는 영혼 구원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한쪽에서는 한국 교회가 구제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서는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의 생계를 책임지면, 교회가 복음을 전할 길을 차단당합니다.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지나친 복지는 의타심을 키우고 가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으므로 자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마가복음 14:7)”라고 했듯이, 인간 세상에서 어떤 형태이든지 가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라고 했는데, 칼뱅도 부와 가난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의 통로이고, 인간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가난한 자를 허용한 이유가 부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구제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정부가 나서야 하고, 어느 정도를 교회나 개인들이 감당해야 하는지, 그 경계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가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노동의 과실이 돌아가는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 한계 계층의 생존권은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과도한 복지 개입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요즈음 세태가 정부의 돈은 공짜이므로 받아서 쓰고, 안되면 파산신청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파산과 회생 신청을 너무 쉽게 한다고 우려합니다. 낮은 임금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실업수당을 받겠다고 쉬는 경우도 흔하다고 합니다. 물론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구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경험했던 바와 같이 이런 풍조가 만연하게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이번 호의 커버스토리로 영등포 역전의 쪽방촌에서 노숙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임명희 목사의 감동 스토리를 소윤정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서 전합니다. 복지국가 시대에 교회의 구제사역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이번 특집 주제에 대해서는 역대 최대인 11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먼저 호서대학 평생교육원의 신학과 이영진 주임교수로부터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글을 4편 실었습니다. 사익의 추구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전근대 시대와 달리, 사익의 추구가 공익과 조화가 될 수 있음을 잘 설명하는 것이 바로 1776년에 발행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미국의 독립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두 가지는 시민계급의 탄생과 부상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계기가 바로 종교개혁이었음을 숭실대학교 조성봉 교수는 설명하면서 오늘날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자본주의 체제의 뿌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 부산대학교 김행범 교수의 국가주의 구빈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었습니다. 그는 고용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최선의 복지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행정학자인 김행범 교수는 행정비용적 차원에서 효과적인 구제의 방법을 설명합니다. 한국기독교경제학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최승노 원장은 스스로 일하는 것이 남을 돕는 가장 최선의 길임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로 <국제시장>에 대한 해석을 이영진 교수가 소개했습니다.

능력이 있고 건강한 자들은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문제에 대한 글 7편을 실었습니다. 먼저 국민대학교의 김용민 교수가 기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록펠러의 기부이야기와 관련하여 상속세 문제를 통해 기업의 세습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고, 아울러 공익재단 설립에 어떤 입장이 바람직한지 설명했습니다. 한국기독교경제학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명지대학의 김태황 교수가 “빈곤층을 위한 경제정책”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손봉호 교수는 로울즈(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입각하여 보다 구체적인 측면을 설명했습니다. 한정석 편집위원은 시민이 시민을 돕는 자발적 민간복지 프로그램으로 <남양주 희망케어>를 소개했습니다. 성신여대의 박기성 교수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최저임금제가 부작용이 너무 심하고,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보다는 안심소득제가 더 바람직한 제도임을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이화여대의 김정효 교수는 교육에서의 경제적 약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교육복지 문제를 다룹니다. 캘빈대학에서 발간된 『Society, State & Schools』(1981)을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모두 기독교적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성경적 대안으로 “개인과 국가 이외에 다양한 매개구조들이 그 영역의 주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기능의 일부를 감당하여 각 가정과 교회와 지역사회가 개인이 가지는 삶의 오리엔테이션으로서의 종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 고백적 다원주의(structural and confessional pluralism)를 소개합니다.

이번 호부터 두 가지 고정 칼럼이 추가적으로 연재됩니다. 총신 신대원의 이상원 교수의 칼럼과 한동대 제양규 교수의 칼럼이 신설되었습니다. 고정 칼럼도 늘어나고, 특집 기사도 많아서 이번호는 분량이 많아졌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후기도 앞으로는 자주 싣기 원합니다. 많은 관심과 투고를 부탁드립니다. (※ 구독신청)

월드뷰 발행인 김승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