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 실리외교로의 리셋팅 계기, 백신 외교는 실패
2021-07-18
월드뷰 JUL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COLUMN 2 |
글/ 최원목(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1년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은 한국외교가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고 고립탈피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지불한 급행 비용은 국민의 몫이다.
최근 아태지역 자유민주주의 국가 간의 가치동맹 네트워크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중국의 팽창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 위주의 지역 체제 형성이 얼마나 무책임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직시한 국가들이 단순한 안보동맹을 넘어 가치동맹으로 발전해왔다. 중국의 전체주의 체제에 의존한 각종 과학기술(5G, 반도체, 백신 공급망, 드론 등)까지도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추진되고 있다. 글로벌 통신과 사이버 플랫폼의 중국화를 막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때마침 터져버린 코로나 사태는 글로벌 백신 네트워크 형성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미국 백신에 밀린 중국 백신은 해외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의 외교는 (1) 블루닷 네트워크(개방적이고 투명하며 부패 없는 표준을 준수하는 개발 프로젝트), (2) 클린 네트워크(차세대 무선 5G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연대), (3) 경제번영네트워크(EPN-보건, 농업, 기술 생산품에 대해 중국에의 의존도 감소 노력), (4)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EOIP-인도·태평양지역에서 법치, 인권, 항행과 비행의 자유 보호), (5) 쿼드(코로나, 기후변화, 신기술 연합 등), (6) 미·일·호주 3국 대화(개발금융, 문화협력, 항행의 자유 동맹), (7) CPTPP(높은 수준의 개방과 역내 공급망 확보) 등 아태지역의 가치동맹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RCEP이라는 느슨한 형태의 경제협의체에 중국과 함께 참여한 것을 유일한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친중 또는 중립화 외교 노선은 점점 국제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국내적으로도 백신 부족 현상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정권 재창출이 절대적인 과제인 현 정권으로서는 유일한 선택지가 미국 주도의 가치동맹에 합류하는 시그널을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게 된 셈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아래와 같은 신호를 워싱턴에 보냈다.
(1) 미국 측 요구조건을 상당히 수용해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을 타결(2021년3월 8일)
(2) 일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 배상 청구를 각하하는 판결을 내려(2021년 4월 21일 서울중앙지법) 일본과의 관계 개선의 단초를 마련
(3) 대형 공격헬기 2차 사업을 해외구매로 조기 전환해 미국산 아파치 헬기를 대량 구입(2028년까지 3조 1700억 원 규모 구매, 2021년 5월 19일 보도내용)
(4) 한국에 대한 미사일 중량 및 사거리 제한 철폐에 동의해 한국이 직접 대중 중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대중 미사일 방어망 구상에 군사동맹국으로 참여 가능성 제공
(5) 정상회담과 병행해 반도체업체들이 민간외교를 전개(삼성전자, LG 에너지 솔루션,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가 총 44조 원의 대미투자 약속)
이러한 SOS 요청을 받은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을 가치동맹에 편입시키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을 한꺼번에 쏟아내어, 이를 한국이 한꺼번에 수용케 하는 패키지 딜(일괄거래)을 정상회담을 통해 성사시킨 것이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약속이 성립됐다.
(1) 국내외에서 민주적 규범, 인권과 법치 원칙의 지배 비전 확인
(2) 한미일 3국 협력 강조
(3) 개방적 다자주의 공동 모색
(4) 한반도 비핵화 원칙 확인
(5) 새로운 이슈에 대한 과학기술 협력
(6) 글로벌 백신 협력
(7) 해외 원전사업 공동 참여
(8) 한국군에 대해 55만 회분의 백신을 미국 측이 제공 등
이는 전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한미관계와 한국의 외교의 방향이 재편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단, 외교적 고립과 국내적 비판(반미 친중 노선)을 탈피하기 위해 서둘러 미국 측의 패키지 딜을 수용한 데 따른 상당한 부작용은 예상된다. 기후변화 문제 가운데 우리 산업계에 상당한 부담이 될 탄소 저감 목표치가 한미 정상회담이란 막중한 계기에서 하달되었다. 곧이어 개최될 P4G, G7 등의 국제회의에서 구체적 압박이 예상된다. 탈원전 기조에 대한 비난을 감소시키기 위해 한미 간 해외 원전 수출 협력이 전격 합의된 것으로 보이나 국내 원전사업을 재개하지 않고, 탄소 저감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은 산업계에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갑자기 친중, 친북한 노선에서 탈피한 데 대한 중국과 북한의 반발도 언젠가는 있으리라 예상된다.
정상회담에서의 백신 관련 합의 내용은 한국 백신 외교의 총체적 실패라 평가할 수 있다. 협상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관료주의가 낳은 참사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 제조업의 사활과 국가안보 문제가 걸린 반도체 자급률을 대폭 올리기 위한 노력을 정권 차원에서 경주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업체 모시기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인 셈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 때 삼성전자를 비롯한 우리 기업들이 44조 원이나 되는 대미투자를 약속했다. 이는 어마어마한 대미 협상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는 협상 자산이었다. 정상회담 직전 문재인 정부가 예정에 없던 미국산 공격용 아파치 헬기구매를 결정한 금액도 3조 원이 넘는 데다, 한미 방위비분담 협상에서 우리 측 분담금 증액을 14% 이상 보장해준 바도 있다. 이를 모두 합치면 50조 원 규모의 예산 및 민간투자액을 문재인 정부는 미국 달래기에 쏟아부은 셈이다. 그러고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얻어낸 코로나 백신은 55만 회분에 불과하다.(나중에 얀센 백신 100만 회분이 실제 지원) 이미 미국 정부는 6천만 회(나중에 2천만 회가 추가되어 총 8천만 회)분의 백신을 세계에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명색이 군사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6천만 회의 1%에도 못 미치는 분량을 50조 원이나 들여 얻어와 놓고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회담”이라고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에서는 사용이 중지되고 유효기간 만료가 임박한 얀센 백신으로 실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모더나가 한국을 백신 위탁생산국으로 정한 것을 두고 글로벌 백신 허브로 한국을 도약시킨 쾌거로 선전하고 있다. 아스트로제네카, 노바벡스, 스푸트니크V 백신 등이 이미 위탁생산 중인 한국에 모더나가 뒤늦게 조인한 것이 진실이다. 어차피 생산시설이 부족한 모더나가 바이오 생산능력이 뛰어나고 경쟁제품이 위탁생산 중인 한국에 들어와 자사의 백신을 위탁생산하는 것은 사실 정해진 수순이 아닐 수 없다. 모더나는 앞으로 한국뿐 아니라 다른 제조 강국에도 위탁생산체제로 진출할 것이다. 이런 비즈니스적 필연을 단지 정상회담을 계기로 공표해놓고, 그것이 마치 정상회담의 성과이고 한국을 백신 제조의 글로벌 허브로 탄생시킨 것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기업의 노력에 숟가락을 얹어놓고 그게 자기 공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청와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냥 삼성바이오 등 한국의 바이오 기업의 발전상을 축하하며 격려해주는 게 국가지도자의 도리가 아닌가.
사실 대미반도체 투자 이슈를 문재인 정부가 가로채지 말고, 그냥 삼성전자에 맡겨 협상케 했으면 코로나 백신 2천만 개는 확보했을 거라 본다. 청와대가 반도체 이슈를 정상회의 의제로 가로챈 후 백신은 5십5만 개로 줄어들어 버렸고,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게는 후속적 부담만 가중시켰다. 44조 원의 대미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미 정부 측이 제공하는 투자 인센티브에 대한 후속 협상이 필요하다. 각종 세금혜택과 R&D 지원 액수의 규모가 관건이다. 그런데 정상회담 차원에서 44조 원 규모로 투자를 못박아 버렸으니, 후속적으로 있을 인센티브 관련 협상에서 우리 기업들에 불리하게 되어 버렸다. 정부가 기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협상에 불리하게나 하고, 기업의 공이나 가로채면서도 자화자찬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 측이 미군과 협력하고 있는 ‘한국군’에 한정해서 백신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배경을 음미해야 한다. 향후 대미 협력에서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회복해 추가 백신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오락가락 외교가 초래하는 급행 비용이 막대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향후 중국과 북한 측에서 청구할 외교적 비용에도 미리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재편된 외교동맹 기조를 얼마나 일관성 있고 신뢰성 있게 유지·관리하여 우호(Friendship), 선린(Good Neighbors), 실용(Reality) 외교의 과실을 장기적으로 확보해나가느냐가 관건이다.
<wmchoi@ewha.ac.kr>
글 | 최원목
외교통상부에서 외교 및 국제법 전문가로 근무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교수(조지타운대 통상법 박사)로 재직 중이다. Korea Journal of International and Comparative Law 편집장, 한국국제경제법학회장, Journal of International Economic Law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