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방지법을 통해 살펴본 성별 갈등과 성경적 해결
2021-07-14
월드뷰 JUL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2 |
글/ 연취현(변호사)
여성폭력 방지 기본법과 젠더기반폭력사회
1993년 “여성폭력철폐선언”은 여성폭력이 ‘젠더에 기반한’ 폭력임을 선언하고, ‘여성폭력’을 “공적 또는 사적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성에게 신체적, 성적 또는 심리적 해악이나 고통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행위,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협박, 강압 및 자유의 박탈”로 정의했다.1) 이 선언은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녀 간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서 발생해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고착시키고 여성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차별 철폐협약에서 말하는 여성차별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정부도 데이트폭력, 스토킹, 온라인 성범죄 등 주로 여성들을 겨냥한 젠더 폭력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며, 2017년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서 불평등한 성별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성적·정서적 폭력을 ‘젠더 폭력’으로 규정하고 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등을 제시했고2) 그 결과물로 정춘숙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2019년 12월 2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의 제정 소식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아한 생각을 가졌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2011년부터 제정되어 운용되고 있는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있다. 이 두 법은 모두 여가부의 소관 법률이고, 이미 10년이나 운용되어 오면서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절차가 점점 더 촘촘하게 구성되었다. 이 법에는 피해자 보호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피해자 등에 대한 불이익 조치 금지가 규정되어 있고, 이에 위반하는 경우에 대한 벌칙까지 정해져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상담소 설치와 운용에 관한 규정이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있으므로 성폭력 범죄에 대한 특별히 강화된 처벌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여성폭력방지 기본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법은 제정 즉시부터 여성단체와 남성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여성단체는 법사위에서 이 법안을 수정하면서 내용이 유명무실해졌다고 비판했고, 남성단체들은 여성폭력에 국가가 개입하는 행위이며 여성 진술을 절대 성역화하는 역차별적이며 위헌적인 법률이라고 주장했다. 남성 중심의 반발은 청와대에 청원으로 이어졌으나 5만 6천여 명의 참여로 마무리되었다. 성폭력방지법이나 성폭력처벌법과 달리 이 여성폭력방지법이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앞서 말한 “젠더 기반 폭력”에 있다.
우리 사회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이 만연한 사회이므로, 젠더 기반 폭력사회체계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여성폭력의 문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젠더 기반 폭력사회체계의 변화가 바로 이 법의 본질적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반대로 폭력의 피해자, 즉 누구에게 피해가 발생했는가, 누구를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문제로 정리했다.3) 즉, 이 법은 피해자 보호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이 주된 목적이므로 여가부 산하 여성폭력방지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원회를 지자체에도 두게하며, 여성폭력통계를 만들고,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4) 이 법에서 남성은 오직 여성폭력피해자의 가족이거나 아니면, 잠재적 가해자이다. 남성들이 나서서 반발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림책 다시 보기
최근 여성계에서 일어나는 그림책 다시 보기에 관한 기사5)를 보면 젠더 기반 폭력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기사는 어린 아기곰이 아침에 일어나 아빠에게 신문을 가져다 드리고, 이불을 정리하는 엄마를 도와 베개 정리를 하는 대목을 지적하며, ‘엄마와 아빠의 아침 풍경은 언제까지 이렇게 달라야 할까.’라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3세 미만 영유아들이 주로 보는 ‘곰곰이 생활동화(더큰)’ 전집 중 ‘도와드릴게요’ 책의 한 장면, 아침에 일어나 아빠에겐 신문을 갖다 주고, 엄마에겐 베개 정리를 도와주는 것이 곰곰이가 부모에게 주는 도움이다. 엄마와 아빠의 아침 풍경은 언제까지 이렇게 달라야 할까?
그러나 기자에게 묻고 싶다. 아빠와 엄마가 아침에 어떤 역할을 정하는가는 각 가정의 문제가 아닌지? 아빠는 오전에 종이신문 보기를 좋아할 수도 있고, 엄마는 오후에 온라인신문을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엄마가 이미 이불을 개고 있었고, 곰곰이는 그 일을 하는 엄마를 도왔던 것인데, 굳이 엄마를 살림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아침에 종이신문을 읽지 않는 엄마에게 신문을 가져다주고, 아빠가 이불 정리를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걸 보고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엄마로서 필자의 대답은 이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도와주는 것이 착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도와준다는 것은 상대방이 도움받기 원하는 부분을 도와주는 거예요. 엄마가 신문을 읽고 싶어 하면 엄마에게 신문을 가져다주고, 아빠가 이불 정리를 하며 도와주기를 바라는 경우 아빠를 도와주면 돼요.”
반드시 세상 모든 일을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같은 분량만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현실을 3세 아이가 보는 장당 2줄의 이야기책에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면 이 이야기책은 ‘다른 사람을 돕는 마음’을 알려주는 책에서 ‘가족마다 다를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알려주는 책으로 주제 자체가 변하고 말 것이다. 같은 시각으로 흥부놀부전을 바라보자면, 자녀들이 굶주리고 있는 가운데 아빠인 흥부만 형님댁에 가면 안 되고, 엄마도 본인의 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러 가는 대목이 나와야 양성 평등한 전래동화가 될 것 아닌가? 그럼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어야 하는가? 본질을 잃어버린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젠더 기반 폭력사회라는 시각의 무차별적 적용의 문제점
가부장주의가 강한 우리나라 문화가 일부 여성들이 더욱 차별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무조건 부정하고 성별에 기초한 차별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젠더 기반 폭력의 시각을 잣대로 하여 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적으로, 광범위하게 휘둘러서는 성별 간 갈등만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불 보듯 뻔한 결말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에서 이웃집 남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한 여성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뉴스6)가 있었다. 피해자가 된 남성은 코골이 때문에 평소에 아내와 따로 잠을 자는데, 술에 취한 이웃 여성이 자신의 방에 들어와 성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아내로 착각하여 저항하지 않고 응했다. 뒤늦게 아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내를 불렀고, 아내가 경찰을 불렀다가 입건된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또, 이런 뉴스도 있었다. 덴마크의 여성 기자가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며 클럽에서 겪은 일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용에 신음소리가 녹음되었고, 이것이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방송되었다. 해당 기자는 “(이번 취재가)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며 “어떤 남성이 라디오에서 성관계를 가졌다면 나라 전체가 그를 비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7)
그렇다. 여성 기자가 말한 것처럼 만일 남성 기자가 성관계를 이용해 인터뷰했다면, 이것은 심각한 젠더 폭력으로 다루어졌을 것이고, 자신의 직업을 위해 여성을 이용하는 남성의 권력욕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을 것이다. 해당 여성 기자도 이것을 알면서 그것을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남성이 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만한 중범죄이자 비난 가능성이 큰 행위가 여성이 하게 되면 당당한 일이 되는 이런 현상에 남성들이 반발하는 것을 단순히 백래시(사회변화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대중적 반발)라고 치부할 일인가?
그래도 여전히 “서로 사랑하라”
어떤 안경을 끼고 사회를 바라보는가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까지 검은색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 문제라고 해서 흰색의 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답인가? 아니다! 안경을 벗고 현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을 분별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이미 검은색 안경을 오래 끼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쩌면 눈의 기능까지도 안경에 맞추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왜곡된 눈을 비난할 것인가? 왜곡된 눈의 기능을 바로잡을 시간을 주어야 하고, 안경을 벗고 가는 길에서 홀로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함께 사는 사회의 기본일 것이다.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각 개인의 기억은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보는 시각이 더더욱 다를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같다고 주장하면, 배려란 존재할 수 없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7).
성경은 아내들에게만 여성들에게만 의무를 부과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남자에게 여자를 보호하고 사랑할 의무,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그 자신을 주시기까지 하셨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무거운 명령을 주셨다. 일부 남성이 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이 있다. 그러나!!! 여성이 정죄와 판단을 통해 직접 이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8).” 이때 ‘돕는 배필’의 역할은 어떤 일방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며 삼위의 하나님이 서로를 도우시는 것처럼 각자 자신의 필요한 위치에서 서로를 돕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남성과 싸우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각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손수 지으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ychuih@hanmail.net>
글 | 연취현
200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현재 수원에서 연취현 법률사무소를운영 중이다. 7년 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법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기를 서원하고, 현재는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고 태아보호 대안입법을 촉구하는 ‘행동하는 프로라이프’의 사무총장, 복음적 가치구현과 종교자유를 추구하는 법률가단체인 ‘복음법률가회’ 운영위원, 남성과 여성 간 분열을 초래하는 여성주의를 반대하고 건강한 가정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여성의 역할과 책임을 고민하는 ‘바른인권여성연합’의 전문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