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남긴 의미
2021-06-11
월드뷰 JUNE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
글/ 이호선(국민대 법대 교수, 변호사)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적들이 몰려온다. 정신없이 쏘아대다 보면 총열이 잔뜩 달아오른 기관총에서는 총알이 툭툭 맥없이 앞에 떨어진다. 기관총 사수는 급히 총을 눈 속에 비비고 그 위에 오줌을 누어 총열을 식힌다. 그사이 다른 병사들은 철모를 벗어 대여섯 개 늘어놓고 소총으로 그 위를 좌우로 긁어 댄다. 타다닥타다닥하는 소리를 기관총 소리로 들은 적들은 쉽게 올라오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얼마간의 시간은 번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적은 올라오고 마지막은 백병전이다. 진지 안으로 들어온 적들과 한데 엉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적인지, 아군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다음 생존은 누가 더 빠른가 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잡히면 놔주고, 머리카락이 잡히지 않으면 찌른다. 이런 생지옥의 혈투를 치른 끝에 새벽 무렵 적이 물러가면 산 아래 강으로 내려가 얼음 깨진 곳에 머리를 처박고 정신없이 물을 들이켠다. 그렇게 실컷 물을 마시고 고개를 들어보면 그제야 사방에 널려진 중공군 시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학도병으로 입대해 한국전쟁을 치른 선친의 경험담이다. 동기 일곱 명이 같이 입대했는데, 휴전 후 살아서 돌아온 분은 선친을 포함하여 두 명이었다고 한다. 그 참혹한 전쟁터에서 부상 한군데 없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나마 상대적으로 행운이 따랐다고나 할까. 남은 자의 트라우마가 녹아 있는 회고를 떠올리며 그 경험의 상속자로서 6·25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와 과제를 생각해 본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치밀하고도 교활하게 준비된 그 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에 그야말로 도적같이 임한 바 되었고, 대한민국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무교병을 급히 먹을 정도(출애굽기 12:11)의 여유도 갖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 광기 어린 전쟁의 잔인함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바로의 압제 아래 노예로 억눌려 살면서 그 정신과 문화까지 굴종에 찌들어 있다가 출애굽을 통해 완전한 한 국가 공동체로 태어났던 경험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일제 치하,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조선 말기를 통해 속속들이 배인 무능하고 부패한 민족성으로부터의 탈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썼던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말처럼 ‘전쟁은 그것이 가장 공평한 형태라도 늘 인간성과 정의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전쟁은 서사를 통해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정체성은 기억 속에 있다. 그것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마찬가지이다. 치매가 모든 질병 중에서도 비인간적인 것은 기억 상실을 통해 궁극적으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한 국가 공동체의 기억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정치적 선조와 그에 따른 회상의 공유에 있다. 동일한 한 사건으로부터 얻어진 집단적 자부심과 굴욕, 기쁨과 후회, 좌절과 희망, 분투와 극복에 대한 기억이 있을 때 개인으로서의 적절한 자존심도 갖춰지고, 집단으로서의 정치적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도 더욱 강력해진다.
필자의 선친이 내게 들려주셨던 전쟁 경험담은 그저 한 개인, 한 집안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6·25의 숱한 비극과 상처의 한 단편적 사례이기도 하지만,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겪었던 모두의 이야기 중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서사는 6·25 이후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확인하는 뿌리가 되었고 이제는 고인이 되신 선친의 경험담을 내 자식들에게 전해 주는 과정에서 세대를 이어가는 공동체 자아의 토대가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에서는 희극보다 비극에서 주인공의 성격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비극적 이야기지만 이를 통해 기억을 공유하고, 세대 간 의미의 전승이 이뤄지는 것은 전쟁의 역설이다.
6·25 전쟁이 대한민국에 준 또 하나의 큰 의미는 대한민국의 건국 가치가 집약된 헌법이 피 흘림을 통해 지켜짐으로써 하나의 문서에서 모두의 약속으로 육화(肉化)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1948년 5월 10일 국민 투표로 제헌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에서 만든 제헌 헌법이기에 합법성이나 정통성은 완전한 것이었으나, 그 헌법적 가치와 의미가 일반 대중의 사고와 가치 속에 스며들어 각자의 정치적 DNA가 되기까지는 아직 일렀고, 헌법은 그저 정치가들과 일부 엘리트들의 관념적 사고의 산물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헌법이 모두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의 입으로 시인되고 고백 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을 받아 왔으나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다시 한번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응답하여’ ‘준행’할 것을 약속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출애굽기 24:3).
약속은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여 자신의 의사와 자신의 말로 이를 확인할 때 참된 효력이 있다. 일방적 선포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응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가 다시 한번 언약에 대한 보증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출애굽기 8:33~35).
6·25전쟁은 우리 모든 국민이 헌법을 피로 추인하도록 했다. 열아홉 살에 참전해 기관총 사수로 소양강 일대의 고지전에서 살아남은 내 선친이 백병전에서 그 전투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쟁에 숨어 있는 거대한 섭리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고 해도 당신과 당신의 전우들은 피로써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켰고, 헌법을 보증함으로 협약의 실질적 당사자가 되었다. 마치 여호수아가 들려주는 모세의 율법 책의 기록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그저 그리심산과 에발산 앞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아이들처럼. 그 의미는 서서히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궤적을 따라 또렷해질 것이었고, 숨겨진 경륜은 과거가 아닌 늘 현재에서 새롭게 다가올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그들이 흘린 모든 피는 이제 대한민국 헌법의 잉크가 된 것이다.
한편 이를 통해 신생 대한민국도 진정한 시민국가가 될 수 있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정치론>에서 “인간들은 시민들이 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한다.”라고 했다.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을 시민으로 만들었다. 선친과 같은 이는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함을 느꼈으며,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이런 자각과 경험이 시민들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은 전후 이런 시민들로 재구성되었다. 겉은 그대로, 아니 철저하게 부서지고 황폐하게 되었고 생존의 조건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해 졌으나, 그 속사람은 강건해졌고 슬픔을 딛고 일어선 자의 강인한 다짐, 남은 자들의 빚진 마음으로 충일된 공동체의 토양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았던 당시의 현실에서 군대와 전쟁을 통해 많은 보통 청년들이 통솔, 보고, 복종, 결정, 분담, 약속, 책임, 협력과 같은 근대적 시민의 조건들을 조기 습득했고, 이것은 후일 산업화의 주체로서 인적 자원의 자양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스피노자의 당부처럼 조선왕조와 일제를 거치면서 무기력과 이기적 안일함에 사로잡혀 있던 국민의 노예적 근성을 깨뜨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6.25 전쟁은 우리에게 공동체 차원에서 용납해야 할 것과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해 주었다.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면서 전쟁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부패한 풍속을 교정 내지 일소”하거나 의인들에 대한 “환란을 통한 연단”에 있다고 묵상한다. 전쟁은 본의 아니게 정화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악을 제하라’라고 명하신다(신명기 21:21).
해방 공간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지식인 사회에서 압도적이었다. 혹자는 당시 지식인들 열 명 중 여덟 명은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좁은 문>의 작가로 잘 알려진 앙드레 지드(Andre Gide)가 1936년 6월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Maksim Gorky)의 장례식 때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했던 “우리들 정신 속에 문화의 흥망은 소련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소련을 옹호할 것이다.”라는 말은 일제하, 그리고 해방 정국을 거치면서 조선,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사고 체계가 얼마나 유물론적 공산주의의 미몽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처지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앙드레 지드는 고리키의 장례식 후 몇 개월간 공산 소비에트 사회를 관찰하면서 공산주의의 위선과 무능, 부패, 특권계급의 수탈적 성격을 꿰뚫어 보고 귀국해 <소련기행>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가 서구 좌파 언론과 지식인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라는 악을 제하기는커녕 거기에서 돌아서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는 2차 대전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런 이념적 혼돈의 시기에 6·25전쟁은 최단기간 내에 전 국민에게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의 허구성과 위선, 비인도적 기만성을 폭로하고 학습시켰다. ‘제하여야 할 악’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모든 국민에게 각인되었고,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더욱 확고해진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6·25전쟁 덕분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악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간략히 아래의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악이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북한의 오늘과 비교해 우리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1936년 한국전쟁의 배후인 스탈린(Joseph Stalin) 통치하의 소비에트를 둘러 본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 정권하의 무기력한 민중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민중에서 인상 깊이 느끼는 것은 그들의 터무니없이 멍청한 태도이다. 게으르다고 하면 좀 지나친 표현일 테지만… 그러나 소위 ‘스타하노프운동(생산 증가를 위한 경쟁 운동)’은 그들의 무관심한 기질을 뒤흔들어 놓기 위하여 신통하게 착안된 것이라고 하겠다… 스타하노프 한 명을 소개받았다. 사람들 말로는 그가 일주일 치 일을 단 5시간에 해치웠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낌 없이 그럼 결국 5시간 걸릴 일을 일주일이나 걸려서 하고 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해 보았다. 그들은 내 말에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았다(지드: 376면).
한편 1894년 경기도 여주 일대를 돌아보았던 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묘사한 조선 민중은 지드가 보았던 모스크바 민중의 모습과 판박이다.
관아는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들보와 서까래는 떨어졌으며, 색은 벗겨지고, 창호지는 격자창에서 떨어져 나와 너덜거렸으며, 회반죽은 우중충한 벽에서 일어서고, 한때 멋있었던 망루는 마지막 남은 다리 위에 얹혀 있었다… 가난, 나태, 우울함 등이 모든 곳에 널려 있다. 관아 안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포졸들, 문필가들, 부정한 관리들, 늘 일이 손에 달린 척 가장하는 전령들이 있었고, 많은 작은 방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모여 앉아 서예 도구를 옆에 놓고 긴 장죽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비숍: 109~110면).
우리가 6.25를 통해 물리친 악은 어떤 것이었는가. 구소련과 조선 말기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인간의 영혼을 저 바탕에까지 무기력하게 타락시키는 정치적 압제와 수탈이라는 악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공산주의와 인간다운 삶은 공존할 수 없다는 국가적 공감대를 갖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고, 이는 6·25 이후 71년이 지난 지금도 반면교사로서 북한의 실태가 여전히 우리에게 자백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스라엘은 무교병과 어린 양으로 상징되는 유월절 기념을 통해 출애굽을 잊지 않았으며, 가나안 입성 과정에서는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건넌 이적을 기념하기 위해 요단강 속의 돌 열두 개를 취하여 길갈에 세웠다. 회상의 공동체, 언약의 공동체, 시민적 공동체, 가치의 공동체를 잊어서는 젖과 꿀의 미래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 되는 해이다. 할아버지의 처절한 전쟁 경험을 아비로부터 전해 들으며 입대한 아들이 공군 장교로 제대한 지도 일 년이 지났다. 또 한 세대가 지나면 이장일(李張一) 이등 중사의 참전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그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그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도 전달되리라. 전쟁은 상처만 남기지 않았다.
<hosunlee@kookmin.ac.kr>
참고문헌
<소련기행(앙드레 지드, 김붕구 역, 1969년, 휘문출판사)>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역, 1994년, 살림출판사)>
글 | 이호선
국민대학교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 연수원 수료 후, 영국 리즈대학교(University of Leads)에서 ‘EU 및 국제비지니스법’을 공부하였다. 2005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총무처장과 기획처장, 성곡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경실련 법제위원, 대한변협 기획의원, 사단법인 전국법과대학 교수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모임(정교모)’의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 밀로반 질라스의 <위선자들>을 비롯하여 <완역 유럽연합창설조약>,<기적의 자신감 수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