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2021-02-12
월드뷰 FEBRUARY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0 |
글/ 이호선(국민대 법대 교수, 변호사)
성경이 말하는 상속이란?
독립된 두 인격 중의 하나가 소멸되는 순간, 그 인격의 권리와 의무가 상속인에게 이어진다는 점에서, 상속이란 단순히 자연인의 사망을 통한 산 자의 유산 획득(불운한 사람은 획득할 유산은 고사하고 채무를 안을 수도 있지만)에 그치지 않고, 상속을 통해 유한한 삶을 다음 세대로 연장한다는 의미도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 상속은 구속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히브리서 11장 7절은 노아를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성경에서 상속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 구원, 심판과 새로운 나라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보는 피상속인과 상속인의 기록이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아비의 죽음을 전제로 상속분을 먼저 챙긴 철딱서니 없는 불효자를 소재로 한다. 영적 세계에서의 상속 대상은 의(義)이지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면 그 대상은 ‘먹고 사는데 소용이 되는 기반’이다. 잠언 19장 14절은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라고 하신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예비해 두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하와를 아내로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묘하게 이 짧은 잠언의 말씀 속에 살짝 겹친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창 3:19), 그 삶의 기반이 되는 ‘집과 재물은 이제 너희 조상으로부터 받는 것이지만’ 배우자의 지정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이 지혜서 속에서 상속 안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위임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상속은 세대 간의 연결 고리일 뿐 아니라,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연결 고리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시・공간적 차원에서의 민족 정체성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지파별, 가문별로 분배했던 각자의 기업(基業)과 따로 생각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 각자의 소속감은 자기 지파의 땅, 자기 소유의 토지를 통해 늘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지속성의 바탕에 상속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 상속에는 레위기 25장의 토지 무르기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통해 지파별, 가문별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교정 시스템이 부가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민수기의 마지막인 제36장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 것 같은 슬로브핫이라는 사람과 그의 다섯 딸의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어떻게 하면 각 지파가 분배받은 고유의 기업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쪼개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을까를 둘러싼 아주 구체적인 고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에도 상속을 부인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의 고유한 기업이 피상속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음 세대에 이어지지 못하고 흩어지도록 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상속 방해는 영적 의미에서도 심각한 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에는 포도원 주인이 세를 준 농부들에게 자기 아들을 보냈는데, 그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 왔던 주인의 종을 구타하고, 죽였던 전력이 있던 이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이렇게 말한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마 21:38).” 얼마나 못된 자들인가. 피상속인과 상속인 사이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사유재산제에 대한 중대한 침해는 물론이고 영적 질서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정부・여당이 상속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부추기고, 여당 의원 중에서는 상속의 한도를 4억 원으로 해야 한다는 사람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지금까지 국정 운영을 해오면서 보여준 이들의 행태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처럼 남의 상속자를 죽이고 그 유산을 가로채자는 심보의 발로,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악한 무리의 선동과는 별개로 왜 이런 문제가 나오고 있는지, 이 문제에 대한 자유 시민으로서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문제는 부의 세습이 아니라 불평등의 세습이다.
상속이 불평등을 심화시켜 결국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염려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있었다. 그래서 고대의 리쿠르고스(Lycurgus of Sparta)나 로물루스(Romulus)와 같은 몇몇 입법자들은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예컨대 한 사람이 두 번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상속으로 인해 불평등이 초래되는 것을 가능한 막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한 바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의 불평등에 주목한 것은 성경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열두 부족이 각자의 기업을 유지하고, 각 부족 내에서 각 가문이, 각 가문 내에서 각 가정이 자기 삶의 터를 온전히 고수할 수 있을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분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정체성과도 연관되었다. 그러므로 지파별로 할당받은 고유의 기업을 어떻게 하면 고스란히 계속 유지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구체적 사례가 민수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의 극심한 혼란과 갈등, 혁명과 피를 가져온 것은 극단적 불평등이었다. 성경의 토지 무르기와 희년 제도는 이런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이런 위기를 겪지 않도록 하는 예방 접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예방 접종을 통해 막으려 했던 것은 ‘불평등의 세습’이지, ‘부의 세습’이 아니었다. <상식>이라는 책자로 미국 독립 혁명기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극도의 빈부가 교차하는 굴곡진 얼굴을 가진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되고, 반동의 법칙에 따라 정의를 요구하게 된다. 각국의 가난한 대중들 중 대부분은 가난을 대물림하게 되고 다음 세대에서 스스로 그 상태에서 헤어나오기란 불가능하다.”
국가는 사적 소유권에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
한편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공로가 없는 자본 수입’은 이를 통해 부를 향유하면서 정치적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한 자본주의적 미덕을 실천해 사회 전체에 기여함으로써 받게 되는 부를 상대적으로 감쇄시켜 위험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공로가 없는 자본 수입’의 대표적인 사례는 상속이다. 이런 불로소득은 이것은 점차로 사회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조건을 향상하도록 하는 희망을 잃게 하고, 사회에 대한 냉소와 분노를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산은 시장 경제의 장점인 자발적 유인 동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시민의 폭민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상속을 금지 또는 제한하는 입장이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무제한의 상속을 주장하는 쪽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불평등의 세습’, 보다 정확하게 애덤 스미스식 표현에 따르자면 ‘그 누구도 가죽 장화를 못 신어서 대중 앞에 부끄러워서 나설 수 없는 상태’의 세습을 막는데 어떤 접근이 더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경험은 인류는 각자의 기업을 가지고, 각자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따라 거래하고, 재산을 축적하도록 할 때 가죽 장화를 신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원리>에서 1787~89년 사이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소규모이지만 소유권을 가진 자영농들이 일궈내는 성과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던 영국 농업경제학자인 아더 영(Arthur Young)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소브(Sauve)를 떠나면서 나는 매우 넓은 땅에 커다란 바위밖에 없는 곳인데, 대부분이 울타리로 구획되어 있고 가장 근면한 정성으로 작물이 심겨 있는 광경을 보고 놀랐다.……뒹케르크 부근에서는 모래 언덕을 농지로 개량한 것을 보았다.…… 소유권이라는 마술이 모래를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는 것은 상식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소유권의 향유가 그 원인임이 틀림없다. 황량한 바위 한 개라도 소유권을 농부에게 줘 보라. 그러면 그는 그것으로 정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정원을 9년 동안만 경작할 수 있는 소작권을 줘 보라. 그러면 사막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것이 각자의 기업을 가진 사람들, 자유인에게서 나오는 힘이다. 불평등의 세습을 심각하게 우려했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은 신대륙의 성인 남녀에게 자연적 상속(natural inheritance)의 개념을 도입하여 21세가 되면 15파운드씩 생애 기반자산을 줄 것을 제안했다. ‘소유권이 가죽 구두를 신을 수 있게 만드는 마술’임을 알았다.
성경은 각자가 자신의 기업에 든든히 서 있을 때 그 자체가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곳간은 개인의 곳간, 민간의 곳간이며, 자율의 영역이다. 국가는 개인의 곳간이 넉넉해지도록 해야 하고, 이것은 사적 소유에 대한 개입 자제에서부터 가능해진다. ‘국가의 곳간’은 인심의 발원지가 아니라, 음험한 기망과 지배의 장소로 전락하기 쉽다. 파라오의 곳간이 열렸을 때 이집트 백성들은 결국 토지를 국가에 바치고 그의 노예가 되었으며, ‘집단소유’ 내지 ‘공동소유’를 선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만의 곳간을 만들어 민중을 기망하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수탈을 즐기고 있음을 역사는 간증하고 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타락한 인간에 의해 운영되는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 없기에 상속에 대한 적정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소유권의 본질을 훼손하고, 기업의 토대를 망가뜨리는 데까지 이르는 상속에 대한 부정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hosunlee@kookmin.ac.kr>
글 | 이호선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수료 후, 영국 리즈 대학교(University of Leeds)에서 ‘EU 및 국제비지니스법’을 공부했다. 2005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성곡도서관장이다. 경실련 법제위원, 대한변협 기획위원, 사단법인 전국법과대학 교수회 회장을 지냈으며,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모임(정교모)’의 공동대표로 있다. 저서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정의>, <질문이 답이다>등이 있으며, 역서로 최근 출간한 밀로반 질라스의 <위선자들>을 비롯하여 <완역 유럽연합창설조약>, <기적의 자신감 수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