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에너지 원자력
2021-03-15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3 |
글/ 정범진(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원자력의 시작
일제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기간시설은 초토화되었다. 폐허 위에서 일어서기 위한 국가재건의 원동력은 에너지였다. 이 가운데서도 산업화를 위해서는 전기에너지의 확보가 급선무였다. 전력은 발전, 송전, 배전 등의 하부구조가 구축되면 매우 편리한 에너지이지만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그때, 미국 에디슨사의 회장을 지낸 시슬러(Walker Lee Cisler) 박사가 한국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이며, 한국 같은 자원 빈국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었다. “그거 지금 시작하면 몇 년 뒤에 써먹을 수 있는 거요?” 시슬러 박사는 “한 20년쯤 걸린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원자력의 시작이었다. 81세의 노(老) 대통령은 20년 후에나 써먹게 될 기술에 실로 엄청난 투자를 실행에 옮겼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1962년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했다. 또 150여 명의 학생을 선진국으로 유학 보내고, 인하대학교에 최초로 원자력 전공도 개설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남짓하던 시절에 1인당 6000달러의 거금을 들여 국비 유학을 보내고, 35만 달러를 쏟아부어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한 것이다. 1959년 7월 연구용 원자로 설치공사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했다.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은 상업용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행하는 데 필요했던 막대한 전력을 싼값에 공급하지 않는다면 경제개발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적합한 원자로형을 찾기 위한 전문가 위원회를 설치하고 1년여의 기간 동안 검토한 후 가압경수로형을 건설하기로 했다. 가압경수로형은 차관을 도입해 건설하기에는 너무 비싼 원자로였다. 영국은 가스냉각로를 덤핑으로 주겠다고 했고, 비등형 경수로라는 보다 싼 대안도 있었다. 그러나 가압경수로가 채택되었다. 국토가 좁은 나라에서는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렇게 웨스팅하우스로부터 들여온 고리원전 1호기가 1978년 상업용 발전을 시작했다.
자국의 방위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닉슨독트린은 당시 남한보다 경제력이 좋았던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겐 청천벽력과 같았다. 재래식 무기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가난한 나라의 선택은 핵무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플루토늄 생산에 유리한 중수로형 원자로가 필요했다. 그것이 월성1호기의 건설로 이어졌다.
원전기술의 국산화
남의 기술로 전부 건설하고 열쇠만 넘겨받는 이른바, 턴-키(Turn-key) 방식의 원전 건설과정에서 기술이 없는 나라로서의 겪어야 했던 수모 그리고 별것 아닌 기술을 배우기 위해 치러야만 했던 엄청난 비용은 당연히 기술개발로 이어졌다. 국산화와 수출은 지금까지도 원자력계의 변치 않는 대명제다.
종합과학의 산물인 원자력발전소의 국산화는 전력생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계, 화공, 전기, 토목 등 거의 모든 부문의 기술력을 동반성장 시켰다.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가는 원자로, 증기발생기, 터빈과 같은 주기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한국중공업을 설립하고 막대한 투자를 했다. 기술적으로 성숙한 한국중공업은 두산중공업으로 민영화 되었고 이제 세계적인 업체가 되어 미국과 캐나다가 중국에 수출한 원자로의 주기기를 공급하고, 심지어 미국 현지에서 건설 중인 보틀(Vogtle) 원전과 섬머(Summer) 원전의 주기기를 공급하게 되었다. 품질보증이라는 단어조차도 몰랐던 한국의 건설회사는 원전건설을 경험하며 세계의 건설을 담당하게 되었고, 원자력발전소의 품질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용접기술은 조선산업으로 이어졌다.
한국표준형 원전(지금의 OPR1000)을 개발해 12기를 건설하고 차세대 원자로(지금의 APR 1400)를 개발해 2009년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에 4기를 수출했다. 얼떨결에 정치적 결과로 수출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적기 건설이라는 실적을 보고 대한민국의 기술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아레바사는 핀란드 올킬루오토에 건설 중인 EPR 원전건설이 10년 지연되었고, 프랑스 전력공사에 합병되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자국 내에 건설 중인 보틀 원전을 5년 지연시켰고 미국 내에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런데 한전과 한수원은 적기 준공을 한 것이었다.
원자력발전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원자력발전소는 환영받는 시설이 아니다. 환경적 비관론이 확산되고 과학에 대한 무지가 대중적 인식이 되었다. 지구 대기의 조건이 점점 나빠지고, 생태계는 알 수 없는 환경호르몬에 노출되고, 미세플라스틱이 대양을 거쳐 다시 식탁으로 올라오고, 음식은 비료와 농약으로 범벅이 되어있다면 우리의 수명은 왜 늘어나는 것일까? 품종개량, 농약, 그리고 비료라는 과학적 혁신을 통해 단위면적당 100배의 소출을 거두게 된 것이 친환경이지, 어떻게 훨씬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하는 무농약 농산물이 친환경이란 말인가? 집약적 생산을 해야 더 많은 숲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역사에서 경험한 상식이 아닌가?
체르노빌사고의 사망자는 사고 2주 이내 28명 그리고 후유증 사망자 15명으로 43명이다. 미국 TMI-2(1979) 원전사고에서는 원자로의 절반이 녹았지만, 방사선 유출이 없었고 후쿠시마 원전사고(2011)에서도 방사선 사망자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UN 방사선 영향위원회(UNSCEAR)의 공식 보고서 보다 환경단체의 거짓 보고서가 더 많이 유포되었다. 게다가 가짜영화까지 만들어져서 대통령을 감격시켰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원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물리학자인 프랭크 반 히펠(Frank von Hippel)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로부터 1,000명이 치명적인 암에 걸릴 것으로 계산했다. 스탠포드 대학의 마크 제이콥슨(Mark Z. Jacobson)과 재생에너지 옹호자인 존 호에브(John Ten Hoeve)는 전 세계에서 130건의 치명적 암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나사(NASA)의 기후학자인 제임스 핸슨(James Hansen)은 상업 원자력발전소들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기 오염을 줄임으로써 지난 수십 년 동안 180만 명 이상의 목숨을 구했으며, 21세기 중반까지 42만 명에서 70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40년 동안 원전은 값싸고 안전하게 전력을 공급했다. 전력생산 단가는 천연가스발전의 절반, 태양광의 30% 수준으로 단 한 명의 방사선 사망자도 없었다. 그간 사용 후 핵연료는 1만 4천 톤이 발생했다. 같은 양의 전력을 석탄으로 공급했다고 치면 석탄회가 2억2천만 톤이 발생했을 것이다. 석탄은 12억 톤을 썼을 것이고 나머지 9억 8천만 톤은 대기로 방출되었을 것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있었으면 좋겠는가 혹은 없었으면 좋겠는가?”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없을 수 있으면 없는 편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를 써야 한다면 이 질문은 “원자력이 좋은가 석탄이 좋은가?” 또는 “원자력이 좋은가 태양광이 좋은가?”가 되어야 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당장의 달콤함보다 20년 후에나 빛을 볼 기술에 과감히 투자했고 열매를 맺었다. 그런데 그 과실을 맛보기도 전에 썩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는 무엇을 발명하고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예비하시고 숨겨놓으신 것을 찾아내는 사람일 뿐이고, 원자력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에너지라는 나의 말은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너무 늦기 전에 원자력의 필요를 깨닫기를 기도한다.
<bjchung@khu.ac.kr>
글 | 정범진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과학기술부에서 행정 경험을 쌓았다. 영국 Manchester 대학교에서 2년간 연구한 후 제주대 에너지공학과에서 11년간 재직했고, 한국연구재단의 원자력단장과 한국원자력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원자력안전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신고리5·6호기 공론화 등에서 강의하며 대중과의 소통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