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이프 운동과 국가 양심의 회복
2020-11-11
월드뷰 OCTO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
조평세 (트루스포럼 연구위원)
시커멓게 타버린 대한민국 양심
작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재판관 4인 불합치의견, 3인 위헌의견, 2인 합헌의견) 판결에 따라, ‘낙태죄 조항’(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은 올해 말까지 개정을 앞두고 있다. 정부와 거대 여당은 임신 14주까지의 낙태를 아무런 사유가 없이도 허용하고 24주까지는 성범죄로 인한 임신, 사회, 경제적 사유 등이 있을 때 허용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현재 대부분의 낙태가 12주 이내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개정안은 거의 모든 경우의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기준이 매우 모호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따라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낙태 전면 허용이나 다름없다.
매년 최소 15만에서 최대 110만 건으로 추산되어 세계 최고 수준의 낙태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은, 6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산아제한(혹은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묵인하고 사실상 권고해왔다. 한때는 국내 임신경험자의 무려 절반 가까이가 낙태를 경험했다고 답한 설문조사도 있다(!). 또한, 다른 나라와 달리, 특이하게도 한국은 기혼여성의 낙태가 미혼여성의 낙태보다 더 많다. 강간이나 태아의 기형, 산모의 건강위협 등을 이유로 낙태를 한 경우는 2% 미만이다. 대부분의 낙태 이유는 “경제환경”이다. 낙태를 실제 가족계획의 일환이나 “가계의 짐을 더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20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비과학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우생학이 그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낙태 전문기관인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의 창립자이자 현대 ‘산아제한’의 창시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는 인종차별적인 우생학을 근거로 중국과 일본에 산아제한 이론을 전파했다.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아 6, 70년대의 산아제한정책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낙태는, 주수와 관계없이, 분명한 살인이다. 그것도 자기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는 가장 연약하고 작은 자에 대한 살인이다. 태아의 발달과정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부정할 근거가 없다. 수정 후 3주면 이미 태아의 핏줄과 뇌 및 척추의 기초가 만들어지고, 빠르면 4주째부터 벌써 심장이 뛰며 눈과 귀 그리고 폐가 조직된다. 5, 6주에는 모든 팔다리와 손가락 발가락들이 형성되고 7주면 99%의 근육이 존재한다. 이때부터 뇌 활동도 시작된다. 8, 9주면 근육 활동이 시작되고 11주면 웃음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태아 발달과정의 설계도가 수정 후 1주 미만의 태아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물론 어느 과학자도 수정 후 태아발달의 40주기 중 어느 때까지는 생명이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 당연한 생물과학의 증거조차 무시하며 생활의 편의를 위해 우리의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다. 그렇게 무뎌진 양심은 국민의 도덕의식을 병들게 하고 결국 자유민주 대한민국마저 퇴보시켰다. 자유 민주정은 무엇보다 시민의 도덕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양심이 죽은 곳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반세기 미국 프로라이프 투쟁
개인의 양심을 일깨우고 시민의 도덕을 보전하는 책무는, 인간 상위의 높은 도덕적 창조주를 믿는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지워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회는 그 마땅한 본분과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미국의 경우, 전국 차원에서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대법원 판결 이후, 잠들어 있던 기독교인들이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4년부터 매년 1월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수도 워싱턴에서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Life)”을 열고 정치인들에게 낙태에 대한 경각심을 호소해왔다. 70년대 말 이 움직임은 “모럴 매저리티(Moral Majority, 도덕적 다수)”라는 조직으로 결성되어, 강력한 생명주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이들 ‘프로라이프(Pro-Life)’ 세력은 단일 이슈 유권자 조직으로서는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와 같은 총기 소유권 옹호세력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
2016년 모두를 놀라게 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당선도 사실 기독교 보수 대법관 임명을 위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결집이 컸다. 실제로 당시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대선 투표 동기 중 1위를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해 초 갑자기 사망한 보수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로 인해 대법원 공석이 생겼고,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TV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프로라이프이며, 대법관으로 프로라이프 판사를 임명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레이건 이후 두 명의 진보 대통령(클린턴, 오바마)을 거치며 심각하게 좌경화되는 대법원을 목격한 많은 기독교인은, 반신반의하며 트럼프를 선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공약대로 보수 법관인 닐 고르서치(Neil Gorsuch)를 임명했고, 이후 2018년 생겨난 공석에도 보수 법관인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를 민주당의 강한 반발을 뚫고 임명해냈다. 또한, 그 외 200명 이상의 보수 법관들을 연방법원에 임명시키고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생명 행진’ 현장에 직접 나와 연설하기도 하는 등,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강력한 ‘프로라이프 대통령’으로 입지를 굳혀왔다.
그리고 지난 9월 진보페미니즘의 아이콘이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의 죽음으로 생겨난 대법원 공석에, 트럼프 대통령은 또 한 명의 강력한 보수 법관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판사를 임명했다. 배럿 판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강력한 보수주의자일 뿐 아니라, 스스로 2명의 입양아와 1명의 다운증후군 장애아동을 포함한 7명의 엄마이다. 그동안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은 많았지만, 그들 모두 확실한 보수 대법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배럿 판사의 임명으로 사실상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 당시 이후 처음으로 미국 대법원에서 보수주의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거의 반세기 만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가능성이 열렸다. 물론 대법원 판결은 시작에 불과하다. 다시 각 주와 문화현장에서의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양심을 깨우고 사회여론을 조성해야 하는 미국 교회의 역할은 앞으로 “Post-Roe” 시대에 더욱 중요하다.
정죄를 위함이 아닌, 생명을 살리기 위함
한편 낙태 합법화나 다름없는 낙태죄 개정의 위기에 놓인 한국도 지난 반세기 미국의 교훈을 배우고 그 생명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혹자는 낙태가 이미 만연한 한국의 상황에서 낙태죄를 유지하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죄책감을 덜기 위해 죄목을 없애자는 것은, 태어날 아이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이를 없애자는 주장만큼이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낙태죄는 개인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필요하다면 낙태죄라고 부르는 대신 생명보호법, 생명 존중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사실 낙태를 고려하는 대부분 여성은, 타인의 비난 이상으로 이미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낙태를 이미 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죄는 당사자의 마음을 닫게 할 뿐 실제로 태아 생명을 살리는 데 도움이 못 된다. 당사자에게 그 순간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처의 치유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용기이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낙태죄의 올바른 개정안은 산모뿐 아니라 남성의 책임도 묻는 것이어야 한다. 산모가 원치 않는 아이도 낳아 맡길 수 있도록 입양규제도 완화되어야 한다. 생명 존중은 자궁 속의 생명뿐 아니라 자궁 밖의 생명에게도 마땅히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라이프 운동은 동시에 프로패밀리(Pro-Family) 운동이자 프로입양(Pro-Adoption) 운동이다.
이 지극히 성경적인 생명운동에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교회가 수많은 이슈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교회가 연합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 생명 존중에 대한 것일 것이다. 적어도 모태에서 사람을 빚으셨다는 성경의 증언과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도 레이건 이후 두 번의 강력한 진보 좌익 정권과 부시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을 겪으면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양극화되고 사분오열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분열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그래서 내년 1월에 ‘생명 행진’의 주제는 “Together Strong, Life Unites(함께하면 강하다, 생명은 연합하게 한다)”로 정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에이미 배럿 판사를 지명한 9월 26일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십 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워싱턴에 모여 ‘기도 행진(Prayer March)’을 했다. 링컨기념관에서 미 의회까지 이어진 무리의 행진에서 들려온 공통된 기도 제목은 다름 아닌 낙태에 대한 국가적 회개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백악관에서 배럿 판사 지명을 공식 발표했다.
교회가 연합해 앞장서 회개하며 한목소리를 낼 때, 여론이 조성되고 정치권이 반응한다. 생명을 위한 싸움은 결국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번 낙태죄 개정을 둘러싼 논쟁을 계기 삼아, 한국 교회도 다시 하나 되어 그동안 수많은 생명의 죽음을 외면한 것을 깊이 회개하고, 생명 존중 운동을 일으켜 국가의 양심을 회복시켜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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