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몰입의 시간
2020-08-22
월드뷰 AUGUST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
글/ 조혜경(소설가)
막내딸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 있는 아이에게서 느닷없이 휴대전화 문자가 왔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어? 지금 수업 중 선생님 질문. 빨리 답! 수행평가 ㅎ’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우선 떠오르는 대로 ‘너 낳았을 때’라고 문자를 넣었다.
“수행평가” “빨리”라는 단어에 숙제하듯 후다닥 딸에게 문자는 넣었지만, 정작 그 후부터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니 가장 행복했던, 혹은 가장 슬펐던,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나는 특정해 본 일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땅히 해야 할 숙제 같은 날들이 앞에 있었고, 숙제를 다 마치기에도 한 날은 늘 부족했다. 그러니 설혹 잠들기 전의 고요한 시간이 와도 오늘의 부족함과 반성, 내일의 계획과 기대에 생각이 그쳤지, 일 년을 혹은 십 년을 거슬러 그 중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을까, 반추할 여유가 없었다.
딸의 선생님 덕에 나는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볼 기회를 얻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일까. 생각을 시작하자 비 오는 날 부침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의식의 수면 깊이 가라앉아 있는 오래된 기억의 상자를 끄집어 올리는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 기억의 상자는 상당히 오랫동안 깊이 묻혀 있었다.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 낡고 허름한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일렁였다. 오랜만에 다락방에 올라가 한 겹 미농지를 덮어놓은 듯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한때 그리도 좋아했던 책더미를 구석에서 발견하고, 무슨 책이지 하고 제목을 보려고 손등으로 먼지를 쓸어낼 때의 그 미안함과 아릿함 같은 것이었다. 상자를 열자 주마등처럼 몇 장면이 떠올랐다.
나의 유년의 놀이터였던 외가댁은 명문 중고교가 있던 중소도시에 있었다. 외가댁은 시골에서 공부를 잘해 그 명문 중고등학교에 합격한 할머니의 조카들이 머물던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남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외할머니는 당연히 조카도 많았고(한 집에 자녀 서넛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당시 가족계획 구호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모두 공부도 잘해서 할머니 댁에는 내가 삼촌, 이모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조카들로 늘 북적였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체구와 성품이 모두 단아한 분이셨는데, 품은 넉넉하셨다. 주로 할아버지 처가 쪽의 조카들이 할아버지 댁에 기거했을 뿐 아니라, 처가 쪽 동네 먼 친척의 여식 한 둘이 늘 함께 살았다. 내가 언니라고 불렀던 그분들은 할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주다가 때가 되면 시집을 갔는데, 그때마다 목화솜 비단이불이며 솥단지 같은 살림살이를 준비하시느라 할머니가 바쁘셨다.
외가댁의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여름밤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으면 삼촌 중 한 사람이 얼음집에 가서 다듬잇돌 크기의 얼음 한 덩이를 사 오고, 나는 이불 홑청을 꿰맬 때 쓰는 긴바늘과 망치를 들고 커다란 양푼에 얼음이 놓이기를 기다렸다. 크고 단단한 얼음이 가는 바늘에 의해 금이 가면서 깨지는 것은 언제나 신기했고, 그래서 얼음을 깨는 일은 제일 어린 내 차지였다. 이모들은 반으로 자른 수박을 다리 사이에 끼고 수저로 긁어낸 수박을 양푼에 부으면 할머니는 설설 설탕을 뿌렸다. 엄청난 양의 수박 화채는 식구대로 한 대접씩 먹으면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나고, 입에서 수박의 단맛이 사라질 즈음엔 찐 옥수수가 한 소쿠리 나왔다. 모두 옥수수를 손에 들고 하모니카 불 듯 뜯어먹을 때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나는 후다닥 할머니의 무릎으로 파고들어 할머니의 적삼 속으로 손을 넣었다. 밤늦게 재를 넘다 만난 도깨비 이야기, 밭일이 늦어져 어스름녘 허겁지겁 내려오다 맞닥뜨린 소복 입은 여자 이야기, 주로 할아버지가 직접 만난 도깨비나 귀신 이야기였는데, 얼마나 실감이 났는지 정말 심장이 쫄깃쫄깃해져 할아버지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나는 몸을 공처럼 말고 있기 일쑤였다. 다음 날 도깨비를 만났던 그 자리에 가보니 빗자루 몽둥이가 한 자루 있더라는 허망한 끝맺음으로 할아버지는 혹여 손녀의 악몽으로까지 이어질 이야기의 끝을 훈훈하게 풀어주셨다.
할아버지 이야기의 백미는 “따콩따콩”으로 시작되는 6·25 이야기였다. 콩 볶듯이 ‘따콩총’을 쏴 대면서 마을로 진입한 인민군 눈을 피해 재봉틀의 머리를 떼어 앞마당을 파고 숨겨놓았다는 얘기나 부엌 바닥에 땅굴을 만들어 당시 여학생이었던 나의 엄마와 큰이모를 숨겨두었다가 거의 발각될 위기에 놓였던 이야기들은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때 큰 누님이 인민군에게 잡혔으면 우리 혜경이는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 했겄지요?”
삼촌 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그럼, 그때 우리 영순이 잘못됐으면 이 이쁜 강아지가 워떻게 이 시상에 나왔겄어?”
할머니는 부채질하던 손을 멈추고 내 머리를 힘주어 쓰다듬으며 새삼 그때가 생생한 듯 몸서리를 쳤다. 할아버지가 본가 형님댁으로 피난 가 대숲 굴속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게 결국 발각되는 데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고 더운 여름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때쯤 멀리서 “아이스께끼!”를 외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면 삼촌 중 한 사람이 나가 소년을 마당으로 불러들여 우리는 모두 얼음과자 한 개씩을 손에 들고 그 여름밤을 식혔다.
삼촌 이모도 많고, 아침마다 할머니가 싸 놓은 도시락 개수도 많고, 수박 화채와 아이스께끼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풍성했던 그 유년의 뜰이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까?
막내 이모는 내가 다닌 대학의 도서관 사서였다. 나는 이모의 뒷배로 대학 시절 내내 도서관 서가에 들어가 직접 책을 고르는 특권을 누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의 대학 생활은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지 않았고 그래서 늘 좀 우울했는데, 이모로 인한 도서관의 특권은 일정 부분 그 우울감을 상쇄시켜주었다. 어느 날 우연히 집어 들었던 윤흥길의 <장마>를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 졸이며 단숨에 읽어내렸던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6·25 이야기와 무관치 않았다.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도서관 서가에 들어가 느긋하게 책을 고르고, 농대 식물원에 들러 마거릿이나 소국을 큰 다발로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시험 끝난 기념으로 시내 음반사에서 LP판 한 장씩 사는 것으로 나의 정처 없는 우울을 달랬다. 빌려온 책을 쌓아 놓고 항아리 가득 꽃을 꽂아 책 옆에 두고 방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서 듣던 헨델의 라르고.
내 앞에 놓인 불확실한 미래를 조심스레 꿈꾸며 책과 꽃과 음악으로 작은 사치와 낭만을 누렸던 그 푸른 청년의 시절이 내게 가장 행복한 때였을까?
생각지도 않게 마주하게 된 한 광경은 내 인생의 항로를 거부감 없이 변경시켰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며 서울의 한 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을 때 내 수업에 오셨던 목사님 한 분이 당신의 모교에서 실시하는 ‘라틴어 강좌’를 내게 소개했다. ‘라틴어’ ‘한 달’ ‘공개강좌’라는 말에 나는 매료되었다. 라틴어와 헬라어 공개강좌에 참석한 첫날, 수업 시작 전 수백 명의 학생이 한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여학생은 겨우 두 명, 그러므로 남성 떼창이었다. 그 합창 소리 한가운데 앉아서 나는 그 찬송 소리의 웅장함과 성스러움에 압도당했다. 그 엄청난 울림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이 힘주어 부르던 그 찬송을 매일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흥미로웠던 라틴어와 헬라어의 한 달여 공개강좌를 마치고 내가 전혀 예정에 없었던 그 대학원 시험에 무모하게 응시했던 것은 지금 돌아보니 그 찬송 소리와 무관치 않았다. 그리고 시작된 낯선 학문에로의 진입.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어서 날마다 신기했고 날마다 흥미로웠다. 매일 채플 시간 강당을 울리던 그들의 찬송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큰 기쁨이었다.
첫 학기 시작 전에 개강수련회가 열렸다. 대학생이 되도록 간절함이나 애달픔으로 소리 높여 기도해 본 일이 없는 나는 천마산이 울릴 정도로 울며 기도하는 전도사님들의 기도하는 자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천마산으로 출발하기 직전 들었던 사촌 여동생의 문제를 놓고 집중기도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새벽, 꿈을 꾸었다. 천마산을 내려온 날 동생의 문제가 꿈과 똑같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 놀랍고 한편 신기했다. 그 기도의 응답을 시작으로 나는 겁 없이 하나님께 다가가기 시작했다.
숲속의 낙원 생활 같았던 대학원 내내 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즐겁게 공부하고, 결혼도 하고, 졸업하고, 아기도 낳고, 바라던 유학의 길도 떠났으니 그 시절은 분명 내게 있어 가장 빛나고 반짝이는 시절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오롯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5월의 어느 새벽으로 또렷이 기억되는 날이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남편이 모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자신의 길에 들어서자 그 무렵부터 나는 자주 새벽에 눈이 떠졌다. 눈을 뜨면 다시 잠들지 못하고 의식은 더욱 명료해졌다. 가족이 깰까 봐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거주하게 된 아파트의 작은 거실은 가로로 여덟 걸음, 세로로 네 걸음이면 족한 크기였다. 가스 불에 찻물을 올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차 한 잔을 만들어 손에 들고, 작은 거실을 걸음 수를 세며 서성였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유령처럼 떠다니자면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고 서글퍼졌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다는, 분명 달란트를 받은 것 같긴 한데, 무엇인지 어디에 두었는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제 무엇인가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 후회와 절망과 상실감이 나를 괴롭혔다. 함께 한 세월 속에서 남편이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그가 목표한 길로 들어섰지만, 그것은 남편의 성취였지 나의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50살이 되고, 60살이 된다면 나의 생은 얼마나 초라하고 허망할 것인가! 그렇게 밤잠을 설칠 때 내 앞으로 다가와 준 것이 글쓰기였다.
지역 도서관의 문예 창작 과정이었지만 내가 대학교 때 읽어 익히 잘 아는 소설의 유명 여류작가가 선생님으로 오셨다. 첫 시간에 숙제로 자신이 쓸 수 있는 만큼 소설을 써오라고 했을 때, 나는 준비 없이 대학원 시험을 치르고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처럼 빈 노트에 연필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간 읽은 무수히 많은 소설의 모방이었다. 내 숙제의 첫 페이지를 일별한 소설가는 “소설 좀 써봤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비로소 소설가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예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계속 써보세요. 쓰시겠어요!”
나의 소설 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경험한 것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지어내는 일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거짓과 발칙한 상상의 세계는 내게 일종의 숨구멍이었다. 글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못 돼 한 잡지로 등단하며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2년쯤 지난 어느 날로 기억된다. 그 밤은.
남편은 안식년을 받아 외국에 나가 집에 없었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으로 아카시아 향이 바람결에 묻어 들어오던 5월의 밤이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나는 거실에 홀로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아들이 그리워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시신에 화장을 해드리는 며느리의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망자의 외아들은 평범치 않은 출생의 이력과 방랑의 기질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순간 소식도 닿지 않는 알래스카에 있다. 홀로 장례를 치러야 하는 며느리의 심정과 너무도 초라하게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얼굴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며느리가 마지막 화장을 해드리는 장면을 설정했다. 실제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상상만으로 개연성을 확보하며 그럴듯하게 꾸미자니 나도 모르게 몰두했다. 인터넷 검색과 몇 년 묵은 나의 색조화장품을 꺼내 손등에 발라가며 한 문장 한 문장 장면을 완성해갔다. 루페를 눈에 끼고 보석을 다듬는 세공사처럼 나는 단어와 문장을 치열하게 조탁했다. 소설 속 기도원이 있던 남양주의 한 허름한 장례식장 시신 안치실에 나는 이미 가 있었다. 망자의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얼음장 같은 얼굴에 완벽하게 색조 화장까지 마치고 뜬 눈을 감겨드리는 것까지 완성하자 말할 수 없는 성취감으로 꽉 차올랐다. 동시에 컴퓨터가 놓여 있는 내 책상에 망자가 곱게 화장한 얼굴로 누워 있는 듯 보였다. 순간 머리카락이 모두 바늘처럼 곤두서고 온몸에 으스스 닭살이 돋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계속 이어 쓰고 싶은데, 무서워 더 진행할 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막내가 잠든 방에 들어가 막내를 끌어안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의식은 쉬 무뎌지지 않고, 나는 끝내 잠들지 못하고 새벽 미명까지 그 장례식장 언저리를 서성였다.
돌아보니 내가 소설 쓰기에 몰두하여 빠져들었던 무아지경의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하게 무서웠으나 엑스터시라고 표현할 만한 완성의 황홀감을 동시에 느꼈던 그 몰입의 순간이 내겐 일생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막내딸에게 물었다.
“다른 엄마들은 언제가 가장 행복했대?”
“엄마! 정말 웃겨! 우리 반 27명 중 20명 넘게 다 ‘너 낳았을 때’래!! 엄마들끼리 짰어?”
딸의 대답에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소리 내 웃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