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
2020-06-15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3 |
글/ 김명섭(연세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2020년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연구해야 한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없어지는 것은 초병의 목숨과 더불어 진실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쟁에 관해서는 거짓말이 가득하다. 승전을 위한 거짓말은 금지되기보다는 권장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평화를 위해 적당히 전쟁의 진실을 덮어버리자는 유혹도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진실을 직시할 때만이 평화를 지속할 수 있다.
II. 정전체제의 탄생
1. 시간: 상이한 시간관념에 기초한 정전체제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전면전쟁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아코디언처럼 전선이 요동치던 전면전쟁기(全面戰爭期)를 지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정전협상이 병행되는 화전양면기(和戰兩面期)를 맞이했다. 정전협상은 군사령관들 간의 정화와 정전을 위한 협상이었다. 이것은 외교관들의 평화협상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서방 기자들은 1951년의 여름이 가기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베이징에서 파견된 중국공산당 측 인사들도 겨울옷을 지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두 번의 겨울을 더 보내고 새로 여름을 맞이한 1953년 7월 27일에야 발효될 수 있었다. 정전 이외의 문제들에 관한 협상은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진행된 제네바 정치회의로 미뤄졌다.
단지 전쟁을 정지하기 위한 협상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서로의 관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선 시간관념부터가 달랐다. 정전협상이 시작된 시각을 한국 국방부에서 공간된 <6·25전쟁사>는 1951년 7월 10일 오전 11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같은 날 오전 10시에 ‘정전담판’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6·25전쟁 정전협상회의록에 따르면 쌍방은 약속 시간을 정하면서, “우리들 시간(our time)”인가, 아니면 “당신들 시간(your time)”인가를 확인해야 했다.
왜 이런 시간의 차이가 존재했을까? 평양에서는 6·25전쟁 이전이나 이후 일광절약시간제(서머타임)를 실시한 적이 없지만, 대한민국은 당시 일광절약시간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25일 38선 이북의 새벽 4시는 38선 이남에서는 같은 날 새벽 5시였다. 이러한 시차(時差)는 6·25전쟁 개전 관련 사료들을 분석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지만, 국내외의 6·25전쟁 연구자들에 의해 간과되어 왔다.
서머타임이라는 생소한 제도로 인해 서울과 평양 사이에 존재하게 된 서로의 시차(時差) 이상으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시차(視差, parallax)가 존재했다. 소련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서양국가들과는 달리 서머타임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과 달리 지역별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서로의 다른 시차를 반영하고 있다.
정전은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전쟁의 광기를 요술램프 속에 미봉하는 것이다. 지니(Genie)는 미세한 틈을 통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정전상태를 감시하기 위한 중립국에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공산진영 정전협상 대표들의 주장이었다. 자유진영, 특히 한국의 이승만은 공산진영이 상정하고 있는 그러한 ‘정전의 시간’이란 결국 속전을 위한 전쟁 준비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진영이 비행장을 복구하고 증설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에 극구 반대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조선전쟁 또는 한국전쟁이라고도 불리는 6·25전쟁은 정치적 이념은 물론 서로 다른 시간적 표준을 가진 문명권역(文明圈域) 간의 충돌이기도 했다. 조선인민군 대표단장 남일과 국제연합군 대표단장 찰스 터너 조이(C. Turner Joy) 그리고 한국군 대표 백선엽이 개성에서 각각 서로 다른 시간관념을 갖고 만나는 장면은 조선/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die 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m, Ernst Bloch)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이한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상이한 역사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 공간: 38선에서 군사분계선으로
전통적 의미의 전쟁은 공간 장악을 위한 투쟁이다. 전쟁을 정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 속에 얻거나 잃은 공간을 재획정해야 했다. 정전협상이 이루어지는 공간도 중요하다. 국제연합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당시 국제연합군이 장악하고 있던 원산 인근 해상에 정박한 덴마크병원선 위에서 정전협상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공산측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개성을 선택했는데,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됨으로써 개성은 공산진영의 공간으로 고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개성이 정전협상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은 결국 정전협상 장소가 판문점으로 옮겨진 사실에서 반증된다.
판문점에서 양측은 공간재획정에 관한 의제부터 다시 시작했다. 전쟁이 일방의 승리로 끝날 경우에는 징벌적 재조정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지만,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전쟁을 정지하기 위한 경계선을 획정하는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전상태(戰前狀態, status quo ante bellum) 회복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점유지 보유(uti possidetis, ita possidatis)의 원리’이다. 공산진영이 주장한 38선 회복은 전자의 원리에 가까운 것이었고, 자유진영이 주장한 교전선에 따른 경계 획정은 후자의 원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만일 자유진영이 38선을 회복하는 데 동의했다면 공간재획정에 관한 합의는 빨라졌을 것이고 정전협상은 좀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은 더 희생을 줄일 수 있었고, 38선 이남에 있던 고도(古都) 개성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NLL문제가 회피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유진영은 38선으로의 회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첫째, 한반도 동부의 38선 이북에 해당하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더 큰 이유는 자유진영이 38선을 받아들일 경우 당시 38선 이북 서해의 압록강 인근까지, 그리고 동해의 두만강 인근까지 확보하고 있던 해상과 상공의 우위를 단번에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국제연합군 측의 터너 조이(C. TURNER JOY) 수석대표는 해군사령관으로서 이러한 3차원적 우위를 끝까지 활용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육상에서의 군사분계선이 합의에 이르게 되자 그에 따라 서해와 동해의 해군력을 후퇴시키면서 해면과 도서를 공산 측에 양보하며 형성된 평화선(平和線)이 NLL이었다.
군사분계선 이북(서해안과 동해안의 한국군과 국제연합군 등)과 이남(지리산 인근의 빨치산 등)의 무장세력은 각각 1950년 6월 25일 이전의 선으로 되돌리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NLL 이북의 무장세력은 이남으로 소개(疏開)되었고, 일부는 서해 5도에 정착했다. 지리산 인근의 빨치산들은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평양에서 북로당 계열의 공산주의자들과 남로당 계열의 공산주의자들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되어 후자가 몰살되고 있던 상황에서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의 빨치산들은 북으로 소개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3. 인간: 정전협상 막전막후의 인간군상
정전협상 회의록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정전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공산 측의 쎄팡(解方), 덩화(邓华), 남일(南日), 이상조(李相朝), 장평산(張平山) 그리고 국제연합군 측의 터너 조이(C. Turner Joy), 헨리 호드스(Henry Irving Hodes), 로렌스 크레이기(Laurence Carbee Craigie), 알레이 버크(Arleigh Albert Burke), 백선엽(白善燁) 등의 인간군상에 대한 치밀한 인문학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아울러 스탈린(Joseph Stalin),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리커눙(李克農)으로 이어졌던 공산군 측 막후와 트루먼(Harry S. Truman)과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이승만,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등 국제연합군 측 막후에 있던 인간군상에 대한 분석은 정전협상의 현장과 각국의 수뇌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정전협상에서 가장 긴 시간을 소요하게 만들었던 것 또한 포로가 된 인간의 문제였다. 포로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 미국은 ‘자유수호’라는 명분을 지키고자 했다. 자국의 포로들에 대한 신속한 송환을 요구하는 국내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송환 불원 공산군 포로들의 자유선택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협상이 지연되는 것을 감수했다. 10여 명의 송환 불원 미군포로들이 공산 중국을 선택하는 것도 감수했다(이들은 결국 다시 미국 땅을 밟았지만).
공산측 실무대표 남일과 국제연합군 측 실무대표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이 서명하는 장면은 정전협상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공산 측의 의도대로 연출된 것이었다. 공산 측은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목조건물을 급조했다. 현재 이 목조건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전협정조인장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에는 “1950년 6월 25일 조선에서 침략전쟁을 도발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영웅적 조선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이곳에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1953년 3월 5일 정전에 반대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공산진영은 정전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고, 정전협정 체결장면을 “미 제국주의자와 이승만 괴뢰도당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승리의 장면으로 연출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에서 보여지듯이 정전협정은 전장(戰場)의 최고사령관들 간에 체결되는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등의 서명이 최종적인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해서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군)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승만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마오쩌둥이나 아이젠하워가 서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정전협정은 군 최고사령관이 서명하는 협정이기 때문이다. 한국군 사령관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미군 사령관 퍼싱(John Joseph Pershing)은 서명하지 않았고,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포쉬(Ferdinand Foch)가 대표로 서명했었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의가 열렸을 때도, 공산 측은 한국의 정전협정에 대한 당사자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조선인민군 측이 한국군의 당사자성을 부인하기 시작했던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III. 평화체제 만들기
“전쟁과 평화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between war and peace).”라는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명제에 입각해서 본다면 1953년에 수립된 조선/한국 정전체제는 평화인가, 아니면 전쟁인가? 정전은 전쟁에 가깝고, 따라서 평화협정의 체결을 통해 끝내야 할 상태로 보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7·27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한 정전체제가 국제법적(de jure) 전쟁상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평화협정에 의해 평화가 시작되는 시점(始點)이 곧 전쟁의 종점(終點)이라는 유럽의 근대국제법적 전통에 충실한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평화조약이 체결된 바가 없다. 패전국 독일이 체결한 평화조약이 없는 유럽과 1951년 패전국 일본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있는 동아시아 중 어디가 더 평화로울까? 또 다른 평화협정의 패러독스는 베트남 평화협정이었다. 미국이 서둘렀던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은 1975년 베트남 공산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베트남의 보트 피플, 캄보디아에서의 ‘킬링필드’ 그리고 1979년 공산주의국가들의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이어졌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구성된 정전체제는 일차적으로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차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부활하고 있는 일본의 우익전체주의를 봉쇄하기 위한 한국의 의도가 견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3차적으로는 6·25전쟁을 통해 60만 대군으로 성장한 한국군의 북진통일 시도를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도 결합되어 있었다. 독일 재무장과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이중봉쇄(dual containment)를 특징으로 했던 유럽의 냉전체제보다 더 복합적인 삼중봉쇄체제(triple containment, 三重封鎖體制)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정전체제가 6·25전쟁 이후의 ‘긴 평화(long peace)’를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볼 때, 코리아 평화체제는 조선/한국 정전체제를 통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중성이 있다. 정전상태를 보다 영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상태로 대신하고자 하는 이상이 자칫 정전 대신 속전(續戰)을 불러오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정전체제의 불완전한 ‘긴 평화’를 보다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체제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체제에 대한 이상이 평화협정에 대한 맹신으로 왜곡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평화협정에 대한 진실성 있는 논의는 6·25전쟁의 개전 진실에 기초할 때만이 가능하다. 평양 측은 교과서와 박물관 그리고 대중매체 등을 통해 6·25전쟁의 개전 진실을 호도하고, 조선민족주의를 넘어서 김일성민족주의까지 내세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 화해를 위한 역사를 내세우며 진실을 가리는 역사교육을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며 탐색하는 역사교육으로 정립하는 것은 정전체제를 영구평화체제로 바꾸어가는 선결요건이 된다. 정전체제의 시공간을 평화체제의 시공간으로 진화시키고자 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조건은 미래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희망에 앞서 과거의 진실부터 직시할 수 있는 역사 지성이다.
<bluesail@yonsei.ac.kr>
글 | 김명섭
제19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역임했고, 저서 <전쟁과 평화>로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