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 핵무기 사용에 대한 진실
2020-06-12맥아더에 대한 왜곡과 선동, 누가 하는가?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0 |
글/ 이상호(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성실성과 통찰력을 가지고
어떤 인물에 관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인물도 있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이런 인물의 전형(典型)이라고 생각한다. 콘파이프를 물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의 옆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웅사관’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영웅을 성실성과 통찰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을 알아보려면, 평가하는 우리도 역시 성실성과 통찰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칼라일은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한 인물에 대한 통찰력을 갖출 수 있을까? 바로 해당 인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맥아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 은인’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잔혹한 전쟁광이자 살인마’로서 평가받고 있는 맥아더에 대해 그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하고, 맥아더를 둘러싼 왜곡과 오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자.
맥아더의 생애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현재 아칸소 주(Arkansas State)의 군건물인 닷지 요새(Fort Dodge)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더 맥아더(Arthur MacArthur)와 핑키 하디(Pinky Hardy)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역시 군인으로서, 맥아더는 어려서부터 친근감 있게 군인이라는 직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맥아더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주로 군시설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1899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4년간의 재학 기간에 2470점 만점에 2424.2점, 즉 100점 만점에 98.14점을 얻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 기록은 당시 미 육사 역사상 역대 3번째에 드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인 1903년에, 맥아더는 소위로 임관하여, 제3공병대대에 배속되어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다. 필리핀 파견은 첫 해외 근무였고 그의 인생에 아시아 지역과 첫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항해 중에 그는 “태평양을 지배하는 힘은 곧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다.”라고 주장했던 정치가 베버리지(Albert J. Beveridge)의 유명한 연설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서 아시아는 장차 미국을 위한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의 대아시아관은 이때부터 구체화하였다.
이후 태평양 사단의 공병참모 보좌관으로 발령받았고, 1905년 10월, 육군부의 지시로 부친인 아더 맥아더(Arthur MacArthur)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8월, 84여단장의 직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1918년 11월, 미 육군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19년 6월, 육사교장에 취임하여, 최연소 육사교장이 되었다. 1922년 다시 마닐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25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필리핀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30년 11월 대장 진급과 함께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함으로써, 그의 최연소 기록은 계속 이어졌다. 1937년 12월 31일 전역함으로써, 그의 정상적인 군 경력은 화려하게 끝을 맺었다.
그러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태평양 지역에서도 전운이 감돌자,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소장으로 재임명되었다. 24시간이 지난 1941년 7월 27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을 통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함께 미-일 전쟁이 개시되자,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했다. 1941년 12월, 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1942년 4월, 남서 태평양지구총사령관(CINCSWPA)에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태평양사령부 지상군 사령관(CINCAFPAC)에 임명되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연합국최고사령관(SCAP)에 임명되어 일본 통치를 담당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전쟁을 지휘했으며,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든 1951년 4월 11일, 극동군사령관, 연합국최고사령관, 유엔군총사령관 등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964년 4월 3일 월터 리드(Walter Reed) 미 육군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맥아더를 둘러싼 교묘한 악평과 선동
지면 관계상, 맥아더를 둘러싸고 논란이 된 부분 2가지만 언급해 보자. 첫째, 맥아더가 6·25전쟁에서 민간인학살을 지시했을까? 둘째, 맥아더가 핵무기까지 동원하여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기도했는가?
1. 맥아더가 민간인 학살의 주범?
첫째로, 맥아더가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을까라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15년 전 어떤 무명 운동권 가수가 부른 ‘맥아더’라는 노래가 언론과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가사 내용 중 문제가 되는 것은 신천학살, 노근리 사건, 서울 수복 전투 시 맥아더가 주장했다는 약탈 및 학살 행위 조장에 관한 언급 등이다. 가사 일부를 게재하면 다음과 같다.
노근리의 양민들을 쏴죽이라 명령했던 그 자 맥아더
신천의 양민들을 기름으로 태워 죽인 그 자 맥아더
핵폭탄을 터트려서 이민족을 다 죽이려 했던 맥아더
이게 무슨 은인이냐 끌어내려 살인자의 동상 맥아더
(중략)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이 가수는, 자신이 이러한 가사를 쓴 이유를 맥아더의 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무지함은, 이 가수가 만들어낸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다. 대학교수로 자칭 통일의 선구자라는 강정구의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칼럼을 거의 그대로 맹신하여 쓴 것이다. 강정구는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맥아더를 표현했다.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 맥아더
식민지 총독과 같은 점령군사령관
분단세력과 동북아 파시스트 후견인
원자탄 26개로 한반도 종말을 기도한 사람
민간인학살 책임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주장을 아무런 여과 없이, 또한 자세한 사료 검토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것이 문제다. 천박하고 무책임한 선동 발언이다.
더욱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불만을 학계와 언론에서, 무책임하게 사료 검토 없이 자신의 악취를 배설하듯이, 토설하는 것은 정상적인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것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앵무새처럼 반복되고 있다.
맥아더기념관(MacArthur Archives)에 보관된 자료,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명령을 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모든 문제를 맥아더 개인에게 돌린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기보다, 무엇인가 다른 목적을 노린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
2. 핵무기로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는가?
다음으로 과연 맥아더가 핵무기를 가지고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는가의 문제이다.
미국의 한국전쟁사가인 커밍스(Bruce Cumings)는 1950년 7월 9일 맥아더가 당시 합참차장이던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에게 긴급메시지로 원폭사용에 관해 전문을 보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다. 그런데 커밍스도 이 긴급메시지를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리지웨이의 비망록에서 확인했다고 기술했다. 일종의 전언을 사실 확인 없이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주장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그대로 전파하고, 또 일부 학자들이 자료 검토 없이 언급하다 보니 사실과 전혀 다른 낭설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커밍스는 또다시 영국 외무성 자료를 근거로 1950년 12월 9일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위한 재량권을 요청했다고 주장했고, 12월 24일 26개의 핵무기가 필요한 목표 리스트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료에 따르면 사실과 매우 다르다. 사료에 따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21일 중공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미 육군부의 작전참모부장인 볼트(Charles L. Bolte) 장군은 맥아더사령부에게 핵무기 선제 타격지역 20곳을 선정해 달라는 전문을 보낸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12월 24일 소련군의 남진을 막아내고, 전략 지역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21곳의 타격지역을 선정하여 답신을 보냈다. 타격지역 가운데 16곳은 소련 영토이고 5곳은 중국 지역이다(한반도의 어느 곳도 대상 지역에 없다). 특히 선정된 중국 지역의 경우, 칭다오, 뤼순, 다롄 등 소련과 중국의 해군 함대가 이용할 수 있는 해군 전략 지역이 우선순위 대상 지역이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핵무기 사용 구상의 제기는, 워싱턴의 육군부이고, 맥아더는 육군부의 요청에 따라, 만약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경우, 어떤 전략 지역에 투하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역 사령관으로서 답변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커밍스는 교묘하게도, 이 21일 자 볼트의 문서를 생략한 채, 마치 핵무기의 사용을 먼저 요청한 사람이 맥아더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사료적 비판 없이, 국내 일부 학자들이 인용하여, 왜곡이 확산된 것이다. 따라서 맥아더가 핵무기를 동원하여, 한반도를 초토화하고 한민족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현대사에 관한 연구와 관심이 증대되어야!
맥아더를 둘러싼 왜곡과 오해를 우리는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현대사에 관한 주요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관계도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은 채, 추측과 낭설이 만연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 분석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꼬리표를 붙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해석하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더욱이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폭력 행동까지 불사하겠다는 행동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한 열정이 있다면 역사 공부에 좀 더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
<kennan2@naver.com>
글 | 이상호
현재 한미관계사 및 한국 현대사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6·25전쟁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며, 기존 6·25전쟁에 대한 오류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사료를 열심히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