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페미니즘의 확산으로 심화되는 ‘성 양극화’와 크리스천 여성의 사명

젠더 페미니즘의 확산으로 심화되는 ‘성 양극화’와 크리스천 여성의 사명

2020-05-08 0 By worldview

월드뷰 05 MA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글/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로의 변질과 그 폐해


인류 역사상 전통적 가정 공동체에 가장 적대적이라고 평가되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는 본래 페미니즘에서 파생되었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의 변질된 시대사조이다. 19세기 중엽 여권 신장 및 남녀평등 운동으로 태동한 초기 건전한 페미니즘은 ‘68혁명’을 결정적 분기점으로 급진적으로 선회하며 21세기 들어와 인류 문명을 위협하는 시대사조로 급부상했다.

양자가 같은 뿌리에서 연원하므로, 필자는 젠더 페미니즘’(gender-feminism)이라는 시대사조를 주창하였다. 그렇다면 왜 페미니즘은 젠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는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강행한 중추 세력, 결혼 및 가족 구조를 해체시키는 패륜적 성 혁명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어떤 연유로 이 세력은 생물학적 성인 섹스(sex) 대신 사회·문화·심리적 성인 젠더(gender)를 성 정체성을 나타내는 주류 용어로 보편화시켰는가? 이러한 거대한 움직임의 주체는 바로 마르크시즘(Marxism)에 사상적·정신적 기반을 둔 젠더 페미니스트들이었던 것이다.

젠더 페미니스트들을 대내외적으로 선동했던 가장 유력한 동인은 도무지 극복되지 않는 남녀 차별이었다. 이에 젠더 페미니스트들은 아예 생물학적 성별을 해체시키고 여성 차별의 강고한 질서인 결혼과 가정을 파괴시키려 했다. 이들은 성차(性差)가 생물학적 결정이 아닌 사회적 관행의 결과임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성별을 의미하는 섹스 대신 젠더를 그토록 종용했던 것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여성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 수치와 굴욕을 겪으며 모질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 체제에 고통당하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태동한 페미니즘이 성 정체성을 해체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것은 인류 문명사적으로 애석하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역사적 배경, 곧 성차별 문제가 인류 역사의 장구한 세월 동안 근절되지 못하고 고질적 악행으로 연면히 이어져 내려온 현실은 참혹한 역사이기에 이에 대해 진정성 있는 해결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 해결 방식이 인륜(人倫)에 치명적 위해를 가하고 고귀한 인간 존재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인류 문명을 파탄시키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젠더 페미니즘의 확산으로 ‘성 양극화’가 심화되는 한국사회


현재 한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은 대학가를 넘어 사회 전반의 트렌드가 됨으로써 소위 ‘페미니즘 전성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장구한 남성 중심적인 역사를 감내하면서 숨죽이고 살아왔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페미니즘 전성시대 속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현상이 극심한 남녀(男女) 분리주의를 통해 사회 갈등 및 국민 분열을 일으킴으로써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치닫는 것이다. 양성(兩性) 간에 조롱과 혐오가 점점 극단화(여혐·남혐·극혐)되다 보니, 이성(異性)에 대한 견제와 경계가 나날이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남녀가 서로를 생존에 해로운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남과 여로 양극화되는 ‘성(性) 양극화’가 ‘젠더 전쟁’이라 불릴 만큼 남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실제로 2018년 7월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가 20~50대 성인 남녀를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0.7%가 남녀 대립이 ‘심각하다’고 답변하였고 68.2%는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같은 시기 리얼미터(여론 조사 기관)가 발표한 ‘공동체 갈등 관련 조사’에서도 특히 20대가 바라본 가장 심각한 갈등 1위는 성 갈등(57%)이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달리 양성평등 관계 속에서 성장한 20대·30대 남성들은 역차별을 토로하며, 각각 76%, 66%가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이었던 이념 갈등과 세대 갈등, 노사 갈등을 마침내 남녀 갈등이 앞지르게 된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전개되는 페미니즘의 양상과 폐해는 첫째, 남녀의 상생과 연대가 아닌 극단적 대립과 반목이다. 둘째,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임신·출산)을 극도로 혐오하여 ‘젠더 중립성’(=성 중립성, gender neutrality)으로 미화된 성별 해체를 지향한다. 셋째, 성소수자 세력(LGBTQIA)에 동조함으로써 양성평등(sex equality)이 아닌 젠더 평등(=성 평등, gender equality)을 추구한다. 넷째, 이성애적 결혼을 비판하고 동성애적 파트너십을 옹호함으로써 전통적 결혼 및 가족 제도에 적대적이다. 다섯째, 일부일처제(monogamy)에 부정적이고 폴리 아모리(polyamory, 복수 연애)에 우호적인 자유연애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여섯째, 소수의 엘리트 페미니스트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이익 집단화 함으로써 전체 여성의 실질적 권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사회 약자인 소외 계층 여성을 외면한다.1)

이 세태를 바라보면서 전통적 성 윤리와 가정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퇴락한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는 현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특별히 1970년대 서구 세계에서 성행했던 급진적 페미니즘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혼합물인 젠더 페미니즘이 21세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현실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파행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한국의 페미니즘은 1987년 창립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한국여연’)을 중심으로 현실 정치로의 진입에 주력해 왔다. ‘한국여연’이 그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주요 활동은 여성 인권 3법 등 젠더 의제의 법제화, 낙태죄 폐지, 성 주류화 정책, 성 평등 개헌운동, 여성 정치 세력화 등이다. 그러다가 페미니즘 논란이 크게 일어난 발단은, 2015년 여성 혐오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Megalia)와 여기서 파생된 극단적 남성 혐오 카페 ‘워마드’(Womad)에 엘리트 페미니스트들이 긴밀하게 관여하면서부터이다.

특별히 21대 총선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열풍 후 처음 치러지는 선거이므로 새로 탄생한 ‘여성의 당’이 주목할 만한데, ‘여성의 당’은 우려했던 대로 사람들 이목을 끄는 선정적인 페미니즘 이슈에만 영합하는 공약을 발표하였다. 이로 보건대, 전체 여성들의 공동선(共同善)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 추구를 위해 움직이는 권력 지향적·이익 집단적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오늘의 파행적인 페미니즘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남성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표방함으로써 페미니즘의 보편적 이론마저 변질시켜 버린 일이다. 사실 남성 중심적 체제에서 고통당하는 여성들의 인권 신장 운동에서 출발한 초기 건전한 페미니즘은 젠더 페미니즘으로 치달으면서 본궤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급기야 젠더 페미니즘은 자가당착에 빠짐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만 하는 곤궁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지난 세기의 쇠락한 시대사조를 21세기 대한민국에 확산시키고 있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제 21세기 한국 사회는 남녀 간에 대결과 혐오를 부추김으로 ‘성별 해체-성 윤리 해체-가정 해체’로 나아가는 젠더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서, 남녀가 서로 공존·상생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주의나 반대로 남성을 억압하는 여성 중심주의를 모두 다 내려놓고, 남성과 여성 모두의 존엄성이 회복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곧 남녀가 서로를 적이 아닌 연대·협력하는 동반자로서 인정하고, 건전한 성 윤리와 가정 공동체를 구축하며, 양성평등을 중심에 둔 여성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남성 중심적인 위계구조의 진정성 있는 변화가 시급한 한국교회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인권이 획기적으로 발전된 것은 기독교 전래 덕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성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교회 밖과 달리 교계 내부는 양성평등이 진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젠더 페미니즘 세력들은 한국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예나 지금이나 양성평등의 사각지대에서 피눈물을 흘린다고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교회의 여성들을 충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신도들은 남신도보다 수적으로 월등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와 교육, 인재 양성, 정책 결정 같은 교회의 중심적 리더십에서 배제된 가운데 주로 교회의 부수적인 일을 맡고 있다. 또한 소수 교단에서만이 여성의 장로 임직과 목사 안수가 허용되는데,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성 사역자들은 남성 중심적인 위계구조 속에서 여전히 남성 사역자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지적으로 우수한 여신도들이 남녀 차별의 장벽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없어 절망하거나,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성 목회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성범죄가 한국 교회 차원에서 근본적 성찰과 쇄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점이다. 목회자들의 성폭력은 대부분 은폐·축소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징계 규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이 얼마나 한국 교회의 전도 및 선교사역을 후퇴시키고 얼마나 많은 영혼을 실족시키는지 모른다. 물론 이 문제를 개인의 일탈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회와 노회, 총회의 책임마저 면책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점점 더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젠더 페미니즘에 대응할 수 있다.

현재 상당수 교회 여성들(특히 학교에서 인권과 성평등, 페미니즘 교육을 받고 성장한 20~30대 여성들)이 젠더 페미니즘에 영합하여 남성 중심적인 위계질서를 강하게 성토하고 있다. 일부 교회에서는 여신도들의 요구에 따라 페미니즘 강좌가 열리기도 하는데, 초빙된 외부 강사들이 대부분 젠더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최근에 한 여성 신학자는 ‘교회에서 주입하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닌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폭로하면서, ‘목사님의 성차별적 설교도 기독교 가치관이 아닌 자기 가치관에 따라 말하는구나’라고 생각하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2)

2019년 12월 창립된 ‘바른인권여성연합’(이하 바른인연)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진정한 여성 운동을 시작한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는데, 필자는 열악한 교회에서의 여성의 인권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방안과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면, 피해 의식을 느끼는 교회 여성이 변종 페미스트로 변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여성들의 사명을 일깨울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바른인연’은 정치 세력화·이익 집단화한 ‘한국여연’의 잘못된 전철을 반면교사로 삼아 전체 여성들(특히 소외계층 여성들)의 실질적 권익을 대변하는 진정성 있는 단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인의 60~70%가 여성이라면, 설교와 교육, 인재 양성, 정책 결정 등에서 여성의 견해와 입장이 수렴되어야 비로소 한국 교회가 정의롭고 온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한국 교회의 패러다임을 개혁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한국 교회가 여성들을 존귀하게 여긴다면, 여성들은 생명 바쳐 하나님 사역에 헌신할 것이다. 여신도들이 자존감을 갖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소신 있게 감당할 때, 한국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면 ‘악(惡)의 연합’을 이룬 안티 기독교 세력이 교회와 성도를 총공격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흥왕하고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될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새로운 정립과 크리스천 여성의 사명


크리스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패륜적 성 혁명은 바로 ‘여성 주도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미래를 보는 혜안(慧眼)과 인류의 안녕(安寧)을 최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는 사려 깊은 책임감, 건강한 가정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깨어있는 여성들의 헌신적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된다.

그런데 크리스천 여성들의 사명을 견고하게 다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고 올바른 여성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남성 중심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성경을 왜곡되게 번역하고 편협하게 해석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부정적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력한 신학자들 중에도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거나, 여성을 인류를 타락시킨 죄인으로 정죄하거나, 생리적 이유로 불결하다고 혐오한 학자도 있었다. 매우 의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을 원죄(原罪)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헬라어 원어 성경에 대한 왜곡된 번역과 편협한 해석을 근거로 여성 성직(聖職)과 공직(公職)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여성 차별적인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일이다. 가장 문제시되는 구절은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라는 말씀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은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가 33절에도 34절에도 속하지 않는데, 문맥상 연결되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연결되지 않고 33절에 이어지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동일한 헬라어 동사 ‘휘포타소’(ὑποτάσσω)가 남자에게는 ‘제재를 받다’(32절)로, 여자에게는 ‘복종하다’(34절)로 차별적으로 번역된 것이다. 또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말씀한 것과 같이, 바로 앞 구절에서 남자들에게도(26절) 동일하게 “잠잠할지니라(30절)”고 권고한 사실도 완전히 도외시된 점이다.

사실상 고전 14:34 말씀은 당시의 특수한 정황(무질서한 이단들이 예배 분위기를 교란) 속에서 남녀 그리스도인의 단정한 자세를 권고한 말씀인데, 남성 신학자들은 이를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의 틀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성경 저자의 본의를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바울 서신을 전체 성경 본문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몇 구절만을 뽑아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로 삼아왔다.

특별히 여성을 죄의 근원으로 간주했던 유대교 전통에 맞서 바울사도는 남녀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선언한 말씀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그뿐만 아니라 바울이 얼마나 많은 여성(루디아·뵈뵈·브리스가·유오디아·유니게 등)을 차별 없이 복음 전파를 위한 사역자로 세워 동역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결코 남성의 소유물 내지 성적인 욕구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오히려 남성과 동일하게 귀중한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셨기에 여성들의 존엄성을 보호하시고, 인격적으로 교제하셨으며, 남성 중심적인 체제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남성 제자들과 달리 생명을 바쳐 주님을 따르고 전적으로 헌신했던 여인들이 그리스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안에서 여성들에게 새 시대가 열렸음을 암시한다.


양성이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가? 성경에 입각하여 남성과 여성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위한 지향점은 과연 무엇인가?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 질문은 교회에 긴급한 과제를 던진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는 여성들이 성별 때문에 제도적·사회적 불의로 고통을 받는다는 확신에서 페미니즘이 태동했다고 말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여성들의 정의에 대한 외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 특히 남성과 여성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위한 올바른 성경 해석의 틀은 바로 ‘하나님 나라(마 4:17; 막 1:15)’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세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실현되는 세계인데, 즉 이것이 모든 것을 해석하는 기준, 바람직한 남녀 관계를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성별에 따라 명백히 구별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영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 이런 연유에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성(性)의 가치와 존엄성을 훼손할 권리를 갖지 않으며, 서로를 차별하거나 멸시할 수 없고, 억압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 이를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3)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관계도 바람직한 남녀 관계 정립을 위한 올바른 성경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이는 곧 강압적 명령과 복종의 지배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인격적 고유성과 독자성을 존중하는 사랑과 사귐의 평등한 관계이다.4)

21세기 한국 교회는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할 전환점에 있다. 남녀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로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 협력하여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면서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는 동역자이자 코이노니아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파트너이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마지막 시대에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요(행 2:18; cf. 욜 2:29).”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동일한 계명을 주셨고, 예수님의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주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위해 남성과 여성 모두를 부르셨다.5)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지음을 받고 결국 모두 하나님에게서 생겨남으로써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축해가는 동역자인 것이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schechina@hanmail.net>


1) 곽혜원, “젠더 페미니즘, 남녀의 상생 아닌 극단적 반목과 대립 부추겨”, 「국민일보」(2020.02.18).
2) “교회가 주입하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 아닌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 알리고 싶다”, 「뉴스앤조이」(2020.01.28).
3) 곽혜원, 『현대세계의 위기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한들, 2008), 322.
4) 곽혜원,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85-195.
5) 강호숙, 『성경적 페미니즘과 여성 리더십』(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462-466.


글 | 곽혜원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 공부,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 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