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쿠바에서 만난 ‘헤로니모’
2020-02-22
월드뷰 02 FEBR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4 |
글/ 이상현(숭실대 국제법무학과 교수)
대한민국과 2020년이 되도록 정식 외교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중미의 도서국가인 쿠바.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후 미국과도 적대적 관계에 있던 중미 국가 쿠바가 2010년대 오바마 정권기에 마침내 미국과 수교를 맺었다. 미국 뉴욕주 변호사인 한인 2세 전후석(Joseph Jeon)은 경치가 좋다고 알려진 쿠바에서 배낭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런데 그의 쿠바 방문 과정에서 운전기사로 일해 준 사람 역시 한인 4세이고 그녀를 통해 쿠바 거주 한인들을 우연히 소개받고 독립운동가 고 임천택 그리고 그의 아들 고 임은조(쿠바 이름 헤로니모 임)를 알게 된다. 자신도 한인 디아스포라로 이민 2세대로 자본주의에서 벗어났던 사회의 청년들을 만나보고자, 쿠바 거주 한인들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연은 전후석을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를 제작하도록 이끌었다.
전 감독은 한인 2세를 중심으로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통해 제작비를 모으고, 유능한 한인 2세 인적 네크워크를 활용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하여 많지 않은 제작비를 가지고 제작진과 함께 다시 쿠바에 간다. 쿠바를 중심으로 그리고 한국의 기록도 찾아내어 임천택-김귀희 부부의 장남 임은조의 삶을 집중 조명하며 영화 말미에 쿠바의 한인 2세로서 그가 겪은 세계관 변화도 쿠바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선교사들과 손자의 입을 통해 담아낸다.
고 임천택 옹의 부모는 일본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던 1900년대 초 신문광고에 실린 ‘미국의 이웃 나라’인 멕시코 농장 근로자 모집에 응해 1905년 당시 2살이던 임천택을 데리고 이민을 떠났다. 멕시코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며 임금 체불까지 겪던 부친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당시 경제력이 있다고 알려진 쿠바로 이주하게 되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 패망의 비탄한 소식을 듣고 귀국의 꿈을 접고 쿠바에 살면서 자녀들을 키웠다. 임천택 옹은 이렇게 쿠바에서 성장하여 한인 김귀희와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은 쿠바 한인들의 구심점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여 ‘백범일지’에 ‘쿠바의 임천택으로부터의 독립자금 수수’가 기록되기도 하였다.
임천택-김귀희 부부의 9남매 장남인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 이하 헤로니모)은 활발하면고 학업성적도 우수하였다. 헤로니모는 대학 진학에 반대하던 임천택 옹의 뜻을 돌이키려고 가출까지 하며 학구열을 높여 하바나대 법대에 진학하였다. 이때 법대 동기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였다.
당시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정부를 비판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헤로니모는 풀려난 후 현재의 부인인 한인 2세 크리스티나 임과 결혼하였다. 지속적인 반정부투쟁으로 마침내 공산당 정권 수립에 성공하게 되자, 헤로니모는 정부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투철한 공산당원이자 쿠바의 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열정적인 노력을 다해 산업부 차관까지 승진했던 그는 1990년대 초반 30여년 봉직하던 공직에서 퇴직하게 된다.
그런데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있던 그가 동구 공산권의 몰락, 소련의 패망, 이어지는 북한의 기아 소식을 보면서 유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듯하다. 90년대 중반 대한민국의 해외동포 초청행사에 초청된 그는 서울을 처음 방문하면서 올림픽을 치른 서울의 발전상, 경기도 태생의 부친 고 임천택 옹의 생전 가르침에 대해 다시금 진지한 자기 성찰이 있었던 듯하다. 헤로니모는 쿠바로 돌아온 후 부모가 생전에 했던 쿠바 내 한인사회 네트워크 구축과 단결을 자신의 인생 후반부 사명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쿠바 각지에 흩어졌던 한인들을 방문하여 사회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데, 이 과정에서 쿠바에 온 한인 선교사들의 협력을 얻게 된다. 또, 쿠바 정부에 외교적 협력을 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조력을 요청했으나 얻지 못하고 오히려 멕시코 주재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간접적 지원을 받게 된다. 때마침 대한민국 정부는 고 임천택 옹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였다. 결국, 쿠바 정부에서 불허 결정을 내려 쿠바 내 한인 단체 등록은 무산되었지만, 그는 한인 선교사들과 함께 쿠바 내 한인들의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2000년대 중반 동맥경화수술을 받다가 사망하게 된다. 지금은 헤로니모의 아들과 손자가 쿠바 내 한인사회 결속이라는 그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한인들을 만났던 선교사에 따르면, 헤로니모는 평생 가져왔던 유물론 공산주의 세계관의 문제점으로 고민이 깊었고 기독교 세계관을 알게 되면서 내적 갈등을 하며 기독교 전향에 시간을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손자는 그가 젊은 시절 가지고 있던 이상 즉 ‘사람에 대한 애정’에 더 직접적으로 부합하는 것이 기독교였다며 그의 전향을 인정하였다(반면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임은 그의 전향을 강하게 부정한다).
영화제작자는 헤로니모를 쿠바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인간애를 실천하고자 당시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수용했고 공직에서 전력을 다해 국가에 충성하다가 90년대 퇴직 후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공산주의 세계관에 대해 갈등했고, 쿠바 내의 한인사회 결속 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인생을 마감한 도량 큰 인물로 평가한다. 나는 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정확히 아실 것이고, 헤로니모는 그의 손자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수용한 기독교를 알리고, 미처 인생의 마감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료사고로 사망한 것이라 생각한다. 20세기를 거치며 왕조멸망, 식민지배, 남북분단,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가족이 쿠바로 이민 가서 한인 디아스포라로 4대에 걸쳐 가정을 이루고 외교적 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대한민국과 인연을 지속하며 한인사회 결속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데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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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상현
서울대 법대 및 고려대 법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뉴욕대학교(NYU) 로스쿨에서 LL.M(미 법학석사)을, 골든 게이트 대학 로스쿨에서 S.J.D(미 법학박사)를 받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현재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