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탄압과 인권 문제
2019-12-08중국의 기독교 탄압과 인권 문제
월드뷰 12 DECEMBER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
글/ 조용선(GMS 선교사)
1. 기독교가 받는 탄압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인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단지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지역 등 여러 곳에서 기독교가 탄압받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참된 기독교가 어떤 기독교 국가에서는 탄압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한 크리소스톰은 로마 기독교 세계의 거짓된 신자들에 의하여 탄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특별히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탄압을 당한다는 관점으로만 이야기가 된다면 나는 그것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공산당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계략에 의하여 고난을 겪으며, 그런 면에서 고난은 필수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금(正金)이 된다.
2. 중국 신화와 인권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것은 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를 정치와 사상의 체제로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는 그 시초부터 인권을 가볍게 보았으며 그러한 현상은 중국의 신화에서부터 나타난다. 신화를 하나의 학문으로 분석하는 신화학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확실히 인권 문제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뉘와션화’(女媧神话)에서는 뉘와 여신이 정성 들여 만든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는 진흙을 덩굴로 쳐서 흩어져 나오는 것들이 모두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뉘와 여신이 정성 들여 만든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이며 덩굴로 쳐서 흩어져 나온 진흙들은 많은 중국 백성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황제와 귀족 등의 상류계층, 그리고 평민의 출생이 다르다는 관점을 갖게 만든다.
중국어에 ‘훠마이(活埋)’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땅에 묻어버리는 ‘생매장’을 뜻한다. 중국의 한 통치자는 40만 명을 한꺼번에 생매장해버린 적도 있다. 인권 문제라! 한두 명, 혹은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져 수십 명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말이 되는데 40만 명을 한꺼번에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버린 사실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인권’은 고사하고 ‘이것이 정말 현실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3. 문화대혁명의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문화대혁명 때의 이야기이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있었던 공산주의의 광풍(狂風)과 같은 시기였으며 이때 자본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때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피아노 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피아노였고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움으로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니 돈이 있는 집안이고, 배운 사람이고, 문화와 교양의 정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손가락은 모두 잘렸다. 죽이지 않고 손가락을 자른 다음에 살려두었다. 이것은 무산자 계급의 잔인한 복수였다. 성경에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에게 도전한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잡은 다음에 그의 눈앞에서 아들들을 죽였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들들의 죽음이었다. 그 장면은 평생 시드기야의 기억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손가락이 잘린 여성은 평생 자신의 손을 보면서 그리고 피아노를 보면서 아픔 속에 삶이 멈추어 있었고 무의미한 시간의 고통 끝에 죽었다.
또 중국인 기독교 목사 한 분은 감옥에 갇힌 채 계속 고문을 당했다. 잠시 고문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워 혼자 있을 때 그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를 빼고 소켓에 손을 넣어 전기 감전으로 죽으려고 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내가 그의 동영상을 본 것은 2000년대 초기였다. 지금이 2019년이니 그 목사님이 아직 살아계실지는 모르겠다. 그는 기독교인이 자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잔혹한 고문과 협박에 결국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그때 죽지 않았고, 그 후 20여 년간 감옥에서 청춘을 다 보낸 후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4. 선교사로서 나의 경험
2018년 1월 18일, 나는 약 20여 년의 중국 본토에서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안전부(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한국인 목사가 중국인에게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그래도 비교적 가볍게, 그리고 정중하게 추방되었다. 그들이 나를 조사하기 위해 ‘꽁안팅(경찰청)’으로 부를 때에 거리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길을 걸어 경찰청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는 울었다. 그리고 걸음마다 내 발에서 한 움큼씩 붉은 피가 흘러내려 하얀 눈 위에서 장미로 피어나는 환상을 경험했다. 순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주 예수님을 느꼈다.
추방되는 날, 중국인 형제자매들이 공항으로 배웅을 왔다. 나는 표 검색대 앞에서 그들에게 “이것이 한국식 이별이오!”라고 말하고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중국인 형제자매들도 나를 따라 큰절을 했다. 눈물이 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많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절을 하고 일어나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검색대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에 돌아와서 몇 달을 울고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자 있게 되면 중국이 생각났다. 그리고 중국어 복음 성가만 들으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못 견디겠기에 중국어로 예배를 드렸다. 나와 아내와 자식이 드리는 예배지만 셋이서 중국어로 찬송하고 설교한 것을 녹음하여 중국인 형제자매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중국을 어떻게 선교할지 나름대로 연구한 선교의 전략을 글로 써서 인터넷에 올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난 2019년 2월 28일 아침 8시 30분,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여자 목소리로 녹음된 것이었는데 내용은 중앙 무슨 부서라고 하며 나의 안건에 대해 최후로 통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두 번 반복한 후에 전화는 끊겼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힘이 빠지며 심장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 안전부가 나에 대해 최후로 경고를 한 것이었다.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결정했다. “순교할 수 있는 기회다. 나와 같은 정도의 사람이 순교한다는 것은 순교자에 대한 모독이지만 그래도 주님이 받아주신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그러자 두려움은 사라졌다. 2019년 5월 26일. 작은 아들까지 와서 우리 가족 네 사람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는 두 아들에게 물었다. “선교사의 자녀로서 혹시 부모가 선교를 한 것 때문에 생명을 잃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두 아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준비는 다 끝났다. 나와 아내는 함께 울었고 두 아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예배를 마쳤다.
5. 다른 선교사들의 경험
사례 1
나의 교단 선배 선교사 한 사람은 8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매를 맞고 끊임없이 같은 것을 물으며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정신적 고통이 되었는지 한국에서도 이따금 가위에 눌리면 숨을 쉬지 못하고, 갑자기 심장이 멈춰 격렬한 고통을 받다가 한참만에야 숨이 돌아온다고 한다. 내가 알기에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선배 선교사는 아직도 그 고통을 당하고 있다.
사례 2
나의 후배 선교사는 부부가 눈이 오는 날 함께 잡혀가서 따로 심문을 받았다. 의자에 쇠고랑이 있어 양팔을 묶어 놓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데 그것을 선교사에게 보여 준 것은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물은 것을 또 묻고, 또 물으며 부부를 극도의 불안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 아들은 부모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웃집에 숨어 있었는데 집에 물건을 가지러 들어갔다 나오면서 자신이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뒤로 걸으며 눈에 난 발자국을 지우며 걸었다고 한다. 어린아이 마음에까지 남는 아픔들이 그 겨울에 녹지 않는 눈처럼 선교사와 그 가족의 마음에 쌓였다.
사례 3
미국 남 침례교 교단 소속의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가 최근에 안전부 요원에게 잡혔다. 그들은 이 선교사를 24시간 동안 심문했다. 최근에 중국과 미국의 무역 전쟁 때문인지 안전국(국가안전국) 요원들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의 간첩으로 몰고 가려고 한 모양이었다. 선교사가 끝까지 거부하자 그들은 결국 포기하고 선교사의 집으로 가 5분 동안 짐을 챙기게 한 후 가장 먼저 이륙하는 비행기에 태워 추방했다고 한다. 홍콩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와 있는 이 선교사는 지금도 울고 있다고 한다. 계속 울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또 눈물이 난다. 몇 달 지나서 이제 눈물이 좀 그치나 싶었는데 괜히 이런 글을 써서 다시 심장이 쓰리고 눈물 나는 병이 도졌다.
<cjzhao@daum.net>
글 | 조용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의 GMS 선교사이다. 하와이에 등록된 복음주의 신학교인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 Pacific (AGST-Pacific)에서 ‘Ph.D과정’을 하고 있고, 중국에서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통한 중국 선교를 계속해서 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