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 증명1: 필요성

신 존재 증명1: 필요성

2019-11-21 0 By worldview

신 존재 증명1: 필요성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기독교 변증의 약화

 

현대 기독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실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변증학(apologetics)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시즘이나 진화론 등을 비롯한 이념 체계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여과 없이 강력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각종 언론 매체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표현되는 데 반하여,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기독교계의 이론적 변증은 크게 위축되어 왔다. 그 결과는 매우 처참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초중고등부 주일학교에서 복음으로 교육받아 온 순수한 기독청소년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과 조롱을 난무하는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변증이 거의 없는 대학문화 속에 들어가면 상당수가 신앙을 잃거나 심각한 회의에 빠져 방황한다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변증적 노력이 약화된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대의 시대사조, 현대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 그리고 도덕적 행동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현 시대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요약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 나아가서는 이성의 보편적 진리성을 거부한다. 이성의 보편적 진리성을 거부하는 한 이론을 통한 변증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가 사실은 매우 위선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구조 전체가 실제적으로는 합리주의의 기반 위에 서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너무나 무력하여 이 기반은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이성비판은 개인의 도덕적 인식과 결단의 영역 정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현대자유주의신학은 청중들이 기독교교리에 대하여 반감을 보일 경우에 기독교교리의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변증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청중들의 반감을 그대로 받아 들여 기독교교리를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변증학이 전혀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신학의 교육과정에서는 변증학이라는 과목 자체가 없으며, 변증학을 엉뚱하게 정치적으로 곡해하여 기독교가 자신을 제국주의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음모로 간주하여 경계하기까지 한다.

도덕적 행동주의란 도덕의 진정한 의미는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이론이 기독교에 들어오면 기독교가 진리임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은 실천이지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어느 기독교철학자이자 윤리운동가는 이론적인 변증을 통하여 기독교를 설득시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천만이 기독교를 설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론적 변증을 아예 무시해 버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실재하심에 대한 이론적 변증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학자로서 성실하지 못하고 게으른 태도로서, 성경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선교전략상으로나 기독교교육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잘못된 것이며,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키는 주범이다.

 

기독교 변증의 필요

 

먼저 성경을 살펴보자.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 본문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두 차례에 걸쳐서 강조한다. 첫째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은 신 인식 능력을 가리킨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가 만드신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만물”은 자연 혹은 우주를 가리키지만 이 안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인간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로마서의 본문은 모든 인간 안에 신 인식 능력이 있음을 명확하게 말한다. 이 본문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타락한 이후의 인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타락한 이후에도 모든 인류에게는 신 인식 능력이 있다.

이론의 구성은 주로 이성을 통하여 수행되는 인간의 문화 활동이며, 인류문화 활동의 핵심이다. 인류문화 활동의 핵심을 좌우하는 기능인 이성 안에 신 인식 능력이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타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이성적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타당할까? 당연히 전자가 더 타당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설명하는 것을 무조건 비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없다고 예단하는가? 온 인류의 마음에 신 인식 능력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기독교 학자들은 이성적 활동을 통하여 신 존재 증명 논리를 개발하고 신 존재 증명을 전개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아야 하며, 이론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공격하는 자들이 걸어오는 논쟁을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참여해서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야 한다. 기독교학자들이 이것을 피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신앙과 학문을 이원화시키는 것이며, 학문적인 게으름의 소치다.

 

왜 우리는 신 존재 증명을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가 이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하는 목적은 불신자를 감동시키고 변화시켜서 거듭난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신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론보다는 실천이다. 또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주체는 성령이시며, 도구는 성경말씀이다. 이론적인 신 존재 증명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러면 이 시도를 왜 해야 하는가? 이 시도를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이며 곧,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이 살아 있는 진리라는 사실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불신자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아니하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신자들이 받아들이는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과 복음의 증인들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계시도 진리임을 증언하는 중요한 부분의 문화적 소명 의식도 인식해야한다.  논쟁이 필요하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말로 싸워야 한다. 그래서 무신론이 팽배하는 현장에 기독교 변증가가 용기 있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론적으로 맞장을 뜨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 더 타당한지, 아니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 더 타당한지 한 번 이론적으로 맞장을 떠 보자!”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상대방은 당연히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서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변증적 논쟁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는 교만한 불신자들의 고집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복음전도의 여정에 있는 장애물 하나를 제거하는 데 유익하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대학문화에 들어온 믿는 대학생들이나 믿는 평신도 신자들에게 아주 큰 힘과 위로와 버팀목이 된다. 반기독교문화가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미국 철학계에 알빈 플라팅가(Alvin Platinga)라는 한 사람의 기독교 철학자가 들어가서 꾸준히 변증 활동을 한 결과 미국 철학 교수들의 30%가 기독교 철학자로 채워졌다는 놀라운 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론적 논증은 초 신자를 포함한 평신도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이 복음전도를 듣고 감동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 신자의 삶을 시작할 때는 감정적인 요소들이 강하게 작용하며, 먼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느끼고 그대로 본받고 싶어 하면서 출발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의문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은 믿는데 그 증거가 과연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동정녀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부활 시에 입게 되는 몸은 어떤 몸일까? 등등 이성적인 설명이 필요한 많은 의문들을 갖게 된다. 이런 의문들을 갖는다는 것은 이 평신도의 신앙이 한 단계 올라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의문들이 일어날 때 이론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설명을 해주어 납득이 되면 막힌 하수구가 뻥 뚫려서 물이 원활하게 흐르는 것처럼 신앙의 흐름이 원활하게 잘 흐르면서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힘차게 앞으로 쭉쭉 전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의문들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으면 하수구가 막혀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인 채 썩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도약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바로 이런 평신도들에게 신 존재 증명을 잘 설명해 주었을 때 자신들이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면서 신앙이 크게 도약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또한 평신도들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직장에서 불신자를 만나 대화할 때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한 번 말해 봐라”는 요구에 직면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말문이 막혀서 당황하고 답답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이 칼럼을 이용하여 몇 차례에 걸쳐서 몇 가지 유형의 신 존재 증명들을 순차적으로 소개할 계획이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M.)와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Th.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톤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