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의 3‧1운동

2019-03-06 0 By worldview

성결교회의 31운동

 

월드뷰 03 MARCH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7

 

박창훈/ 서울신학대 교수

 

동양선교회의 찰스 카우만

 

3·1운동과 관련된 성결교인의 활동을 밝히는 자료 가운데 하나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대표인 찰스 카우만(Charles Cowman)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와 함께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일본과 한국에서의 동양선교회의 전반적인 사역 자체가 어려워질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카우만은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미국 정부에 전하려고 하였고 3·1운동에 대한 탄압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서울 시내에 위치한 성결교회의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학교는 휴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성서학원의 원장 존 토마스

 

실제로 학생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가담으로 인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원장이었던 존 토마스(John Thomas)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편지의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3·1운동을 ‘무저항 혁명’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3·1운동이 단순히 만세 운동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내용이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같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실제로 제정 대한제국 이후에 시민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적었다. 토마스는 당시 한국의 상황을 식민 체제를 넘어, 시민 의식이 표현되었다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고 있으며, 한국이 봉건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시민 사회로 재편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편지는 위에서 밝힌 경성성서학원의 상황과 함께 강경(Kinsen)에서의 선교가 어렵게 되었다는 보고를 담고 있다. 3월 20일 오후 4시경 토마스 일행이 성결교회가 신축한 강경의 전도관을 시찰하며 둘러보는 사이, 권총을 든 군인과 순경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때리고,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찼다. 토마스 일행은 경찰서로 끌고 가려는 순경에게 여권과 여행 증명서를 보여주었으나, 순경은 그것들을 땅에 던져버리고 토마스를 넘어뜨려서 머리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함께 있던 일행들을 구타했다. 경찰서에서도 일행을 발로 차고 때리기를 계속했는데 나중에 토마스가 영국인임을 안 경찰서장이 사과를 하였으나, 이 사건을 실무자의 단순 실수로 은폐·왜곡하려는 일본 경찰에게 그는 끝까지 외교적인 문제로 해결을 요구하여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외교적으로 일제와 가까웠던 영국의 선교사를 미국 선교사로 오인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일제가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을 3·1운동 배후자로 의심하고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후에 미국으로 간 토마스는 계속해서 한국 교회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하였고, 자신이 받은 보상금 일부를 강경교회의 건축을 위해 헌금하였다.

존 토마스 선교사

 

철원 만세 사건과 곽진근

 

토마스가 편지를 통해 3·1운동에 가담하여 아직도 구금 중이라 밝힌 경성성서학원 학생은 곽진근이었다. 곽진근은 1861년 생으로 1909년에 무교정전도관에서 회심한 후, 1915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과부의 몸으로 전도 부인으로 나선 곳은 강원도 철원의 전도관이었다. 1919년 3월 철원에서 3·1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곽진근은 이미 58세였기에, 카우만에게 전달된 편지에도 ‘나이든 곽씨 부인’(old Mrs. Quack)이라고 언급되었다. 3월 10일에 북간산(北看山)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준비한 학생들은 서문 거리에 이르렀을 때는 250여 명으로 불어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같은 때 일반 군중과 청년들이 군청에서 모여 헌병 분견소까지 진출하여 만세를 불렀는데, 이때 500여 명과 함께 무리를 인도한 사람들 가운데 곽진근이 있었다. 특히 곽진근은 군중들과 함께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에 가서 이완용과 그 부인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작은 체구임에도 당찬 요구를 한 것이 후에 기소 내용이 되었다. 그 다음날 3월 11일 7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읍에서 4km나 떨어진 철원 역에 모여서 독립만세운동을 했고, 이 날의 주동자 가운데 곽진근이 있었다.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을 상대로 만세를 불렀던 군중은 다시 철원 읍내로 향했는데, 이때 기마를 탄 헌병들이 총을 쏘며 시위를 진압하였고 곽진근은 다른 여성 6명과 함께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그 해 내내 재판을 받고,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에 10원의 과료(科料)형을 판결 받았다. 1995년 곽진근은 공훈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나, 남성으로 오인되어 지난 20년 동안 후손을 찾지 못하고 ‘훈장 미전수자 명단’에 올라있다.

 

남대문 만세 운동 참여자 김승만

 

김승만은 카우만이 전한 편지에서 수감된 성서학원 학생 가운데 한 명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평남 강서군 쌍룡면 창포리에서 1897년 출생한 김승만은 1917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0년 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다. 3·1운동은 그가 3학년으로 재학하고 있을 때 발발하였다. 3월 1일 당일 그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3월 5일에 있었던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앞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학생들이 중심이 된 남대문역 앞의 시위는 4-5,000명이 참여하였고, ‘조선독립만세’라는 깃발을 앞에서 들고 행진하였다. 붉은색 천을 흔들면서 시내 쪽으로 행진하자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군인과 순경들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학생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흩어지지 않았고 이들 가운데는 ‘조선독립신문’을 뿌리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들은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의 당위성을 성토하며 대한문까지 진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군경에 포위된 시위대 가운데 연행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 가운데 김승만이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김승만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에 대한 죄명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주동자들이 들고 나누었던 태극기와 붉은 천, 그리고 유인물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김승만은 미결 구류 90일을 합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한국 성결교회의 개척자 김상준의 만세 운동

 

한국 성결교회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상준은 1917년 성결교회를 떠나 순회 부흥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3·1운동을 맞았다. 김상준의 사촌이 후에 임시 정부의 요인이 되었으며, 임시 정부의 법부에서 일하던 김봉준과는 6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김상준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상준은 밀양으로 내려가서 밀양교회를 개척한 강시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강시영은 김상준의 고향 친구로서 김상준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김상준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강시영은 경성성서학원 사감과 아현교회 교역자를 역임하였다. 당시 강시영의 고향인 평남 용강에서 내려온 애국지사들과 일본 순경의 감시를 피하여 방안에 볏섬을 쌓은 후 촛불을 켜놓고 회의를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밀양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상준은 이에 함께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로 인해 김상준과 강시영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1920년 초 중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성서학원의 원장이었던 윌리엄 헤슬롭(William Heslop)이 석방을 교섭하였고 결국 헤슬롭 원장이 신원을 보증하는 것을 조건으로 출옥할 수 있었다.

 

경북 영덕의 김응조

 

김응조는 3·1운동 당시 경성성서학원 학생이었다. 김응조는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감리교신학교와 경성성서학원 대표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서울로 여행을 온 사람의 행세를 하고, 오전 8시에 남대문에 모여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파고다 공원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순경들의 추적에 칼에 맞을 위기를 모면하고 바로 남대문의 지물포로 숨어서 체포되는 것을 피하였다. 학교로 돌아온 김응조는 경성성서학원 학생들 중 체포되어 투옥된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프랑스 대사관 앞의 시위에 다시 참여하였다. 강화회담이 열리는 파리에 이 독립운동을 알려달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프랑스 영사는 나와서 손을 흔들며 알았다는 뜻을 전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자, 김응조는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인 경북 영덕의 영해로 내려갔다. 그러나 집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형사에게 연행되었고 병곡 주재소에 연금되었다. 그날이 장날이라 요주의 인물을 미리 검거한 것이었으나, 장날에 모인 군중들은 보통 때보다 더 불어나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결국 순경들도 관서를 비울 정도가 되었고, 무기만을 가지고 산으로 피하면서 동태를 파악할 뿐이었다. 그러자 급보를 접한 대구 수비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고, 결국 시위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체포되거나 투옥되었다. 그 후 김응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선동자로 지목이 되어 대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김응조는 9월까지 반 년 정도를 감방에서 지내면서 취조와 재판을 받았다. 그는 4년 구형에 1년 반의 형을 선고받고 기결수가 되었다. 기결수가 된 그는 낮에는 파나마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밤에는 200여 명이 함께 잠을 자는 감방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였는데, 그는 이것이 전도를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고 기억하였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며 전도를 하면서 성실하게 형을 살고 있던 김응조는 기결수로 수감된 지 반 년(미결 반년, 기결 반년 도합 1년)만인 1920년 4월 영친왕(이은)과 방자 여사의 결혼 특사로 풀려났다.

 

부산 동래 만세 운동과 김기삼

 

김기삼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는 1918년 동래 복음전도관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맞았을 때는 동래고등보통학교 3학년이었다. 부산에는 서울에서의 3‧1운동 이틀 후에 독립선언서가 교회들에 보급되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가 동래고보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함께 참여할 것을 건의하자 김기삼을 비롯한 동래고보 학생들은 참가를 결의하고 독립선언서 500매를 인쇄하여 3월 13일 동래읍 장날에 맞추어 독립만세기, 태극기 그리고 ‘오왕약살(吾王藥殺)’라고 쓴 유인물을 준비하였다. 오후 2시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도 만세 소리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기마 경찰과 군인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시위대를 연행하였고, 이때 김기삼과 함께 21명의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김기삼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이 사실로 인해, 199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천안 만세 운동의 한도숙

 

후에 김기삼의 부인이 되는 한도숙은 1919년 3월 1일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18세이었고 졸업을 21일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인 민원숙, 황현숙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만들어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계획하였다. 3월 20일 천안 장날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오전 10시 전교생에게 태극기를 나누고 장터로 행진하자, 인근의 교인들과 직산금광 광부 수백 명, 그리고 인근 10개 마을 주민들도 합류하여 만세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한도숙은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과 취조를 거친 후, 재판을 받고 2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옥중에서 한도숙은 유관순 열사를 만났으며, 10여 명의 여성 열사들과 함께 고초를 당했다.

 

대동단의 이성봉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태어난 이성봉은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을 위해 ‘대동단’이라는 독립 단체에 가입했다. 대동단은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군자금을 모금하며 비밀 결사를 위해 좁은 산중에 혹은 골방에서 비밀회의를 갖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성봉의 활동이 탄로 나서 1919년에 검거되었지만 그가 중병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한 순경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를 감시하였다. ‘대동단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동안에 큰 병치레를 했던 이성봉은 5일 유치장 수감 외에는 더 이상 옥고를 치르지 않고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이성봉은 1925년부터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로 거듭났다.

 

맺음말

 

이상의 자료를 통해 성결교회의 3‧1운동 참여는 다음과 같은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3‧1운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당한 억울함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3·1운동의 성격을 아주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주권의식을 ‘비폭력’(passive)을 통해 드러냈다는 의미에서 ‘혁명’(revolution)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서는 한국인들의 행동을 ‘정변’(uprisings)으로 보았다. 이는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서는 시대적 통찰이었다. 둘째, 성결교인들의 3·1운동 참여는 전국적이었다. 이는 각 개인의 고향이 다양했다는 점과 아마도 선교지 분할 정책(Comity)에서 성결교회가 제외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셋째, 성결교인들은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을 통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당연히 교회였다. 이들은 교회에서 서울로부터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롯한 자료를 전달받았고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 외에도 선교회, 학교 동문, 동향(향우회), 여성 단체, 정치 단체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은 개인들의 정치·사회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었던 매개체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민족의식은 구체적으로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며 참여하는 행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성결교인 가운데 당시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참여한 젊은이와 여성들이 기독교 교육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었고, 그만큼 정의에 대한 결단에 앞장설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모순과 질곡이 있는 일제의 무단 정치라는 현실에 굴복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이들이었다.

<changplushyo@stu.ac.kr>

 

 

박창훈 |

서울대학교 철학과(B.A.)를 졸업하고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친 후. 미국 Duke대학교(Th.M.)와 Drew대학교(M.Phil.과 Ph.D.)에서 공부하였다. 온양에서 목회를 한 후 현재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