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감리교의 참여
2019-03-063.1운동과 감리교의 참여
(이필주, 김진호 목사를 중심으로)
월드뷰 MARCH 2019●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6 |
서영석/ 협성대학교 교수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독립 만세 운동으로서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국적으로 총 봉기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고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 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으며,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기독교는 개항 이후 협성회나 독립협회의 민권·국권 운동으로 애국 계몽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어 상동청년학원 등 민족계 기독교 학교들이 설립되어 신앙심은 물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이어 을사늑약 반대 투쟁 운동 및 신민회의 비밀 결사 운동, 나아가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에 이르는 일련의 민족 운동을 이끌어간 중추 인사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교세는 전 인구 1,700만 명 중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작은 교세를 가지고도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측 인사가 16인이나 참여했다는 사실은 교회가 얼마나 신실한 지도자들을 품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특히 감리교회는 개화 초기부터 천부인권 사상을 가르쳤고,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일찍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배웠고 구국 기도회를 전개하거나 국권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3.1독립운동에 감리교회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3.1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굉장한 용기를 주었다. 또한 3.1운동은 자유, 정의, 정직 등 기독교 본질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저항 의식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성서적 신앙으로 만세 시위를 했고 교회는 만세 운동 중에 3시 기도, 주일 금식, 매일 성경 읽기 등 지켜야 할 수칙을 정했다.
3.1운동의 감리교의 역할과 배경
3.1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거족적인 민족 운동 차원에서 정치, 사회운동으로만 인식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참여하였다.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도 재판 과정에서 민족 독립이 하나님의 뜻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서울 중앙교회의 김창준 전도사 역시, 민족 대표로 서명한 이유가 기도하면서 확신한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혔다. 또한 민족 대표였던 이필주 목사는 다수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에도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았고 신앙에 근거한 나라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다. 신석구 목사 역시 3년 투옥 생활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분단의 아픔을 경험하며 20세기 우리 역사의 암울한 질곡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도 올곧은 목회자의 자세를 가지고 변절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순교하기까지 민족과 교회에 희망을 준 신앙인이었다. 이와 같이 3.1 운동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인 동시에 신앙의 신념에서 나오는 종교 행위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3.1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의 적극적 참여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은 폭압적인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 기독교계의 민족의식이나 애국 신앙으로 인한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의 이유였고 3.1운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민족 문제와 독립 사상을 강조해왔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2년 만에 돌아올 때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정동교회의 아펜젤러 목사 집에 머무르며 정동감리교회를 다녔다. 또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감리교인 윤치호와 교류하며 감리교 삼문 출판사를 통해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나아가 배재학당의 교사가 되어 그곳에서 학생 중심의 토론 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였다. 이상재, 정교, 윤치호, 남궁억, 이승만, 안창호, 신흥우 등의 애국지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독립신문 발간, 협성회, 독립협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수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이 활동을 통해 배출되었다. 또한 1900년대 초,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가 중심이 된 ‘상동파’가 있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대거 상동교회로 모이면서 일제하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상동파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3.1운동의 계획과 전개 과정에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거나,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 단체의 요인 중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점은 당시 상동파의 영향력이 컸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국내에 남아 상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진호·이필주·최성모 등으로 상동교회에 입교하여 모두 목사가 된 분들이고 후에 3·1운동 때 전덕기 목사의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3·1운동 계획과 그 참가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이필주와 최성모는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했으며, 김진호는 배재학당 학생들의 동원과 외국 공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이들 모두는 혹독한 옥고를 치렀으나 일선에 나서서 목회와 민족 운동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활약했다. 3.1운동 당시의 감리교 인사들의 만세 운동 및 항일 활동이 많았고 3.1만세운동으로 피해도 크게 있었지만 이 글에서는 이필주 목사와 김진호 목사의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필주와 김진호 목사의 3.1운동 역할과 참여
이필주는 구한말 구 한국군 출신인 인물이다. 후에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상동파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며 교육받고 훈련받은 신앙인이었고 목회자였다. 당시 상동교회 주위에 생명을 건 동지들이 모여 국권 회복을 논의하고 나라를 살리는 방안을 모의하였는데 이필주도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로 활약하며 여기에 끼어 상동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특히 이상재, 최병헌, 최성모, 오화영, 신흥식, 박동완, 손정도, 현순 등과 함께 활동하였는데 이들과는 서로 깊은 신뢰 관계를 맺었고 뜻을 같이 하였다. 이필주가 상동청년학원에 교사로 재직 시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과 배일사상을 머리에 넣어주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체육 교사로 가르치며 군사훈련을 이끌어 간 것은 이필주와 상동파의 변절치 않는 애국정신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결국 상동교회를 통한 훈련과 나라 사랑에 대한 정신이 그가 목회 선상에 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 대표로 활약하고 투신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필주는 변절치 않는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영적 경험에서 나오는 나라 사랑 정신과 희생정신을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미 감리교 배재학교의 이사 겸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필주는 배재 학생 간부들과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다. 특히 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로서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19년 3월 5일 시위에서 배재 학생 18명이 체포됐고 이어 이필주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법정에서 취조를 받을 때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의 힘이 있는 한 조선의 독립에 다 함께 노력하자.”라고 강력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결연한 나라 사랑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당시 정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필주는 모진 핍박과 감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갔고 옥중 생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굳은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수 없었는데 이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였고, 의의 최후의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 후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된 당시 재판정에 서서 명 판사로 이름 날리던 재판장에게도 왜놈이라 부르고, 우렁차게 거침없이 답변하며 재판정을 휘어잡을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철저하였던 이필주는 기도드릴 때마다 조국 광복과 독립을 주님께 간구하는 것을 한 번도 빼놓은 적이 없었다.
또한 김진호 목사도 상동교회에서 훈련받은 인물로서 신민회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그는 1916년 3월부터 배재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제군들은 자기 몸만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요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 몸을 주시고 나를 교육하시는 줄 믿으라”면서 “나의 한 몸의 성패에 곧 나라의 흥망이 달렸다고 생각하라”라고 강조하였다. 또 배재학생기독청년회를 지도하여 학생들을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배재학생기독청년회 임원과 회원들이 학생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르는 희생도 당하였다. 김진호는 1919년 3.1운동 때 서울 시내 학생들과 민족 대표단을 맺어주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였다. 당시 정동제일교회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필주 담임목사의 부탁으로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진호 목사는 비밀을 요하는 이 일을 위해 배재학교의 믿을 만한 제자인 오흥순, 김동혁, 장용하 등을 선택하여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중국, 러시아 등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하였다. 또 배재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3월 3일에는 학생들을 통해 독립운동 유인물 ‘국민회보’를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만세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동료 교사 강매 등과 함께 ‘시민대회 취지문’,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 같은 유인물을 만들어 서울 시내에 배포하였다. 결국 이 활동으로 김진호는 3월 1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배재학교 1학년에 재학하던 그의 아들, 김택영이 현장에서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부자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김진호 목사는 경찰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이필주 목사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과 관련된 질문은 모두 부인하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씌워진 독립운동 혐의는 당당하게 시인하였다.
감리교회는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담하게 역사에 참여해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원에도 적극적으로 힘쓰는 역사적인 감리교회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며 3.1운동과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애국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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