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기억
2024-08-26월드뷰 AUGUST 2024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VIEW 1
조혜경 (소설가)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딸의 아토피 극복기>, <멀리 있지 않은>,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 출판사 지혜의언덕 대표이다.
글을 쓰다가 주방으로 나갔다. 어? 무엇 하러 나왔지? 주방으로 가는 몇 걸음 사이 목적을 잊어버렸다. 잠시 서서 마른 세수를 하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상투 틀 듯 잡았다 풀어보기도 하고 두 눈에 힘을 주고 깜박여도 본다.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행동을 반복하면 생각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다시 주방으로 나갔다. 멍청하게 서 있자니 얼마 전 읽은 시구절이 떠올랐다.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중략)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 이성진, ‘아내와 나 사이’ 중에서
부모님도 노년에 잦은 망각에 관해 말씀하셨다. 지하철 정거장까지 갔는데 보리차 끓이던 불을 끄지 않은 것 같아, 아파트 문을 잠그지 않은 것만 같아 되돌아가기를 몇 번 하신다는 것이다. 집에서 지하철 정거장까지의 거리가 두 분에겐 짧지 않은 거리다. 되돌아갔을 때 가스불이 켜져 있거나, 현관문이 잠기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고 물으면 그런 적은 없다고 하시면서도 “그런데 도대체 껐는지 잠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으니 헛걸음을 하더라도 확인을 해야 안심하고 나갔다 오지!”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이 멀리 외출하시는 일이 협심증 전력이 있는 아버지의 심장을 검사하기 위해 종합병원에 가거나 친척들의 애경사에 다녀오시는 일이니 한나절 이상 집을 비우실 것이고, 그러니 확인은 하셔야 할 터였다. 족히 사오십 분을 길에서 헛걸음하셨을 일이 안타까워 나는 말하곤 했다.
“습관의 관성을 믿어봐요. 평생 해오신 일이니 무의식중에 엄마는 할 일을 다 하실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여 빈집에 불이라도 나는 참사가 벌어질까 봐 부모님이 외출하시는 날에 나는 아침 일찍 전화해서 꼭 확인하고 나가시라고 당부하곤 했다.
이제 내가 망각을 염려한다. 주방에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에 약 먹는 것을 곧잘 잊어버려 식탁 유리 밑에, 찬장 문에, 그릇장에 검정색 고딕체로 크게 뽑은 ‘약’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았다. 그러고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려 쓰레기통에서 빈 약봉지를 확인하는 내가 한심해 이제 빈 약봉지를 식탁 한쪽에 저녁까지 둔다. 작년 여름엔 수련회 마치고 곧바로 다른 교회 설교를 위해 입고 가야 하는 남편의 양복을 잘 챙겨 소파 위에 두고 들고나오는 것을 깜빡했다. 토요일 저녁,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가평 산속의 수양관에서 집까지 갔다 와야 했다. 이즈음은 신용카드가 끼워져 있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일이 다반사다.
남편의 망각은 나보다 심하다. 연구실로 얻은 오피스텔의 북쪽 창에서 매운바람이 들어온다. 첫해, 겨울 준비를 위해 전기스토브를 주문하면서 걱정이 앞섰다. 깜빡깜빡 잊기 선수인 남편이 스토브 불을 제대로 끄고 다닐까?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남편이 긴 시간 외출한 빈 사무실에 혼자 벌겋게 달아 있는 스토브를 몇 번 발견하고서 나는 초등학교 때 그려봤던 포스터(?)를 한 장 그렸다. 붉은 색연필로 활활 타는 불꽃을 칠하고 ‘스토브 불 끄셨나요?’라고 적어 현관문 눈높이에 붙였다. 조악하고 직설적인 그림에 방문객은 나가면서 보고 한 번씩 웃는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다.
망각이 늘 고약한 것만은 아니다. 다람쥐의 망각은 외려 숲을 이룬다. 다람쥐는 제가 땅에 묻은 도토리의 70~95%는 찾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한때 다람쥐가 볼 주머니에 알밤을 쟁이는 광경을 오래 지켜본 일이 있다. 양껏 넣어 풍선처럼 부푼 얼굴을 하고 다람쥐는 날 듯 어디론가 달려간다. 그리곤 다시 바람처럼 달려와 또 양쪽 뺨에 먹이를 쟁이고, 달려가고, 달려오고…. 작은 생명체의 열심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나 정성스레 비축한 식량 대부분을 다람쥐는 찾지 못하는 것이다.
참나무 한 그루에 작게는 삼백 개에서 많게는 만 개의 도토리가 열리고,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같은 참나뭇과 나무가 만드는 열매는 몸집이 토실해서 바람을 타지 못하고 나무 아래로 툭툭 떨어진다. 다람쥐는 땅에 구르는 도토리를 입에 물고 좁게는 수십 미터에서 넓게는 수 킬로미터까지 이동하고 참나무가 자라는 곳보다 더 높은 고지대까지 올라간다. 다람쥐가 숨겨놓고 찾아내지 못한 식량 대부분은 멧돼지나 곰 같은 포유류의 먹이가 되고, 포유류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것은 씨앗으로 싹을 틔운다. 그렇게 나온 어린 싹도 모두 성숙한 나무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새싹은 봄철 어린 싹을 뜯어먹는 초식동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고 산불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한다. 다람쥐가 숨긴 식량 중 겨우 10% 남짓에서 싹이 트고 그중에서도 일부만 살아남지만, 참나무가 만들어주는 도토리의 양이 워낙 어마어마하기에 종내 참나무는 숲의 주인이 된다. 그래서 삼림 생태 연구가들은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참나무, 그 열매를 묻어두고 다 찾아가거나 기억하지 않는 다람쥐에 대하여 ‘다람쥐의 건망증이 숲을 살린다.’라고 말한다. 시인의 다람쥐 건망증 예찬이 과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다.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 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울음 소리,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파묻어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손택수,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중에서
우리도 다람쥐처럼 치열하게 저장하고 태평하게 잊을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은 평생 남아 설움이 되고 마침내 화인처럼 가슴에 박혀 한이 되기도 한다.
딸만 셋을 두신 외할머니는 섞바꾸어 낳았으나 채 돌이 되기 전에 죽은 세 아들을 끝내 잊지 못하셨다. 평소 유쾌하게 지내시다가도 친지의 혼인집에서 반주라도 한잔하고 오신 날은 마루 끝에 앉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서성이시던 할아버지. 나의 시어머니도 해마다 6월이 되면 병이 나 드러누우셨는데, 생때같은 스무 살 아들이 6월 저수지에서 수영하다 변을 당한 연유였다. 누구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기억들을 블록을 치고 딜리트 키를 누르듯 완전히 삭제할 수 있다면….
작년에 가까운 친척이 돌아가셨다. 아기가 생기지 않아 남편과 둘이 사셨고, 남편이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뜨셨다. 홀로 남은 분을 내 사촌 언니가 곁에서 돌봐드렸다. 당신의 죽음을 예감했던지 돌아가시기 이틀 전 예금통장을 주시면서 부탁하셨단다. 장례식장은 따로 차리지 말고, 집과 물건을 잘 정리해달라고. 그래서 잘 보내드리고 연락한다며 사촌 언니가 내게 전화로 소식을 알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모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어떤 분에 관한 얘기였어. 평생 한 사람을 잊지 못하고 마음에 두고 사셨대. 그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한 것이 그렇게 한이 되신대. 요즘엔 더 그분이 생각나 매일 밤 그분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드셨대. 그분과 결혼했으면 아기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말씀도 하시고…. 더 말씀하고 싶어 하는데 그날 내가 시간이 바빠 그냥 왔는데, 그게 끝이었네.”
86세에 노환이 있으셨으니 소천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사촌 언니가 덧붙여 전한 말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묵직한 징의 울림처럼. 60년도 더 지났을 청춘의 기억을 끝내 흘려보내지 못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타까움으로 토로한 그리움이라니…. 나는 산책할 때마다 한동안 생각이 났다.
나는 어떨까? 생의 끝에 이르렀을 때 나의 마음은 어떨까? 끝내 털어버리지도 잊지도 못한 어떤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을까? 한 원로 작가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라고 느낄까? 신앙의 선배인 노 권사님처럼 ‘모든 것이 감사하다.’라고 고백하게 될까? 시인의 표현처럼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 본향에 돌아가 주를 뵈올 때 내 마음에는 무엇이 남아 있으며, 나를 맞이해주시는 주님은 그때 나의 무엇을 기억하실까?
주일 아침, 교회로 출발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남편의 차는 늘 멀리 주차되어 있다. 어디 주차했는지 기억을 뒤적이느라 주저하는 평소의 발걸음과 달리 자신 있게 앞서 걷던 남편이 차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지고 있다. “차 키?”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에게 눈을 흘길 틈도 없이 나는 가방을 건네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선다. 남편의 소리가 뒤따라온다. “바지 호주머니에서 지갑도!” 뭐, 이 정도쯤이야!
시인의 판단을 다 인정하여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뛰어노는 다람쥐는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린다 치고, 최대속도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진하는 나는? 빈 호주머니로 서 있는 남편은? 전두엽의 저장 공간 부족으로 스위치가 내려질지도 모를 과부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해야 할까? 어쨌거나 나도 다람쥐처럼 날 듯 달려간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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