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올 때, 우리는 (1)
2024-07-29김현경 (경인교육대학교 외래교수)
성균관대학교 아동학과 아동미디어 교육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육학과 부설연구소 the PLACE에서 방문연구자를 역임하였다.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유아교육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앞표지를 보면 한 남자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오른쪽으로 뛰어가고 있다. 아이 주변으로 나뭇잎이 뒹굴고 나무들이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아 제법 센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풍이 찾아온 날”이라는 제목과 함께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니, 아이가 태풍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려고 열심히 달리고 있음이 짐작된다.
표지를 넘겨 앞 면지를 보면 예닐곱 개의 구름을 볼 수 있다. 먹색으로 커다랗게 그려진 구름은 금세라도 비를 쏟을 것만 같다. 제목이 쓰여진 표제지를 지나 헌정 페이지로 오면 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맨 왼쪽에는 등대가 있고, 면지에서 봤던 먹구름은 오른쪽을 향해 오고 있다. 바닷가 작은 마을 위로 갈매기와 새들이 날아다니고 나무는 세찬 바람에 흔들린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대부분이 남색 또는 먹색으로 그려졌는데 유독 눈에 띄는 두 집이 있다. 주황색 집과 그 이웃인 푸른색 집이다.
헌정 페이지를 넘기면 본문이 시작된다. 앞서 눈에 띄었던 두 집이 가까이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특히 주황색 집에서는 여자아이가 다락방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고양이와 창밖을 보고 있고, 지붕 위에는 고래 모양의 풍향계가 바람에 뱅글뱅글 돌고 있다.
이 책의 글은 그림책 장면을 넘길 때마다 주거니 받거니 질문하고 답하며 진행된다. 예를 들어, 본문 첫 펼침면에 “풍경이 딸랑딸랑, 바람개비가 뱅그르르. 멀리서 구름이 몰려오면 너희는 뭘 해?”라고 질문이 나온다. 다음 펼침면에서는 ‘우리’가 질문에 답을 한다.
이때 질문에 답을 하는 ‘우리’는 다양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다가오는 우르릉 소리를 듣는 ‘우리’는 여우들이고, 가만히 지켜보며 킁킁 냄새를 맡는 ‘우리’는 다람쥐들이다.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태풍에 대비한다. 사람들은 집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확인하고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고양이는 편안한 곳을 찾아 쿠우울 쿠우울 잠을 자기도 한다. 태풍이 올 때 동물도 사람도 날씨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보며 준비한다.
풀이 일렁이고 나무가 휘청이며 하늘이 회색으로 변하면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는 표지에서 보았던 남자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집을 향해 뛰어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푸른색 집 앞에서 아이의 엄마는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책장을 넘기면 제비들은 “우리는 처마 밑에 모여.”라고 대답하고, 나비들은 “우리는 튼튼한 나무에 앉아 쉬어.”라고 대답한다. 벌들은 바쁜 일을 잠시 미루고 집으로 돌아가 숨고, 토끼들은 작지만 든든하고 안전한 통나무에 들어간다. 물론 남자아이 역시 강아지와 함께 안전하게 집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도 동물도 모두 안전한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바다에서는 어떨까? 파도가 거세고 부표가 마구 흔들릴 때, 놀랍게도 갈매기는 태풍을 타고 난다. 그리고 작은 섬을 찾아 그곳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고래와 물고기들은 태풍을 피해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사람들은 배를 단단히 걸고 묶으며 대비한다. 또 의자와 파라솔, 방석 등 정원에서 쓰는 물건을 안으로 들여놓는다. 동물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태풍을 피하고 태풍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리는 반면, 사람들은 배와 생활 도구들을 책임감 있게 미리 관리하여 태풍에 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제 정말로 태풍이 바닷가 작은 마을 위를 지나간다. 천둥 번개가 치고, 대문과 덧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캄캄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면 토끼들은 통나무 속에 웅크린 채 밖을 바라보며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사람들은 촛불을 켜고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체스 게임을 한다. 그리고 후드득, 보슬보슬, 퐁퐁, 톡톡, 다양한 소리를 내는 빗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 보면 태풍이 지나가는 시간이 꼭 두려움으로 가득 차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족과 더 가까이 둘러앉아서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또,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드디어 태풍이 지나가고 해가 나오며 온 세상이 고요해진다. 그림을 보면 하늘에는 먹구름을 가르고 태양이 말갛게 얼굴을 내민다. 물결이 잔잔해지고 마을 곳곳에는 쓰러진 나무와 물웅덩이들이 보인다. 글에는 “태풍이 물러가면 너희는 뭘 해?”라는 마지막 질문이 쓰여 있다. 책장을 넘기면 다시 동물들이 대답한다. 여우와 다람쥐들은 굴에서 나와 천천히 둘러보고, 갈매기들은 높이 날고, 강아지는 몸이 마를 때까지 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다.
그럼, 사람들은 무얼 할까? 사람들은 나뭇잎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며 청소한다. 그리고 반죽을 섞고 굽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청소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난데없이 반죽을 섞는다는 문장이 나오니 의아하지만, 그림을 보면 집에서 요리 중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책장을 넘기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우리는 이웃들이 잘 있나 살펴봐. 부서진 곳을 고치고 탁자와 의자를 꺼내 와.” 주황색 집과 푸른색 집 사이 공터에 사람들은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을 꺼내 오고 갓 구운 빵과 주스를 내온다. 마을 이웃들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안부를 묻고 모인다. 또 부서진 지붕을 고치는 사람도 보인다. 태풍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다 같이 눈 부신 햇살을 즐기며 태풍이 사라져서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근사한 날씨, 다시 모인 친구들, 모두 모두 반가워.”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사람들이 함께하며 누리는 기쁨과 좋은 날씨에 대한 감사가 느껴진다.
태풍이 올 때, 우리는
최근 환경과 관련하여 ‘위기’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분위기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에 대해 강조하다 보니 다수의 그림책에서 문제 자체에 지나치게 집중한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고 위기감만 가득한 비극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거나, 혹은 선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망가뜨린 인간을 악한 존재로 묘사하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그림책들을 읽으면서 어린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져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또, 이러한 위기가 악한 인간들 때문에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거나 인간을 혐오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노던아이오와 대학교의 마틴(Martín), 하게만(Hageman), 몽고메리(Montgomery), & 룰(Rule)1)은 잘못된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환경교육의 접근 방법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이 환경문제를 변화시킬 수 없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 아이들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데서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연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은 비록 환경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 앞에서 혹은 재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 앞에서 ― 태풍의 위력을 묘사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보다는 ―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풍은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태풍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대비할 수는 있다.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일 수 있는 어린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책을 읽으며 태풍이 올 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풍이 올 때 우리는 관심을 갖고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또 우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안전하게 머무르며 잠잠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때 우리는 안전한 보금자리가 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한편으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허하게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동시에 우리에게 속한 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배우게 된다. 배를 단단히 걸어 묶고 파라솔과 의자를 집안에 들여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위기의 시간이 오히려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삶의 오묘한 이치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 태풍이 물러가듯 위기는 반드시 지나간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위기 끝에 다시 마주하는 맑은 날씨에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우리는 이웃의 안부를 확인하고 살피며 서로를 돌볼 책임이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청지기의 소명으로
한편 이 그림책에서 우리는 자연관과 인간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접목되고 있는 ‘생태주의’는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가 상호 동등한 생존권을 갖고 있다는 평등 의식을 표방하는 사상이다.2) 하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동식물과 인간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만이 귀하고, 동식물은 귀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다만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후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며, 사람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주셨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글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각자 다양한 대답을 한다. 그러나 태풍이 작은 바닷가 마을을 찾아올 때 동물들의 대응과 사람들의 대응은 똑같지 않다. 동물들은 그저 감각을 사용해서 상황을 파악하거나, 지켜보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조용히 기다린다. 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해 있는 물건들도 관리한다. 또 태풍이 지나간 후 망가진 것을 고치고 더럽혀진 것을 깨끗이 치우며 환경을 돌본다. 이웃들이 잘 있는지도 살피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교제한다. 이 책에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은 성경적인 인간관, 특히 자연 만물을 보살피는 청지기의 소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생태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기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생태주의를 조명하여서 먼저 우리가 지닌 인간관과 자연관이 성경적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청지기의 소명을 가지고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쁨과 열정으로 행하도록 격려하는 그림책을 읽어주어야겠다.
dasarom_kim@naver.com
- Martín, N. M., Hageman, J. L., Montgomery, S. E., & Rule, A. C. (2019). A Content Analysis of Thirty Children’s Picture Books about Ecology. Journal of STEM Arts, Crafts, and Constructions, 4(1), p.86.
- 송주연, 정명숙, & 유수경. (2009). 그림책 ‘강아지 똥’에 나타난 생태주의. 아동교육 18(1),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