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헌법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
2024-07-25기현석 (명지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헌법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예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설립된 명지대학교 법과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헌법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들어가며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점차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이들은 통일을 아예 불필요한 것이거나 또는 아주 먼 훗날에나 가능한 무엇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더구나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남한을 ‘제1의 적대국’으로 명기하고 ‘평화통일’이라는 문구를 헌법에서 삭제하는 일련의 작업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독일의 경우가 그러하였듯이 통일은 언제든지 국내외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갑자기 목전의 과제로 대두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 선교가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면 한반도 통일을 향한 우리의 노력 또한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의 헌법 질서를 형성할 통일헌법의 모습을 미리 그려볼 필요도 여기에 있다. 이에 본 칼럼에서는 통일헌법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 논의된 여러 쟁점 중에서 주로 헌법 총강과 통치구조와 관련된 부분의 내용을 소개하고 이를 검토하기로 한다.
합의통일과 흡수통일 용어 사용의 문제점
남북통일의 방식은 그 기준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것은 통일방식을 합의통일과 흡수통일로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합의통일과 흡수통일이라는 용어는 그 구별 기준에 따라 각각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어서 주의를 요한다. 첫째, 쌍방의 ‘의사결정의 방식’이 자율적인지 타율적인지를 기준으로 합의통일과 흡수통일을 구분할 수 있다. 둘째, ‘통일헌법의 내용’이 쌍방의 헌법상 가치와 제도를 절충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일방의 헌법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것인지를 두고 합의통일과 흡수통일을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기준을 적용하여 보면 우리가 흔히 흡수통일의 전형적인 사례로 알고 있는 독일통일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통일헌법의 내용을 기준으로 본다면 통일 이후 독일기본법은 과거 서독기본법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으므로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에 해당한다. 반면 쌍방의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기준에 비춰본다면 독일통일은 동독 정권 수뇌부의 퇴출 이후 동독 주민의 주장을 받아들인 인민회의가 동독의 국가기능을 어느 정도 잔존시키면서 동독의 자율적 의사에 따라 서독 편입을 결정한 것이므로 합의통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에 다소 번잡한 경우의 수를 생략하고, 남북통일의 문제를 쌍방의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기준으로 살필 때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남한과의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을 분명히 포기하고 있는 최근 북한의 태도를 전제로 하면, 북한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남북한 간의 자율적 합의에 의한 통일은 더 이상 선택가능한 대안이 아니게 되었다. 둘째, 북한 정권이 붕괴될 경우 합의통일을 논할 여지가 있으나, 과거 독일과는 달리 통일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내외적 여러 여건을 고려할 때 북한 주민의 자율적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남한 주도의 타율적 의사결정에 의한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
한편 통일헌법의 내용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는 어느 경우에나 흡수통일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간혹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지나치게 경쟁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남한과 이와는 반대인 북한이 각각의 체제상 장점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통일헌법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정작 구체적으로 북한헌법의 어떤 요소가 통일헌법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거나 설득력 있는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헌법이 기본원리로 채택하는 계급적 인민민주주의 독재,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민주적 중앙집권제 등은 대한민국 헌법에 아직 반영되지 않은 긍정적으로 고려할 만한 제도나 가치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법의 제정과 개정
다소 학문적이고 어려운 주제이기는 하나 향후 통일헌법의 내용을 마련하는 방식의 선택에 대하여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헌법의 내용을 형성하는 방식으로는 크게 헌법의 제정(制定)과 헌법의 개정(改正)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헌법의 제정이라 함은 헌법 규범을 ‘시원적(始原的)’으로 ‘창조’하는 행위인데, 이러한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헌법제정권력)는 이전에 공동체를 규율하였던 기존 헌법의 ‘핵심적 내용(헌법핵)’을 포함하여 어떠한 가치 질서에도 기속되지 않는다. 반면 헌법의 개정이란, 현행헌법의 핵심적 내용을 변경하지 아니하는 한도 내에서 헌법이 스스로 정한 절차에 따라 구헌법과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헌법전의 내용을 변경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에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라고 정하여 우리 헌정사에서 헌법의 제정은 1948년에 단 한 차례만 있었을 뿐이고 이후의 모든 헌법변동은 헌법의 개정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의 규정은 그간의 헌정사에서 헌법의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과 같은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원리가 변경된 적은 없었다는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통일헌법은 일종의 진공상태에서 새로 제정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행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인가? 일단 다수의 학자들이 관련 논의에서 통일헌법의 제정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는 것은 헌법의 제정이라는 개념을 다소 넓게 이해한 탓으로 이해되며, 이를 무조건 비판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예컨대 통일헌법 도입 시 헌법의 규범력이 현실적으로도 한반도 전체에 미치게 된다는 점, 통일헌법에 연방제가 도입될 경우 단일국가에서 연방국가로 국가형태가 변화하게 된다는 점 등은 헌법의 핵심적 내용이 변경된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헌법의 논의 과정에서 헌법의 제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합의통일에 찬성하는 주장과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홍익대학교 음선필 교수의 표현을 빌려 설명한다면,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내용은 서구 기독교의 관점에 따라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한 인권사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민주체제, 그리고 시장경제질서로 정리된다. 그런데 통일헌법이 헌법 제정의 방식으로 형성될 경우 자칫 이러한 헌법의 핵심적 내용마저 변경하면서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거나 도덕 질서를 침해”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통일헌법이 ‘제정’의 형식을 갖췄다는 이유로 통일 이후에도 북한지역에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라 할 종교의 자유나 사적 소유가 전면적으로 부정되거나 장기간 유예되는 일이 정당화되는 상황은 결코 발생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소 논의의 맥락이 다를 수는 있지만, 독일통일 당시 서독의 야당인 사민당(SPD)이 헌법 제정에 의한 통일을 주장한 데 대하여 집권세력인 기독민주동맹(CDU/CSU)과 자유민주당(FDP)이 헌법개정 방식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한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통일헌법은 헌법의 제정이 아닌 헌법의 개정 방식으로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제3조를 통하여 한반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있는바, 규범적으로는 이미 분단국가의 헌법이 아닌 이른바 완성국가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평화통일과 관련된 조항을 삭제하는 등 일부 조항의 개정만으로도 충분히 통일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헌법의 통치구조
통일헌법의 통치구조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연방제 도입 여부에 대한 것이다. 관련 논의에서 학자들은 연방국가의 장점으로 다음을 든다. 첫째, 남북한 주민의 사회통합은 장기간 분리된 체제가 통합될 때의 갈등을 고려할 때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한데 연방제는 이러한 사회통합에 따르는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이다. 둘째,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모두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이므로 권력의 분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필요한데 이러한 관점에서 연방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셋째,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를 고려할 때 일거에 최저임금이나 사회적 복지 수준을 동일하게 가져가는 것은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므로 연방제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단일국가의 장점으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든다. 첫째, 단일국가를 유지할 때 민족동일성의 회복이 보다 신속하게 이뤄질 것이다. 둘째, 연방국가는 남북한 모두에게 매우 생소한 제도이므로 운용상의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셋째, 연방국가는 단일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성국 간의 결속력이 느슨하여 자칫 힘들게 얻은 통일의 기회를 쉽사리 다시 분단으로 되돌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현시점에서 다수의 학자들이 연방제 도입을 선호하는 데는 역시 독일통일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일의 경우 서독의 연방제가 동독의 서독 편입을 연방의 확대라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통일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적 경험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필자는 연방제 도입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오랜 기간 연방국가 운용에 적합한 전통을 이어왔으나 우리는 그와 정반대되는 역사적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일이라는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부담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통일헌법상 정부형태로 의원내각제 내지 이원정부제를 현재의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지, 국회의 구성 방식으로 양원제를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필자는 부정적이다. 다만 남북 간 경제력 격차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불평등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를 연방제의 도입을 통해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헌법에 별도의 근거 규정을 마련하여 이를 해결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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