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춰주는 거울, 친구

나를 비춰주는 거울, 친구

2021-09-21 0 By 월드뷰

월드뷰 SEPT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3


글/ 김정준(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다윗과 요나단은 주일학교 설교나 성경 그림책에서 늘 우정의 표본처럼 등장했다. 그 덕분에 다윗과 요나단을 생각하면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다윗과 요나단이 또래의 소년이 아니었을뿐더러 본래 우정이나 사랑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쉽지 않은 사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삼상 18:1)”라고 기록하고 있다. 승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세상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국을 다스리는 다윗이 돋보였고 그의 믿음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이들의 관계를 곱씹어보면서 요나단의 성숙한 신앙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요나단은 어떻게 정적이 될 수 있는 다윗을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이 사랑(삼하 1:26)했을까?

요나단은 다윗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버지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왕재(王才)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인격이나 군사적 지략과 용맹함으로 볼 때 객관적으로도 탁월한 인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여인들이 노래할 때, 사울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평생 ‘다윗 죽이기’에 남은 생을 소진하게 된다. 게다가 사울은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하며 그를 충동질한다. 사울의 말은 요나단의 질투심과 열등감을 고조시킬 만하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여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요나단은 어떻게 그토록 다윗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악한 마음을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었을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아이들끼리 뭔가 갈등이 생기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두지 못하고, 곧바로 끼어들어서 잘못을 따져주고 서둘러 사과와 용서의 절차를 주도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이 느끼는 정서를 헤아려주기란 실로 어려운 것 같다. 차라리 역동적인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이들에게는 친구와의 갈등을 회피하거나 섣부른 사과로 마무리하기보다 그를 통해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는 서로를 비춰보고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갈등을 통해 어떻게 성장하는지 어린이의 시각에서 귀엽고 의미 있게 풀어낸 그림책이 생각나서 소개하고 싶다. 바로 가사이 마리가 글을 쓰고 기타무라 유카가 그림을 그린 <친구가 미운 날>이다.

표지에는 두 여자아이가 각자 그림을 앞에 두고 있다. 오른쪽 아이는 하얀 크레파스를 쥐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색칠에 몰두하고 있지만, 왼쪽 아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아이의 시선은 옆 친구의 크레파스를 향하고 표정도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표정만 보아도 두 아이의 성격이 아주 다를 것 같아서 재미있다. 간결한 선으로 어찌 그리 선명하게 두 아이를 대조시킬 수 있는지 작가의 재주가 신기할 지경이다. 두 아이 사이는 <친구가 미운 날>이라는 제목이 비집고 있다. 일본 원서의 제목은 <크레용이 부러졌을 때(くれよんがおれたとき)>인데 원본에는 두 아이 사이를 제목과 작가 이름이 아이들의 팔꿈치까지 선명하게 비집고 있어서 크레용이 부러졌을 때 이들 사이도 벌어졌다는 걸 잘 보여 준다.

표제지를 넘기면 두 여자아이가 즐겁게 등교하고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유우와 하나는 미술 시간에 미처 끝내지 못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방과 후에 하나의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닭을 그린 유우는 색칠을 하다 흰 크레용이 부족해 하나의 새 크레용을 빌리게 되고, 채색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의 크레용이 많이 닳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빌린 크레용이 부러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유우와 배웅하는 하나의 뒷모습은 그들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며칠째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내던 어느 날, 선생님은 유우의 그림을 미술대회에 출품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유우는 한사코 출품을 거절한다. 이때, 하나는 용기를 내어 유우 그림을 미술대회에 출품하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건의하고 둘의 관계는 회복된다. 마지막 장에서 두 아이가 표제지에 등교할 때처럼 정답게 하교하는 모습이 유쾌하고 흐뭇하다.

인물을 강조한 기타무라 유카의 간결한 그림은 투박하면서도 인물의 표정을 부각하여 마음의 동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두 아이를 페이지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배치하고, 적절하게 분리하거나 모아놓아서 그들의 사이가 어떻게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지 공간적으로 대조한다. 그중에서도 하나가 크레용이 부러진 순간을 곱씹는 장면은 펼침면 전체에 이불을 턱밑까지 덮고, 잠 못 이루는 하나를 그려 넣어 아이의 고민이 얼마나 큰지 시각화하고 있다.

글도 그림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하나의 속마음을 잘 표현해준다. 자기도 아까워서 쓰지 못한 크레용을 과감히 쓰는 유우가 미웠지만, 그보다는 솔직하게 새것이니까 아껴 쓰라고 말하지 못한 자신이 더 미워진다. “잠이 안 온다. 마음속에 미움이 쌓였다. 크레용을 몽땅 써 버린 유우가 밉다. 크레용을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 내가 밉다. 그깟 크레용 때문에 그림을 못 그린 내가 밉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밉다.” 하나는 단순히 크레용을 부러뜨린 유우가 미웠던 게 아니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상황이 나빠졌는데 그 일의 탓을 모두 유우 탓으로 돌리고 힘들어하는 자신이 미웠다. 크레용이 부러질 때 하나의 마음도 무너졌고 단짝 친구였던 둘 사이도 금이 가고 말았다.

작가는 하나를 통해 친구가 어떤 존재인지, 친구와 어떻게 우정을 쌓아가는지 어린이들에게 들려준다. 유우가 내미는 화해의 손길을 거절하는 장면과 유우의 그림이 미술대회에 출품될 거라는 소식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장면에서도 하나는 유우와 불편한 상태에 머물려고 고집한다. 하지만 곧바로 친구에게 생긴 기쁜 일을 함께 축하하지 못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매사에 서슴없고 과감한 유우도 그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면 유우도 그림에 몰두하느라 하나가 어떤 기분인지 헤아리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우와의 관계가 틀어진 계기가 된 그림이 출품되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제 그림 내지 마세요. … 아무튼, 절대로 내면 안 돼요.” 유우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나는 유우도 이 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는 마침내 불편한 감정을 이기고 용기를 낸다. “유우 그림을 대회에 내면 좋겠어요!” 늘 속삭이듯 말을 하던 하나의 커다란 외침은 마침내 단짝 친구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이겨내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통로가 된다. 벌어졌던 틈은 메워지고 이전처럼 유쾌하고 친밀한 단짝 관계는 회복된다. 어쩌면 하나의 불편한 마음은 단번에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 유우와의 친밀하고 돈독한 우정이 쌓이면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길러지고 성장하게 될 것이다.

가사이 마리는 어린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한 그림책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가이다. 25년 동안 100권에 가까운 책을 쓰고 그렸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쓴 작가로서 책임감 있게 어린이 마음속의 갈등을 파헤치고, 어린이의 이야기를 통해 선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성인을 위한 얄팍한 심리 서적이 유행처럼 번지더니 이제는 ‘자기중심적인 저급한 위안’이 어린이 그림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책들은 어린이에게 ‘착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가르친다. 착한 행동은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일이며, 한술 더 떠서 착하기를 강요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은 인간을 억압하는 태도라고 도전하기도 한다. 물론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주장도 못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순하고 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욕구만 드러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인본주의에 물든 심리학은 ‘나’와 ‘내 감정’만 소중하고 남의 아픔보다 내 상처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책들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인간관계의 가장 큰 계명을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보고 자신을 예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풍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면 어린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그리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요나단처럼.

<1211kimjj@hanmail.net>


글 | 김정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오차노미즈 대학교에서 외국인 연구원으로 3년간 지내고, 한국 기독교 유아교육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 전공 조교수, 한국 구성주의유아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유아교육학회 이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