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막시즘과 2차 성혁명

2021-09-19 0 By 월드뷰

리버티니즘과 성혁명 (3)


월드뷰 SEPT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6


글/ 민성길(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리버티니즘(Libertinism)이란 성적 행위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방탕아(libertine. 난봉꾼, 호색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하나의 철학으로 이론화하고 장식한 사상이다. 이는 자유사상, 방종주의 등으로 번역되나, 이 글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영어 리버티니즘을 그대로 사용한다. 역사적으로 리버티니즘이란 용어는 17세기 귀족들이 성적 자유를 즐기던 풍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정치, 사회적 자유는 리버테리아니즘(libertarianism, 자유주의 또는 자유의지론)과 리버테리안(libertarian, 자유론자)이라는 용어로 대변되었다. 이 글은 고대부터 서구 사회에 있었던 리버티니즘이 어떻게 기독교의 영향을 벗어나 현대의 집단적 방탕(mass libertinism), 즉 성 혁명적 프리섹스 현상으로 발달해 왔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의학적 부작용을 살피고, 대응책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리버티니즘과 성 혁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3회에 걸쳐서 살펴본다. 지난 호에서는 프랑스 혁명에서 1차 성 혁명까지 다루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 전개 과정의 마지막 편으로 2차 성 혁명과 21세기 성 혁명을 다룬다.


7. 2차 성 혁명으로 가는 길


1920년대 1차 성 혁명 이후 1960년대의 “집단 리버티니즘”라고도 불리는 2차 성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닦는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변화들이 있었다.


프로이트-막시즘: 노동자 해방에서 성의 해방으로

1920년대 서구 도시에서 1차 성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소련의 성 혁명은 10여 년 만에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또한, 스탈린의 독재로 프롤레타리아 공산혁명이 야만과 폭력으로 흐르자, 그때부터 서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실망과 좌절에 빠졌다. 게다가 서구에서(아마도 경제적으로 풍요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서구 막시스트들은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나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국내에서는 이름이 게오르그Georg로 자주 번역됨, 편집자 주) 같은 막시스트들은 노동자 대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그 가치관을 비판하게 함으로써 서구사회 문화 자체가 혁명 대상이 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일부는 새로운 막시즘의 한 방편으로 “성의 해방”에 눈을 돌렸다. 그 선구자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였다. 그는 오르가즘을 중시하고 특히 청소년의 프리섹스와 동성애를 옹호하며, 일부일처제 가족체제와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어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그 대표적 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에 의해 ‘막시즘’과 ‘객관적 과학(정신분석)’이 혼합되었다. 이전에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문명은 리비도(성 본능, eros)를 억압함으로써 건설되었으므로 문명인은 어쩔 수 없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마르쿠제는 그 리비도가(프로이트의 시대와 달리) 이미 풍요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억압되고 있으므로, 성을 해방하면 유토피아가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혁명적 발상은, ‘미학적 상상’에 의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소아성욕론(infantile sexuality)을 근거로 그동안 터부시되었던 다양한 성도착적 쾌락도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프로이트가 말한 또 다른 본능, 즉 공격성(aggression. 죽음의 본능. Thanatos)도 해방하여 가학-피학증(sado-masochism)을 정상으로 용인하자고 했다.


문화

이미 1920년대 아마도 정신분석(무의식) 이론에 기초한, 자유로운 성을 구가하는 소설들이 나타났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1922)>,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1925)>, D. H. 로렌스(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1928)>,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북회귀선(1934)> 등이 출판되었으나, 금서가 되었다.

1920년대 문예계에 초현실주의(surrealism)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미술가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말하는 무의식(내면)을 표현한다고 하면서 꿈의 괴이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그렸다([그림 1] 참조). 초현실주의자들은 대개 막시스트로서, 서구의 전통적 기독교적 억압에 대한 저항 특히 “성적 해방”을 주제로 활동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대개 막시스트였다. 그들은 사드 후작을 재발견하여 칭송했다.

[그림 1] 초현실주의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作 <The Rape (1934)>

1920~30년대 문화인류학자들은 원시사회 성문화가 자유로웠다는 것을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는 1930년대 남태평양의 섬 사모아에서 소위 서구인들이 상상하는 ‘원시적 낙원’에서의 성문화를 연구했다. 그녀는 사모아의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적 자유에 대해 보고하며 서구의 억제적 성문화를 비판했다(그러나 1970년대 다른 문화인류학자가 과거 미드가 면담했던 사모아 여성들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미드의 연구는 허구였다는 것을 폭로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2차 세계대전까지 보통 사람들 사이에는 빅토리아시대의 도덕 코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특히 국제적 전쟁은 성문화를 뒤흔들었다. 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젊은 병사들이 해외로 파병되면서 매춘에 빠져들었다. 성병으로 인한 군사력 저하가 심각했으며, 점령지에서의 성폭행도 큰 사회적 문제였다. 전후 평화가 찾아왔어도 전쟁에 종사하던 남자와 여자들은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 시대가 이어졌는데, 이때 공산주의의 스파이 행동과 핵전쟁이 미국 사회에 공포가 되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을 적발하려는 매카시즘 활동은 동성애자들도 공격했다.


성 관련 출판문화

1953년에 플레이보이지가 등장했다.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은밀했던 외설과 포르노의 공인에 대한 치열한 법적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섹스와 외설(포르노)은 동의어가 아니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출판물, 영상물 및 대중 매체 등에 노골적으로 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교에 대한 가이드북이 출판되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금지되었던 성적 소설이 해금되기 시작했고, 신간 에로틱 소설도 등장했다. 성적 내용의 만화도 등장했다.


의과학

의학과 과학의 발달이 산업혁명과 더불어 성 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유물론적 진화론이 나온 후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우생학과 식민지지배 이론이 정당화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라는 여성주의자가 등장해 우생학의 원리에 따라 가족계획(planned parenthood) 개념을 주장하고, 또한 모성 건강을 이유로 피임과 낙태의 정당화를 주장했다. 식민주의, 생어 그리고 나치스는 우생학에 근거한 인종차별로 비판받는다.

1948년 킨제이(Alfred Kinsey)는 당시 미국인들의 위선적 성문화를 폭로했다. 남자들의 불륜은 물론, 여성들도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며, 동성애자도 의외로 많다고 했다. 이는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성 해방에 대한 죄의식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킨제이의 연구방법이 크게 잘못되었으므로 그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혁명가들은 이 책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1960년대 피임약의 등장은 성 혁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여성들도 남자들이 늘 그래왔듯이 순수한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제도는 위기에 빠졌다. 페니실린이 발명되어 성공적으로 매독과 임질을 치료할 수 있게 되자 프리섹스 풍조를 더욱 조장했다. 은밀히 사용하던 최음제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적 쾌락을 자극한다는 마약, 각성제, 환각제가 등장해 쾌락적 성 혁명에 일조했다.

때맞추어 1960년대에 라이히(Wilhelm Reich)와 킨제이를 계승한 마스터즈와 존슨(Masters and Johnson)이 “인간의 성 반응”을 연구했다. 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자의 그것과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성 치료(sex therapy)를 고안했는데, 이는 배우자의 대리자가 치료적으로 성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에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라이히와 킨제이 그리고 마스터즈 등에 힘입어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오르가슴을 중시한 나머지 강박적이 되었다. 오르가슴에 도달하기만 하면 어떤 형태의 성행동이라도 정당하다는 견해가 나타났다. 킨제이 말대로 “사정”만 한다면 무슨 행동이든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권리이자 자유라는 성적 쾌락 지상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성행위, 특히 오르가슴을 얻는 방법에 대한 가이드북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수년간에 걸친 게이 인권운동가들의 폭력적 시위에 시달린 나머지 동성애를 정신장애 목록에서 제외했다. 이는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 이슈에 의해 굴복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 학술적 근거는 킨제이보고서와 1957년 심리학자 에블린 후커(Evelyn Hooker)가 발표한 연구였다. 그 연구는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 사이에 몇 가지 심리 검사상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연구에 참여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 클럽에서 추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없다). 이후 동성애 옹호 활동가들은 동성애가 정상적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그 이후 동성애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행되면서 동성애가 얼마나 개인에게 해를 끼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존스홉킨스 대학 심리학 교수 머니(John William Money)가 1960년대에 젠더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한 소년을 여자로 키우는 실험적 연구를 했다. 그는 실험이 성공적이라 보고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30여 년 만에 실패했음이 폭로되면서 그의 주장은 거짓이며, 그 연구가 비윤리적임이 판명되었다. 이는 당연한데, 왜냐하면 젠더는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인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젠더 이론은 19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이후 대학의 교수들과 미디어들이 받아들이면서 1980년대부터 보편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현재 트랜스젠더 정상화와 차별금지, 젠더 주류화 운동은 21세기 성 혁명의 중요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1990년대 남자의 발기를 돕는 비아그라 계통의 약물들이 등장했는데, 그 사회적 합병증 중 하나로 노인층에서 성병이 증가하고 있다.


8. 정치 사회적 운동


1960년대는 서구 역사에서 사회, 정치,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변혁이 있던 시대였다. 즉 인권운동, 노동자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이 점차 격화되고 있던 가운데 68 좌파 학생혁명, 반전-반핵 운동, 반문화적 히피 운동, 성 혁명, 게이 인권운동 등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서로 연대하여(in solidarity)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전통 기독교와 그 윤리에 대한 반대 운동이기도 했다.


반문화운동

반문화운동은 히피(Hippie) 문화와 성 해방(sexual liberation) 운동으로 나타났다. 소위 “건전한” 가족문화, 위계적이고(가부장적인) 경쟁 일변도의 자본주의 문화, 젊은이들의 성을 억압하는 전통적 기독교 문화 등을 반대하는 것으로, 월남전(1964~73) 반대 운동, 반핵 운동, 환경보호 운동 등등이 동반되었다. “Make Love not War”가 반문화운동과 프리섹스 성 혁명의 구호가 되었다.

1969 우드스탁 페스티벌


히피(hippie) 문화

히피 문화는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반문화운동(counterculture)이다. 히피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은 도덕과 이성 보다는 평화와 자유로운 감성과 즐거움을 추구하고, 히피 곡을 연주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히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긴 머리에 꽃을 꽂고,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다녔으며,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마리화나나 LSD 같은 환각 약물을 즐겨 사용했다. 196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즉 소위 “the Summer of Love”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미국 뉴욕주의 베델 평원에서 개최된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은 1960년대 청년들의 반문화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수만 명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운집해 며칠간 노숙하며 몸을 노출하고, 술과 마리화나와 LSD를 즐기면서 록밴드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밤에는 텐트 안에서 프리섹스를 구가했다. 이는 현대의 디오니소스 축제였으며 집단적 리버티니즘의 표현이었다. 점잖은 미국 주류사회는 충격을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리어리(Timothy Leary)가 환각 문화(psychedelic culture)를 이끌다가 대학에서 쫓겨났다.


68 학생혁명

1950년대 이래의 지배적인 문화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1960년대에 일으킨 반정부운동, 좌파 저항운동, 반전-반핵 운동 등을 말한다. 당시 대학 내는 물론 대학가는 시위하는 대학생들과 경찰 간의 대치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대표적인 프랑스의 1968년 5월 대학생들의 ‘소요’ 당시 구호는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였다. 학생혁명 당시 대학생들은 라이히의 저술 <성 혁명>을 읽었고, 집회장에서 마르쿠제의 강연을 들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일본 동경대학교의 좌익 학생 시위운동이 있었다. 학생혁명은 어떤 이들에게는 해방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위험한 무정부 상태로 비판받았다.


페미니즘

성 혁명에는 페미니즘도 한몫했다. 19세기 이래 1960년대까지는 페미니즘 운동을 1차 웨이브(wave)라고 하는데,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를 2차 웨이브라고 하는데, 이때는 여성의 법적 권리와 인권을 위해 활동했다. 1990년대 이후 3차 웨이브가 진행되고 있는데, 과거의 페미니즘 운동이 실패했다고 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해석에 근거해 매우 다양한 이론과 분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중 급진적 페미니즘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가부장제로 인식하고, 성 역할이라는 기성 관념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철폐하려 한다. 특히 막시스트 급진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체제를 계급갈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9. 2차 성혁명


1950년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는 두터운 중산층 부모 아래 풍요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오락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이미 상당히 성에 개방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삶을 기려야(celebrate)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풍요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사회 규범적 억압은 성의 억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성체제에 저항적인 청소년과 청년들은 성을 해방하자는 혁명적 구호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부와 1970년대 초반부 동안 앞서 말한 사회-문화-정치적 변화와 피임약의 영향 등이 결합해, 성 해방 문화가 전개되었다.


성혁명적 리버티니즘 현상들

60년대 젊은이들은 모든 전통적인 성적 규범(sexual norm)에 도전했다. 성 혁명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1960년대 성 혁명은 일상적 삶에서 “사랑의 힘(power of love)”과 “섹스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sex)”을 드러내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말 그대로 “프리섹스”였다. 프리섹스는 전통적 일부일처제의 이성애적 결혼(monogamous heterosexual marriage) 바깥에서의 성교를 용인해 줌으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성적 자유(프리섹스)를 누리게 해주고, 죄의식을 덜 느끼게 해주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섹스도 정당하고 건강한 것이며 쾌락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합의되고 안전하다면, 그 충동은 억압되지 말아야 한다. 즉 두 사람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해 합의하면 어떤 종류의 성행위도 괜찮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젊은이들 사이에 우연히 만나 한 번으로 끝나는 성행위(casual sex)와 섹스파티가 유행했다.

성 혁명은 프리섹스가 중심이지만, 젊은이들은 으레 오락을 위한 술과 마리화나, 각성제, 환각제 등을 사용했고, 로큰롤(Rock and roll) 음악과 춤을 성 혁명적 행동에 포함했다. 당연히 성병이 만연했고,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문제가 무수히 발생했다.

이런 성 혁명의 축제는 서부 바닷가에서 시작했으나 곧 대학가로 퍼졌고, 보편적 도시 문화가 되어갔다. 당연히 그 범위도 확대되었다. 성 해방에 게이(성 소수자) 인권운동도 편승했다. 그리하여 The GLBTQ Encyclopedi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의 위대한 성 혁명은 이미 확립된 가부장제적 빅토리아시대의 기준과 프로이트주의(Freudism)에 고통받는 억압적 이성애적 문화를 ‘자유연애(free love)’의 사회로 변모시켰다.”

1973년에는 동성애가 정신장애가 아니게 되었다. 이어 항문성교가 정당화되었고, 사디즘-마조히즘, 소아성애 등을 정당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원래 정신분석은 이런 성 해방과 리버티니즘을 옹호하지 않았다).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프리섹스 리버티니즘은 잠깐 주춤했으나, 조만간 성병과 에이즈와 임신에 조심하면서 재개되었다.

현재 성 혁명가들은 자위와 동성애, 트랜스젠더는 물론 가학·피학적 성(BDSM, Bondage, Discipline, Sadism and Masochism), 다자성애(polyamory) 등 무엇이든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성-긍정 운동(Sex-positive movement)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런 방탕(libertine) 행동을 ‘진보적 근대적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홍보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가톨릭계 철학자인 아우구스토 델노체(Augusto Del Noce)는 이런 리버티니즘 현상을 심리적(정신분석적)-에로스-막시스트-탈 기독교화(psycho-erotic-marxist-dechristianization)로 요약하고, 집단 리버티니즘이라 규정했다. 성 혁명가들은 성 혁명적 사고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 education)에 LGBT에 대한 교육을 추가한 것이다. 법과 행정도 성 혁명을 뒤따르고 있다. 프리섹스 사상은 누드허용, 포르노, 불륜, 낙태, 항문성교 등에 대한 합법화, 동성혼의 합법화, 그리고 현재 ‘평등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연히 크리스천들은 이 모든 성 혁명과 리버티니즘에 반대한다.


10. 21 세기 성문화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이 나온 뒤 불과 70년이 지난 후인 1917년에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그런데 1930년대 막시스트의 성 혁명이 선언된 지 불과 40여 년 만에 본격적인 성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빠른 진전은 크리스천으로서는 크게 우려되는 바이다.

21세기에도 리버티니즘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과거 리버티니즘은 인본주의, 계몽사상 그리고 과학과 산업혁명에 따라 나란히 발전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즈음, 인간 의식의 변화와 과학과 의학, 산업에서의 기술발달이 어떻게 인간 섹슈얼리티와 리버티니즘에 반영될지 그리고 크리스천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skmin518@yuhs.ac>


글 | 민성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종신회원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및 효자병원 진료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최신정신의학>, <화병연구> 등 다수가 있으며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 선구자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