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교회의 적인가
2021-06-18곽태원 교수의 성경과 경제 이야기 (2)
월드뷰 JUNE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3 |
글/ 곽태원(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자본주의를 맘모니즘의 동의어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의외로 많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는 정의롭고 자본주의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자본주의를 교회의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경제활동에서 자본이 담당하는 역할이 크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사회주의에 대비되는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경제에서 자본의 역할이 급격하게 커진 것은 산업혁명 이후인데, 현대의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자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체제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본을 누가 소유하고 지배하는가에서 나온다. 사회주의에서는 자본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국가이지만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제도는 사유재산제도이고, 사유재산제도는 자유로운 교환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은 결국 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이긴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시장에서 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다는 데 있다. 자유로운 거래는 쌍방을 모두 만족시킬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래는 자원의 배분을 지속적으로 개선되게 한다. 어떤 거래가 이루어지면 거래가 있기 전보다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의 형편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래가 대량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시장경제체제이다. 더구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는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 더 유리한 거래를 하기 위해서 각자가 창의적인 노력을 할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생산과 소비가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에너지가 충만하게 된다.
시장경제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무한경쟁, 승자독식 또는 정글의 법칙 같은 표현은 경쟁이 잔인하고 무질서하며 수많은 패자의 불행 위에 소수의 승자만 과도한 부를 누리게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정글의 법칙은 놀라운 질서와 균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경쟁은 소수의 승자만 배출하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경제학의 비교우위이론에 의하면, 시장 참여자나 기업은 서로 경쟁을 하지만 각기 상대적으로 우위가 있는 분야로 찾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결국은 경쟁이 협력관계 또는 상생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크게 성공했던 빌리 로즈(Billy Rose)라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흥행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손재주도 매우 좋아서 전 미국 타이핑 대회에서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타이프를 잘 쳤다고 해서 직접 타이핑을 함으로써 당시의 인기직종이었던 타이피스트의 자리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업과 타이핑을 모두 잘했지만, 그의 비교우위는 흥행업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타이핑 속도가 훨씬 느린 비서를 고용해 상당한 급여를 주면서 자신의 서류를 타이핑하게 했다.
시장경제체제가 효율 면에서는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공평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나쁜 제도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여기서도 비교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제도이다. 사회주의가 아무리 공평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구한다고 외쳐도 실제로 존재했었거나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을 보면 공평한 사회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분배의 공평’ 혹은 ‘분배 정의’라는 것은 ‘평등’ 즉 ‘격차의 극소화’라는 한 가지 차원의 가치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분배 정의의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기준은 정당한 보상이라는 가치이다. 일한대로, 노력한 대로 거기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사실 이 후자의 가치를 먼저 구현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출발점이다. 오늘날의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는 일한대로 보상을 받는 사회에서 출발해 정부에 의한 분배의 조정 또는 개선이 가미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에 비하면 뛰어나게 더 좋은 제도이며, 이것은 효율 측면뿐 아니라 공평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먼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보자.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지침을 내린다.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 공의로운 심판의 기본적 기준으로 제시된다. 바울은 또 사업가 루디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는 더 자본주의적이다. 금 다섯 달란트는 무게로 102~170kg에 해당하며 오늘날의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매우 큰 자본이다. 이러한 통 큰 자본의 투입을 예로 드시는 주님께서는 적어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적대적이 아니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100%의 이익을 거둔 종은 큰 칭찬을 받고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종은 맡겼던 달란트까지 빼앗겼다. 그 비유 중에 은행과 이자를 인정하시는 장면도 나온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자본주의적이다. 투자 금액은 달란트 비유에 비해 작지만,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하고 있다. 기간이 얼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000%의 수익률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주인은 수익률에 따라 내리는 상급에 차등을 둔다.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자본주의자라고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적대시하셨다면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도 마지막 날에는 폐기처분 될 것이다. 천국에는 경제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효율적인 자원 배분 시스템이 필요하다. 공평한 분배 시스템도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장제도이다. 특히 예수님은 향유를 부어드리는 사건 중에 분배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을 낭비한다는 일부 제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어서 언제라도 도울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마 26:11, 막 14:7, 요 12:8). 사람의 노력으로 가난을 없앨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배치된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국가가 아니라 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구제의 사역을 쉬지 말아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탐심과 그것에 바탕을 둔 배금주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능력(특히 재물 얻는 능력, 신 8:18)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재력가가 되거나 큰 기업가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는 성경에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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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곽태원
곽태원 (경제학과)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그 후 서울시립대학교 세무학과에서 2년, 서강대학교에서 20년간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한국조세연구원 이사, 조세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친 조세 관련 전문가로 부동산 등에 대한 자본소득 과세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2006년에 다산경제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