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한국교회핍박’에 나타난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2021-03-06
월드뷰 MARCH 2021●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4 |
글/ 김명구(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
1910년의 강제 병합 조약 이후, 서북지역 기독교인들과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본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명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도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행할 때,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1911년 11월을 시작으로 다음 해 5월 초순까지 검거가 계속되었다. 일본은 신민회 회장으로 알려졌던 윤치호(尹致昊)를 전격 체포했고 이승훈·양기탁·유동열(柳東說)·안태국 등을 비롯해 600여 명에 가까운 인물을 투옥했다. 대부분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 신민회 인사와 서북지역의 장로교 교인이었다.
1912년 5월, 일본은 123명을 기소했다. 구속된 사람들은 구속 이유를 몰랐고 친일선교사로 알려진 감리교 동북아선교 감독 해리스(Merriman C. Harris)까지 연루되었다는 보도에 재한 선교사들도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확대했다. 조선총독부를 대변하던 <매일신보(毎日申報)>나 <경성일보(京城日報)> 등에서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동한 것으로 몰아갔다.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오직 고문을 통해 얻어낸 자백만 있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과 13일 이틀에 걸쳐 <뉴욕 헤럴드>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미국의 교회와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정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 등에서 활동하는 거물들이 나섰다. 전 국무장관 포스터(John W. Foster, 32대), 전 뉴욕시장 로우(Seth Low),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 예일대학교 총장 해들리(Arthur Twining Hadley), 뉴욕의 아웃룩(the Outlook) 사장 아보트(Lyman Abbott) 등이 회동을 갖고 일본의 조치를 비판하고 나섰다.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 출신 상원의원들이 일본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진다스테미(珍田捨巳) 주미 일본대사를 만나 선처를 요청했고, YMCA의 모트(John R. Mott)는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 각국 실행위원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미국 교회들은 일본 대사관과 교섭하는 한편 메이지 대학 총장을 지낸 우자와 후사아키(鵜澤總明)와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등 일본의 저명한 법률가 16명을 고용해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미국 북장로교는 기관지 컨티넌트(The Continant)를 통해 1912년 8월 27일까지 재판 경위를 소상히 조사해서 기재했고, 선교사들의 비판적 논조와 법률가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자세히 발표했다. 장로교 선교회 총회에서도 재판 전후의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미국 각 지역에 배포했다.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매우 친밀했고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가 확장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례적인 조치였다.
일본은 105인에게 ‘모살 미수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가 경성 2심법원에서 윤치호, 양기탁 등 6명을 제외한 99명을 무죄로 방면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 가서‘특별사면’ 형식으로 남은 사람을 사면했다. 미국 사회의 압박에 ‘105인 사건’을 그렇게 종결한 것이다.
이 사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서울YMCA 학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매우 가까이에서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조작하고 어떤 상황을 만들어 가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일본이 이승만까지 가두려 했을 때, YMCA의 존 모트와 미국 선교사들, 그리고 재일선교사이자 감리교 동북아 선교감독이었던 해리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와 미국 사회, 미국 개신교계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지켜보았다. 그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본의 기독교인 탄압정책과 자신이 겪은 경험, 선교사들의 진술, 영·미 각국의 신문 보도, 미국 교회와 기독교계의 보고서와 발표문 등을 수집해 분석했고, 한국과 한국 교회를 핍박하는 일본의 행태와 그 의도를 고발하려고 했다. 1913년에 하와이에서 발간한 <한국 교회 핍박>은 그런 의도로 저술되었다. 덧붙여, 이 책에는 이승만이 추구했던 사상과 정치 체제, 기독교 신학도 포함되어 있다.
이승만은 미국 사회가 일본의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기독교, 민주주의 체제가 서로 엉키고 묶여 있는 것을 파악했다. 실제로 초대 미국공사 박정양은 미국, 기독교, 민주주의 체제가 묶여 있다는 것을 고종 임금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이후, 한국의 개화 지식사회나 신진 지식사회는 기독교를 미국의 종교로 여겼고 미국을 “민주공화국의 개조(開祖)”라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했다.
이승만은 이 책의 “내치상 관계”에서 한국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교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회집할 수 있는 처소이다.
2) 교회 내에 활동력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3) 교회는 합심하는 능력이 많기 때문이다.
4) 교회를 통해 한국인들이 국민적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교회에서 청년들의 교육을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6) 교인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7) 선교사들의 도덕적 정의감이 한국에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8) 교회를 통해, 혁명사상의 풍조가 전파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승만이 말하는 혁명사상은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전통적 사상이 아닌,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공적 정의를 강조하는 근대적인 이념이었다. 이승만의 판단처럼, 한국에서는 선교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근대교육을 시작했고, 교회마다 남·녀 학교를 운영했다. 기독교 사회기관이었던 YMCA와 기독 교회도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개인의 권리와 타인 존중 의식이 퍼져나갔다. 한국의 기독교계는 구령(救靈)과 구국(救國)을 분리하지 않았고 ‘정의’, ‘자유’, ‘민주주의’가 기독교의 이념이라고 확신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유· 평등사상으로 의식화되었고 ‘교육받은’ 세력 집단을 형성해 곳곳에 조직망을 키웠다. 일본은 그것을 두려워했고, 일본은 한국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적 사회세력인 기독교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105인 사건’을 벌였다.
이승만의 분석처럼, 당시 일본은 사실상 제정일치의 국가였다. 천황은 살아있는 신(神)인 동시에 국가 신도의 최고 사제였다. 모든 지향점이 천황이 되는 사회진화론적 체제였고 백성은 천황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교육받은 학생이나 교인은 자동으로 일본 체제를 거부하게 되어 있었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상숭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실제 한국 교회의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개인의식, 평등의식, 노동의 존엄 의식, 만민평등의 민주주의 의식을 가르쳤다. 자동으로 반일사상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실제 이러한 의식이 기독교 기관을 통해, 그리고 근대교육을 받은 미션스쿨 출신들을 통해 한국 사회로 전파되고 있었다.
1915년에 일본이 사립학교 개정령을 시행하면서 그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도 여전히 전국 곳곳에는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근대적인 학교가 있었다. 또한, 전국에 흩어진 교회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향한 절대 신앙을 고백했다. 이런 의식화된 조직망을 바탕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의 교회가 참여했고, 연희전문, 배재, 이화, 숭실, 숭덕, 숭의 등 미션스쿨의 교사와 학생이 선도에 섰다. 전국적인 비폭력 저항이었으며 이는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이 포교규칙을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전국의 오지까지 기독교는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1919년 4월 11일 전체 10조로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이 가결되었는데 그 작업은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이 주도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정해졌다. 임시정부 헌장은 중경 정부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개정을 했지만 제1조는 계속 유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되었다. 임시헌장 작업에 참여한 이광수는 “신(新) 윤리의 중심인 ‘개성’이라는 사상과 신(新)정치사상의 중심인 민주주의라는 사상은 실로 야소(예수)교리”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헌법 제1조가 기독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상해 임시정부 임시헌장뿐만 아니라 이규갑이 주도했던 한성 정부의 약법 제1조도 “국체ᄂᆞᆫ 민주제를 체용ᄒᆞᆷ”이었다. 도산 안창호도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미국 기독교가 한국에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주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 “민주공화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로부터 비롯되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체제가 한 범주 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돌아왔을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이들을 영수(領袖)라고 칭했다. 세 사람 모두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몰아닥친 난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별히 기독교계는 이들이 기독교 세계관의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 나라는 정의와 자유, 평등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의미했다. 이에 부응하듯 세 사람 모두 ‘기독교 입국(立國)’을 외쳤다. 특별히 이승만은 기독교가 근대윤리와 질서, 근대정신을 제공한다고 확신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를 굳건히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주장을 했다. 자유와 평등,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체제여야 만이 대한민국을 강한 근대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었고, 그것은 미국의 체제를 통해 확인했던 결과였다. 그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근대 국가건설 의식으로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구국(救國)의 이념이 되었다. 주자학 전통의 조선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모두 존엄하다는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 같다는 신부적(神賦的) 인간의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십자가에 대한 강조, 거듭남이라는 단독자성을 통해 곧 기독교 복음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 의식이 고양되었다. 기독교는 절대자 야웨 하나님 아래 누구나 수평적 존재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인습과 제도, 인간관과 사회관을 검토하고 심판하며, 소속 교인들의 삶과 행동을 규제·훈련한다. 모든 문화적 전통과 사회 구조, 신분 관계, 관습과 제도 등도 검증한다. 그리고 신부적(神賦的) 인간의식으로 귀결시킨다. 경건과 신실, 공평한 처리, 인내, 친절, 책임감 등을 지향하게 되고 이를 저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게 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이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mku9@daum.net>
글 | 김명구
감리교 목사로 연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장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소죽 강신명 목사>, <영주제일교회 100년사>, <서울YMCA 운동사 100-1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