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종교개혁을 부정하는 세력과 싸워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2021-01-18월드뷰 JANUARY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
1. 한국 교회는 어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까?
한국 교회는 어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까? 흔히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종교개혁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도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고, 개신교 안에서 가톨릭 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되 어떤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는 빈 구호가 되어 버리고 만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도 마찬가지다. 구원을 사회 개혁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사회복음’을 복음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으므로 구원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복음으로 돌아가자’라는 외침도 무의미한 구호가 된다.
2.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개신교도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 교회 안에 다양한 복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다양성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 교회는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 매우 긴 여정을 걸어왔다. 필자가 2017년 <월드뷰> 10월호에 기고한 짧은 논문, “2000년 동안 교회가 반복한 일: 복음을 윤리로 끌어내리는 일”에서 밝혔듯이 바울이 죽은 뒤 100년이 지나지도 않아,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구원론(칭의론)은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어떻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론이었다. 물론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년)이 ‘은혜를 통한 구원’과 비슷한 가르침인 ‘은총’에 대한 강조가 있었지만, 어거스틴의 가르침도 바울의 칭의론과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결국 교회는 바울이 죽은 뒤 2세기부터 시작하여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1,500년 동안이나 ‘믿음을 통한 구원’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최후의 심판대에서 죄인이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중요성은 바로 이것이다. 교회가 비로소 복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교회에서 20여 년 전부터 ‘바울신학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학문적 흐름이 생겨나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종교개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그 대표적 학자인 영국 성공회 주교 톰 라이트(N. T. Wright, 1948~)는 그의 책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이란 책에서 노골적으로 루터가 바울의 칭의론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이해하는 칭의론이야말로 올바른 이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칭의론을 어떻게 설명할까? 라이트는 칭의론은 일차적 칭의(initial justification)와 최후의 칭의(final justification)로 구분한다. 일차적 칭의는 믿음을 처음 가질 때에 믿음으로(by faith) 얻게 되는 칭의다. 최후의 칭의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미래에 받게 될 칭의인데, 이것은 ‘삶을 기초로 해서’(on the basis of life) 얻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삶’이란 다름 아닌 ‘행위’(works)의 동의어다. 결국, 신자의 칭의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의 그의 행위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제임스 던(James Dunn, 1939 ~2020)도 ‘2단계 칭의론’을 주장하고, 믿음보다 행위가 구원을 결정짓는 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현재 한국 교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물론 그전에도 행위와 도덕을 강조하다 실제로는 바울의 칭의론을 부정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행위 구원이 있었지만, 바울신학의 새 관점이 소개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루터파 목사들이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 있고, 칼빈(Calvin)의 후예인 장로교 목사들이 더 큰 목소리로 이런 행위 구원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있다. 1,500년 동안 행방불명되었던 복음을 종교개혁으로 되찾았는데,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또다시 복음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윤리학으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들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믿음에 ‘올바른 행위’가 추가되어야 한다며 믿음은 구원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에 선행이 추가되어야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다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들의 주장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토록 비판하던 ‘할례당’의 복음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할례당의 주장은 구원에서 믿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바울의 복음은 가짜 복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할례와 유대교 율법준수가 추가되어야만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만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맞서 싸우고, 루터가 맞서 싸웠던 그 적이 지금, 우리 안에 있다.
3. 과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2단계 구원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칭의는 ‘임시적인’(provisional)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칭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얼마든지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전혀 아니다. 이처럼 칭의를 1단계, 2단계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칭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모르는 것이다. 칭의란 기본적으로 ‘법정적’(forensic) 개념이다. 이때 법정은 최후의 심판대다. 칭의는 최후의 심판대를 그 컨텍스트(context)로 할 때 정확하게 이해된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은 1심, 2심으로 되어있지 않다. 단 한 번의 판결로 끝이다. 재심도 없고 항소심도 없다. 법정이 하나이므로 칭의라는 판결도 한 번이다. 칭의론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미래의 것이고, 종말에 일어날 일이므로 칭의론은 종말론과 떼어서 생각할 수도 없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이미 다 받으셨으므로, 성도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에게 줄 형벌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라고 선언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그 판결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에 대한 판결이 ‘무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그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에게 미래에 심판대에서 받은 판결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갖고 살다가 죽으면 그 심판대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칭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그 미래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고, 단지 소망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이다. 칭의는 2단계가 아니라 1단계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결정된다.
믿음을 갖게 된 성도는 자유인이다. 그 이후에 그에게는 선행하며 살 것인지, 악행을 계속하고 살 것인지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더이상 선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유인은 깊이 생각한다. 과연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넘치는 보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주를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 그 길로 나아간다. 이때 그가 하는 일은 대가를 바라는 노동(works)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서비스(service, 섬김)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에게 선행의 보상(reward)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4장 4~5절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신학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위가 여전히 중요한 구원의 결정요소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바로 바울이 로마서 4장 4~5절에서 말하는 것과 모순된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하는 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우리가 한 일의 ‘삯’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우리는 구원을 ‘은혜’로 여길 수 없고 우리가 받아야 할 ‘보수’로 이해해야 한다. 황당한 소리다. 한국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하락했으므로, 우리가 행위를 강조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바울의 칭의론을 버리면 한국 교회의 윤리가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망상이다. 바울의 칭의론을 버린 가톨릭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구원론을 바꾸어버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다. 각 시대 교회의 도덕적 상황이 안 좋을 때는 행위 구원을 가르치고, 도덕적 상황이 개선되면 은혜의 구원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목사가 성경 위에 서서 제 마음대로 진리를 조변석개(朝變夕改)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영적 타락이다.
만약 행위가 구원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선행을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건가? 반대로 어느 정도의 악행을 하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이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신학자도 목회자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중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되고 ‘경범죄’는 용서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중죄고 무엇이 경범죄인지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다 죄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경범죄와 중죄를 구분하고 이것을 구원의 여부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구절이 없다. 정말로 최후의 심판대에서 행위를 그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과연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목사는 몇 명이나 있을까? 사실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수많은 목사가 행위가 구원에 중요하다고 설교한다. 행위는 구원론이 아니라 기독교 윤리인데도, 행위를 구원론으로 가르친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도 그 기준으로 심판받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하다는 핑계로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가르치면 복음이 없어지는데도 말이다. 한심하다.
4. 복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위기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실패해서 교회 중·고등부, 대학부가 텅텅 비었기 때문에 위기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위기의 증상일 뿐, 위기의 본질이 아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무엇인가? 복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을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교회는 얼마든지 다시 살아나고, 부흥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복음을 잃어버리면 끝장이다. 그 복음은 바로 이신칭의의 복음이다. 그 이신칭의 복음은 사회 개혁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아니라, 영혼 구원의 복음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니다. 최고의 복지사회, 최고단계의 공산사회,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최고단계의 핑크빛 사회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인간은 여전히 타락하고 더 다양한 죄를 지으며 살아갈 뿐이다. 이 복음을 지켜야 한다. 이 복음을 지키려면 엉터리 복음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현대판 할례당의 가짜 복음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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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대학원(M.Div.)과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