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은 악하다?: 공공의대 설립의 근거
2020-11-12
월드뷰 NOV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
글/ 김철홍(장로회신학대 신약학 교수)
1. ‘사람 냄새가 나는 의사’가 필요하다
공공의대 설립과 의사 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파업에 참여한 의사들을 비판하는 유튜브들을 몇 개 보았다. 그 유튜버들의 비판은 단순 명확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의사들은 ‘가진 자들’이다. 파업에 나선 의사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지키려는 ‘기득권 세력’이다. 의사들은 ‘돈’밖에 모르는 자들이며, 그들이 의료행위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해서다. 의사가 없는 시골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일하려 하는 의사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은 인간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고귀한 사명감도 없다. 그들은 ‘이기심’(selfishness)으로 가득하고, ‘자기희생’(self-sacrifice)을 할 줄 모른다. 유튜버들은 이런 의사들을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의사’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의료서비스의 근본적 문제는 바로 이런 ‘제대로 된’ 의사들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료 개혁의 방향은 공공의대를 설립해서 ‘사람 냄새가 나는’ 의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의료계를 ‘물갈이’ 해서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돈 때문에 의사 노릇 하는 가짜 의사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참다운 의료인의 서비스를 받게 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주장이었다.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비판이고, 꽤 그럴듯한 내용이다. 정말 의사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면 안 되는 걸까? 필자의 처남은 피부과 전문의다. 결혼 전 그가 의대생일 때, 나는 그에게 의사가 되려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돈 많이 벌려고요”였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의대생들, 혹은 의대 진학을 원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고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할까? 의대에는 성형외과, 정형외과, 피부과 같은 인기과(科)와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와 같은 비인기과가 존재한다. 의대생이 자신의 전문분야를 선택할 때, 미래의 수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의사들에게 의료행위는 돈을 벌기 위한 경제활동인데,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면 비난받아야 하나? 이기심은 악한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선한 것일까? 그 유튜버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 도식 안에서 그들은 파업한 의사들을 이기적인 동물로 만들었고, 미래의 의사는 자기희생을 할 줄 아는 성자, 성녀로 만들었다. 파업한 의사들은 정말 이기적인 개, 돼지들인가?
2. 인간의 욕망은 악한 것인가?
의사 파업과 공공의대 설립 시도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은 악한 것인가?’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은 악한 것일까? 유대 기독교 전통은 인간의 욕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고대 유대교 랍비들은 인간 내부에 선한 성향(good inclination)과 악한 성향(evil inclination)이 공존한다고 보았다. 둘 중 악한 성향이 더 강하므로 자연적 상태의 인간은 악한 일을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할 때 선한 성향만 만들지 않고 악한 성향을 만들어 인간이 죄를 짓게 하셨을까? 랍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만약 악한 성향이 없으면, 아무도 밭에 나가서 일하지 않고, 또 아무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도 않기 때문이다.” 악한 성향이 없으면 아무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해서 결혼하여 후손을 낳지 않아 인류는 두 세대를 못 넘기고 멸종하게 된다.
유대 랍비들이 ‘악한 성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현대어로 옮기면 ‘욕망’(desire)이 된다. 욕망에는 역기능(逆機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順機能)도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내 안에 거하는 죄’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욕망의 역기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욕망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향해 죄인이 되고, 이웃과 자신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율법이 정해놓은 그 경계선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킨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예를 들어 결혼제도 안에서 남녀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만족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려하시고 의도하신 바다. 경제활동도 마찬가지다. 욕망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욕망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율법의 범위를 벗어난 욕망 추구가 죄일 뿐이다. 욕망 자체를 정죄한다면 그건 인간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짓이다. 인간이 경제활동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인류가 생존을 이어가게 하는 그 근본 에너지가 욕망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3. 기독교는 금욕주의(asceticism)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을 악한 것으로 보고 욕망을 억누르고 더 나아가 제거하려는 것을 금욕주의라고 한다. 성적(性的) 금욕(禁慾)과 금식(禁食)으로 수행하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종교적 성향이다. 기독교 전통 안에는 금욕과 금식을 실천하며 살아간 사막의 교부(Desert Fathers)들도 있다. 가톨릭의 수도원 전통도 유사하다. 지금도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생활(celibacy)의 서약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금욕주의를 가르치는 걸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라고 말씀하셨다. 금욕주의와 거리가 먼 말씀이다. 바울은 부부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 7:5)”고 가르친다. 결혼과 재혼, 독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결론은 결혼하지 말라가 아니라, 결혼하라다. 골로새서에 나타나는 골로새 이단은 금욕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골 2:21)”는 전형적인 금욕주의 슬로건이다. 성적 금욕, 금식, 부정한 것을 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꾸며낸 겸손(골 2:18)”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골 2:23)”는 금욕주의적 수행과 고행(苦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금욕주의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전통(골 2:8)”이라고 부르며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골 2:22)”이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4장 3절의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는 가르침은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금욕주의는 복음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Protestantism)의 근본적 차이점은 인간의 욕망을 향한 태도다.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결혼한 것이다. 루터는 가톨릭 수도사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수녀인 캐서린(Katharina von Bora)과 결혼했다. 수도사와 수녀가 결혼한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정점(climax)이다. 루터는 자신의 결혼을 통해 가톨릭의 금욕주의가 잘못된 것이며 금욕주의가 인간의 욕망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극적으로(in drama) 선언했다. 개신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바로 루터가 결혼한 그 사건에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경제 제도인 자본주의, 혹은 자유시장 경제 제도가 생겨날 가능성이 열렸다.
4. 인간의 욕망과 경제학
필자가 대학에서 읽은 경제학개론 교과서 첫 페이지에는 인간이 경제활동을 하는 동인(動因)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장경제제도는 인간 욕망의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에 초점을 맞춘 제도다. 물론 재물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무분별하게 무제한적으로 추구되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경제활동의 규칙을 잘 만들어 놓는 것이다.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아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제도 안에서 인간이 법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게 하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도 악한 결과가 아니라 선한 결과가 생긴다.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운 결과가 생긴다. 각 개인은 근면, 절제하는 생활 속에서 더 좋은 상품을 더 싼 가격에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기술 혁신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 전체의 부(wealth)가 증가하고,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 더 향상된 경제생활을 하게 된다.
40~50년 전에는 횟가루를 넣은 두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두부가 없다. 그 사이에 두부를 만드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식품위생법을 만들어 횟가루를 넣은 두부를 만들면 강력하게 처벌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법치주의를 통치의 원칙으로 한다. 국가가 두부의 생산을 책임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해결책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고전경제학과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은 인간이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전제에 합의한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각각 달랐다. 사회주의 이념은 인간의 욕망을 악한 것으로 보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 본다. 해결책은 욕망의 추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토지도 국유화하고, 모든 생산수단과 생산재도 국유화한다. 부동산도 국유제를 기본으로 하고 임대 시스템으로 한다. 국가가 의식주를 다 책임져주는 대신 인간은 물질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욕망을 포기한 인간, 바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다. 최고 수준의 도덕으로 고양된 인간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인간개조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이 가진 파괴적 가능성(역기능)을 인식하면서도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마치 핵융합 에너지로 폭탄을 만들면 파괴적인 힘이 되지만, 적절한 시스템을 만들어 통제하면 핵에너지를 유용한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시장경제는 하나의 제도(system)고, 이 제도는 인간의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을 통제하여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면서도 전체 사회에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지난 수백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증명했다. 반면 칼 마르크스의 제안은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여 결국 도덕적 인간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인간의 삶을 왜곡시켰을 뿐임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5. 이기심의 미덕(The Virtue of Selfishness)
금세기 최고의 개인주의 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는 그녀의 책 <이기심의 미덕(The Virtue of Selfishness)>에서 ‘이타주의(altruism)’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이기주의(egoism)’를 옹호한다. 그녀는 ‘남을 위한 삶’이란 것이 나쁜 것이고, ‘나를 위한 삶’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이기심(selfishness)’을 나쁜 것으로 보는 문화는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신학자로서 아인 랜드의 주장은 처음 들으면 좀 당황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의 주장은 사실 기독교적이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의 이기심을 정죄하는 것이 건강한 태도일까? 인간은 무조건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위험한 결과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개인주의의 기본가치고, 이타심은 공동체주의의 기본가치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는 곧 집단주의이기 때문이다. 집단주의는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전 단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제거하고 남을 위해, 더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전체주의를 향해 가는 첫걸음이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이기심(selfishness)에도 미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자유가 인정되는 법치주의 사회에서 이기심은 악덕(vice)이 아니라 미덕(virtue)이다. 이 이기심을 인정해주어야 개인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 개인이 법의 지배 아래서 자유롭게 이기심을 갖고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시장경제제도가 바로 설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타적 인간은 없다. 이기적 인간이 가끔 이타적 행동을 할 뿐이다. 누구도 남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24시간 동안 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공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기희생과 봉사, 이타적 행동은 이기심을 인정한다는 조건 위에서만 찬양해야 한다. 좌파 이념이 인간의 이기심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그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 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6. 사회주의 의료 시스템의 허구
공공의대 설립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주의 의료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 법안은 국회에서 수차례 이미 발의됐다. 논점은 과연 의료 사회주의를 도입하면 현재의 의료 서비스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앞으로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이 이 점에 대한 쉬운 답을 준다.
2015년 보스톤대학 3학년이었던 필자의 딸은 중국 상해 복단(復旦)대학교 교환학생으로 갔다.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상해에 가서 식사하던 중 필자의 딸의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렸다. 다음 날까지 쉽게 가시가 내려가지 않아 근처 큰 병원인 상해 제7인민병원을 찾아갔다(참고로 중국에는 이비인후과 개인 병원이 없다).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등록하고 선불로 돈을 낸 후에 비로소 11층에 있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생선 가시를 빼달라고 하자 의사는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이더니 핀셋과 다른 도구들을 그 불에 소독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보던 광경이었다. 머리에 반사경을 쓰더니 전구를 켜고 그 빛을 반사경에 반사시켜 필자의 딸의 목젖에 빛을 비추고 핀셋으로 가시를 찾기를 수 분, 결국 못 찾겠다며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한국이라면 동네 이비인후과에 가면 1분 만에 쉽게 가시를 빼준다.
한국에 돌아와 중국의 의료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 첫째로 중국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의대를 가지 않는다. 상대(商大)를 간다. 반에서 성적이 중간 정도 되는 학생이 의대를 간다. 의대의 수련 기간은 짧다. 전문의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훈련을 받고 의사가 된다. 그리고 국가 공무원이 되어 배치를 받는다. 시골 병원에 가라면 그리로 간다. 그들의 봉급은 적고 정해져 있다. 목에 가시를 뽑건 못 뽑건 월급은 동일하게 나온다. 중국의 시골 보건소도 아니고, 가장 큰 도시인 상해 대형병원의 의료 장비는 우리나라 60~70년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일까? 이기심을 갖고 자신의 욕망의 만족을 위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의사 선생님들이 그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 병원을 없애고, 공공의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정의로운 의사들로 가득한 국가 병원들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의 의료행위는 그 의사에게는 돈을 벌기 위한 경제활동이다. 만약 그 의사의 이익추구를 이기심(selfishness)이라고 욕하고,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목에 걸린 가시 하나조차 제거 못 하는 저질의 의료 서비스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적 수준이다. 미국보다 의료보험이 엄청 저렴하다. 왜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이렇게 싼값에 즐길 수 있을까? 의료수가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미 우리나라 의사들은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좋고 싼 의료 서비스는 의료인들의 뼈와 살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필자의 처남은 강동구 거여동에서 피부과 개인 병원을 지난 10여 년간 운영하다가 재작년에 병원을 팔고 현재 다른 병원의 월급받는 의사가 되었다. 그 개인 병원은 항상 환자들로 차고 넘쳤다. 그러나 막노동하듯이 온종일 쉴 새 없이 일해도 돈을 못 벌기 때문에 개인 병원을 포기했다. 현재의 의료수가는 의사들을 착취하고 학대하고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것인가?
한국의 개신교는 인간의 욕망을 악한 것으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욕망의 순기능에 대해 무지하다. 그 결과 개신교가 가톨릭처럼 되어버렸고, 이런 잘못된 이해 때문에 엉터리 유튜버들의 주장에 쉽게 공감하고 좌파 이념에 매우 친화적인 신앙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양산해내었다. 오늘날 좌파 정치 이념이 우리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게 된 원인은 기독교가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인간관을 진리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paulstudy@naver.com>
글 | 김철홍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대학원(M.Div.)과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에서 S.T.M. in Ecumenics을, 미국 퓰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