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이념적 성격과 의료 정책
2020-11-04
월드뷰 NOV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2 |
글/ 이규식(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 연세대 명예교수)
1. 인간의 기본권 이념
이 글을 대하는 독자들은 우리나라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의 대립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의료에서도 그러한 이념 논쟁을 시작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의료의 이념적 성격은 한 나라의 의료보장제도와 의료체계를 정립하고 의료 정책의 방향을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좌파, 우파의 이념 대립과는 다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우리나라는 병이 났을 때 일시에 개인이 많은 부담을 하여 가계에 큰 부담이 되던 것을 의료보장제도를 통하여 국민이 연대하여 사전에 보험료를 부담함으로써 환자는 소액만 지급하는 제도라고 단순하게 이해하여, 의료의 성격도 사적재화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공공의료를 공공병원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우를 범하였고, 따라서 공공의대 설립도 쉽게 생각하여 서두르다 사회적 분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의료는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재화(서비스 포함)와 성격이 동일하다(health care as a commodity).
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인 20세기 초만 하여도 의료서비스는 시장에서 거래되고 환자는 필요할 때 의사에게 진료 받고 진료비를 지급하는 일반적인 상품과 동일하였다. 또한, 의료서비스의 가격이 높지 않아서 환자가 진료비 전액을 부담하여도 이용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병으로 의사를 찾아가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도 별로 없었다. 1883년 비스마르크(Bismarck)가 근로자를 대상으로 질병보험을 도입할 때도 병이 나면 치료비 부담보다 일을 못 하여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따라서 이 당시 질병보험은 임금 대신으로 상병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의료기술이 발전하자 의사가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가 많아지게 되고 진료비도 비싸져, 이제는 상병수당보다 진료비에 대한 부담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1)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는 근로자만이 아니라 자영자나 지역주민들도 의료비 지출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때 등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의료보장제도였다.
미국은 이미 1907년에 사회의료보험(NHI) 운동이 시작되어 1935년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사회보장법을 제정하면서 의료보장도 포함시켰다(Battistella, 1997). 그러나 당시 미국의사협회는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의료보장은 의료를 사회화하는 것이라면서 심한 반발을 하는 관계로 의료보장은 빠지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비록 비스마르크 질병보험에 익숙하였지만, 근로자만 주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의료비 지출 증가에 대한 대안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영국에서는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가 발표되어 모든 시민이 지불능력과 관계없이 포괄적 서비스를 받아야 함을 제안하게 되어 의료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간주하는 공식적인 제안2)이 있었다. 영국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제안에 따라 전 국민에게 의료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부공영의료제도(National Health Service)의 도입을 서두르게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에 이어 1948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을 발표하고 제25조에서 의료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규정하게 된다.
2. 기본권 보장과 정부의 역할
의료가 인간의 기본권으로 공식화됨에 따라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산업화 국가들은 의료서비스를 인간의 기본적 권리(fundamental right)로 인정하였다. 미국도 이러한 흐름을 외면하기 어려워 일부 국민에게만 의료를 기본적 권리로 인정(health care as a right, not a privilege)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1965년 사회보장법을 개정하여 Medicare와 Medicaid 제도를 도입하였다(Torrens, 2002). 이에 Barr(2007)는 UN 창설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이 의료를 기본권으로 규정한 UN 인권선언을 지키지 않은 유일한 산업화 국가라는 특이함을 지적하였다.
의료를 인간의 기본권(right)으로 간주함에 따라 이를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가 되기 때문에 산업화된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국민의료보장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중앙정부의 일반재정으로 의료를 보장하는 정부공영의료제도(NHS)가 있다. 대표적 국가가 영국, 이탈리아 등이다. 지방정부의 일반재정으로 의료를 보장하는 형태는 지방공영의료제도(Regional Health Service, RHS)로 대표적 국가가 스웨덴, 덴마크 등이다. 다른 형태는 비스마르크 질병보험을 개혁한 건강보험제도(Social Health Insurance, SHI)로 독일, 프랑스 등이 있다. 건강보험제도는 비록 정부가 직접 운영하지는 않지만 건강보험법에 의하여 전 국민의 강제가입을 규정하고, 제도 운영의 궁극적 책임은 정부가 지게 되어있다.
3. 건강보험의료의 효율적인 공급
의료보장제도란 국민에게 의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가격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 제도이다. 즉 의료보장제도에서 의료가격은 공급자에게만 적용하여 의료의 재생산을 도모하고, 이용자에게는 의료가격 일부만 부담시켜 의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용자가 가격을 인지할 수 없는 제도에서 시장에 서비스 배분을 맡기면 비용 인식이 없는 이용자들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로 의료이용이 급증하여 의료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의료보장국가는 시장을 토대로 하는 수요접근을 버리고 필요도 접근을 하여 의료를 배분(배급)하게 된다. 필요도는 의료시장이 아니라 보험자나 정부가 전문가의 자문을 토대로 인구구조, 상병구조, 의학지식, 경제 수준 등을 토대로 결정한다. 따라서 필요도를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Melhado(1998)는 의료의 효율적 배분을 위하여 공급자 조직의 위계화와 의료계획이 밑받침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공급자 조직의 위계화는 Fox(1986)가 주장하는 계층적 지역주의 모형에 따라 의료계획을 토대로 1차, 2차, 3차의 의료기관을 지역별로 배치하고 환자의뢰체계(referral pathway 혹은 care pathway)가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의료보장제도가 도입되면 의료공급자의 위계화와 환자의뢰체계가 이루어져야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고 의료의 지역화를 통하여 의료자원의 균점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도 1989년 7월 전국민의료보험이 되면서 의료의 지역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진료권 제도를 두었고, 환자의뢰체계를 도입하였다. 진료권은 시·군이라는 생활권을 단위로 한 중진료권과 도를 단위로 한 대진료권으로 구분하였다. 국민은 병이 나면 먼저 자기 거주지의 중진료권 안에 있는 의원이나 병원을 1차로 이용하고, 여기에서 진료가 어려우면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아 자신의 거주지가 속한 도(대진료권) 안의 3차 의료기관을 이용해야 하며, 여기서도 진료가 어려우면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아 서울의 3차 의료기관으로 갈 수 있도록 환자의뢰체계를 실시하였다. 어렵게 도입한 이 두 가지 제도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국민들이 불편해한다고 건강보험의 통합을 앞둔 1998년에 폐지하여 환자가 어디에 살든 원하면 바로 서울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자, 환자의 서울 집중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2004년 KTX가 개통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자 환자의 서울 집중은 가속화되었다. 환자가 서울로 집중함에 따라 의사들이 환자를 따라 서울로 모이게 되어 지방에 의사가 부족한데, 이와 같은 원인분석도 하지 않고, 또한 의료계획 수립으로 적정한 의사 수를 추계해 본 적도 없는 정부가 지방에 의사가 모자란다고 의과대학 입학생 증원을 발표하는 정부의 강심장에 아연할 따름이다.
4. 건강보험의료와 공공재
의료가 인간의 기본권으로 간주됨에 따라 의료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즉 실증적 차원에서 의료는 공공재의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의료가 기본권으로 간주되어 의료보장의료가 되면 공공재가 된다. 공공재가 되는 조건은 소비의 비경합성(non-rival in consumption)과 비용부담을 못 하는 사람의 비배제성(nonexcludability) 원칙이다. 상품으로서의 의료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공공재가 될 수 없다. Melhado(1998)는 다양한 차원에서 의료가 공공재가 되는지 검토하였으나 결코 공공재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의료가 기본권이 되는 의료보장의료는 규범적 차원에서 공공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의료보장제도는 의료를 시장 수요를 토대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도(needs)를 토대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소비의 비경합성 원칙을 지키게 되며, 둘째, 비용부담능력이 없는 사람도 소비에서 배제시킬 수 없도록 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비배제성 원칙도 지켜 공공재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3) 따라서 의료를 기본권으로 접근하는 규범적 세계에서 의료는 공공재 내지는 준공공재(quasi public good)로 정의하게 된다(Karsten, 1995; Schenone, 2012). Klein(1995)은 영국이 정부공영의료제도(NHS)를 택하여 전 국민을 적용하게 된 것은, 의료를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공공재로 간주하고 의료서비스의 제공에 집단주의 접근법이 강조되었다고 하였다.4)
공공재로 인식된 건강보험 의료나 NHS나 RHS라는 공영의료는 당연히 공공의료가 되고, 생산자가 민간이냐 공공이냐를 따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공공의료라는 용어를 보면 WHO가 발간한 문헌에서는 Publicly Funded Health Care로 표현되고 있다. 영국은 NHS 홈페이지를 통하여 자국의 제도를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Publicly Funded Medical Care로 소개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공공의료를 Publicly Funded Health(or Medical) Care로 표현하여 공적재정으로 공급되는 의료를 공공의료로 정의하고 있다(이규식, 2017). 따라서 의료보장국가들은 민간병원이 생산한 의료라도 건강보험의료면 공공의료로 취급하기 때문에 ‘공공의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에는 ‘공공의료’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우리나라만 엉뚱하게 2000년에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이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법률을 만들어 공공병원에서 생산한 의료만 공공의료라는 한국형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다 2012년에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법 제2조 제1호 정의에서 건강보험의료가 공공의료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정된 법률에 따르면 모든 의과대학이 건강보험의료라는 공공의료를 생산하는 의사를 교육시키고 있어 공공의과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개정된 법률의 해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공공의과대학을 별도로 설립하겠다는 억지에 가까운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의사를 공공재라고 정부가 주장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료가 공공재라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의료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성립될 수 있는 공공의료의 생산요소인 의사를 공공재로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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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5년 질병보험의 지출을 보면 상병수당이 63%, 치료비 지출은 37%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1925년에는 상병수당과 치료비가 50:50이 되었고 점차 치료비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이규식, 2019).
2)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는 의료는 인간의 자위적 본능을 추구하기 위한 빼앗을 수 없는 권리(inalienable right)로 정의하고 사람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자위적 본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의료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개념이 출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Patel and Rushefsky, 1995).
3) Melhado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공공재가 됨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의료는 국방과 같이 소비의 외부효과를 갖기 때문에 공공재가 된다는 것이다.
4) 공공재와 유사한 개념으로 Musgrave(1959)는 개인이 시장을 통하여 이용하는 것보다 정부의 재정으로 제공되는 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에서 의료서비스를 가치재(merit goods)로 제시하지만, 널리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Musgrave and Musgrave(1976)는 의료서비스를 사회재(social goods)로 부르기도 한다. 사회재는 공동의 필요도(communal needs) 개념을 도입하고, 소비의 비경합성(nonrival of consumption)과 배제 적용의 불가(inapplicability of exclusion)함을 제시하고 있어 공공재 정의와 동일하다.
참고문헌
이규식 (2017), 공공의료의 올바른 정의와 발전방향, 『대한공공의학회지』, 창간호: 79-98.
이규식 (2019), 『의료보장론(개정판』, 서울: 계축문화사.
Barr DB (2007), Introduction to U.S. Health Policy: The Organization, Financing, and Delivery of Health Care in America,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Battistella RM (1997), The political economy of health services: a review and assessment of major ideological influences and the impact of new economic realities, In: Litman TJ and Robins LS eds. Health Politics and Policy: 75-108, Albany: Delmar Publisher.
Beveridge WH (1942),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 Macmillan Company, reproduced in 1969, New York: Agathon Press, Inc.
Fox DM (1986), Health Policies Health Politics: the British and American Experience 1911-1965,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Karsten SG (1995), Health care: private good vs. public good, The American Journal of Economics and Sociology, 54(2): 129-144.
Klein R (1995), The New Politics of the National Health Service (3rd), London: Longman.
Melhado EM (1998), Economist, public provision, and the market: changing values in policy debate, Journal of Health Politics, Policy and Law, 223(2): 215-263.
Musgrave RA (1959) The Theory of Public Finance: A Study in Public Economy. New York: McGraw-Hill.
Musgrave RA, Musgrave PB (1976). Public Finance in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McGraw-Hill.
Patel K and Rushefsky ME (1995), Health Care Politics and Policy in America, New York: M.E. Sharpe, Inc.
Schenone K (2012), Health Care a Public or Private Good? Economics & Institutions, MGMT 7730-SIK, Dec. 9,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Torrens PR (2002), Historical evolution and overview of health services in the United States, In: Williams SJ and Torrens PR eds. Introduction to Health Services (6th): 2-17, Albany, NY: Delmar Thomson Learning.
글 | 이규식
미국 하와이대학교 경제학 박사, 연세대학교 보건행정학과 명예교수이며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이다. 2010년 한국의료기관인증평가원 초대 원장, 건강보험료부과체계 개선기획단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