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를 뜰 때마다

수제비를 뜰 때마다

2020-09-23 0 By 월드뷰

월드뷰 SEPTEMBER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소설가)


“오성 대감을 아느냐?”

이 전도사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찾아뵌 첫 대면 자리였다. 인사를 드리고 앉자마자 첫 말씀이셨다.

“이항복 선생님요?”

아버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교과서에서….”

“우리 집안은 오성 대감의 38대손으로…….”

아버님은 매우 진지하게 집안의 뿌리를 자세히 말씀하셨다. 당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다 기억나지 않는다. 비록 가세가 기울었으나 ‘뿌리 깊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말씀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이 전도사 태몽을 이야기해 주시며 잘 도와주면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혼하고 난 후에야 나는 그날 아버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평소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명절에 집안이 서로 모였을 때도 꼭 필요한 말씀만 하셨는데, 한 문장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들은 집안의 뿌리와 태몽 이야기는 아버님 살아생전 내가 평생 아버님에게서 들은 모든 말씀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였다.  

오성 이항복 선생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님은 철저한 유학자셨다. 몇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아버님의 모습은 나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정성스레 지방을 써 모시고 어머님과 작은 어머님과 내가 함께 만든 음식을 상 위에 올리고 나면 아버님은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예를 갖추고 절을 하셨다. 제사를 지낼 때의 자세가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신지, 철저하고 절제된 모습은 그 자체로 신앙이었다. 그러한 아버님의 모습에 감히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전도하기는커녕, 제사 때마다 자석에 끌린 듯 학기 중에도 제 발로 찾아가 나는 제사 음식 만드는 것을 거들었다. 결혼하면서 남편은 부모님의 불신앙을 가장 큰 기도 제목으로 내놓았고, 우리는 함께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나는 아버님께 복음에 관하여 감히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

아버님은 경성사범 수학과를 졸업하신 수학자셨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수학정석>과 같은 유의 참고서를 직접 쓰셨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들었다. 남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라고 했다. 내가 결혼했을 당시 시댁의 가세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고, 연로하신 아버님은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공공근로에 나가 일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당신의 둘째 며느리인 내가 퍽 마음에 드셨던지 우리의 신혼집에 가끔 혼자 들르셨다. 어느 날엔가는 밀가루 한 부대를 들고 오셨다. 공공근로에서 받으신 것이었다. 지금 20킬로 쌀 한 부대 크기였다. 아버님이 거주하시던 천호동에서 우리의 신혼집이 있던 사당동까지 노인이 어떻게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내리며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셨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님이 오시면 나는 부지런히 장을 봐 소고기를 굽고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준 밑반찬으로 밥상을 차려드렸다. 아버님은 말씀 없이 맛있게 다 드셨다. 겨울엔 생굴을 사다 올려드리면 그리 맛있게 잡수셨다. 당시 이 전도사의 교회 파트 타임 봉사 사례가 14만 원이었는데, 나는 아버님이 오셨다 가실 때마다 적은 금액의 용돈을 드렸다. 어쩌면 당신이 신학생 아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늘 극구 사양하셨지만, 나는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호주머니에 넣어드렸다. 그러면 그 돈으로 경동시장에 들러 약재를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가시는 것 같았다. 당시 아버님은 <본초강목>을 홀로 공부하시면서 책에서 지시하는 대로 약초를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라면 그대로 따라서 만들어보신다고 어머님이 귀띔해주셨다.

아버님이 매번 물으시는 내 친정 어른들 안부에 한번은 ‘외할머니께서 넘어지셔서 무릎을 조금 다치셨대요.’라고 말씀드렸는데, 며칠 후 아버님은 할머니를 위한 환약을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어혈을 풀어주는 약이라고 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만하게 만든 검은 환약은 한 알씩 얇은 한약 종이에 싸여 있었는데, 그 외관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시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환약을 받으신 외할머니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시고 감격하셨다.

Stone skimming, Patagonia by RoySmith.


어느 날 아버님은 식사를 마치시고 좋아하는 커피를 드시면서 뜬금없이 내게 물으셨다.

“아가! 네가 믿는 하나님을 네가 아버지라고 부르면,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하니?”

아! 어쩌면 그때가 아버님께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였다. 맨날 아버님과 어머님을 구원해달라고 기도만 했지, 실제로 아버님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해 복음을 제시할 준비가 그러나 나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훅 들어온 어퍼컷을 맞은 복서처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곧이곧대로 말씀드렸다.

“아버님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셔야지요.”

“…허! 참…, 거 상놈의 집안이로구나!”

아버님은 더 논의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람같이 일어나 나가셨다. 장유유서와 같은 오륜을 생활의 실천 기둥으로 삼고 계신 아버님에게 며느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상을 당신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셨던 것 같다. 평소처럼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서지도 못하고 대문에 서서 저만치 휘휘 걸어가시는 아버님 뒤에다 “아버님, 살펴 가세요!”라고 겨우 소리치고 망연자실 한참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런 시아버님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시아버님과 매우 흡사한 입장을 가지고 계신 분이 나의 외할아버지이셨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해주 오 씨 시제를 총괄하는 문중의 최고 어른이셨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를 따라 시제에 간 적이 있었다. 선산이 있는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와 그 제사상 위에 오른 음식의 규모와 그 자리에 최고 어른으로 서신 할아버지의 위상에 나는 많이 놀랐다. 외할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셨기에 할아버지 댁에서는 제사를 지낸 적이 없어 그날의 광경은 내게 매우 낯설고 신기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유학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복음을 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여 외할아버지께 ‘할아버지도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할아버지는 뜻밖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나도 네 이모부(할아버지의 둘째 사위로 당시 외할아버지댁 근처에 교회를 짓고 목회하시는 목사님)에게 날마다 졸리니 이제 교회에 나가주고 싶다. 교인들에게 네 이모부 체면도 있을 거고…. 그런데 오 씨 문중을 내가 책임지고 있으니….”

할아버지 말씀에 나는 단박에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날의 시제 풍경이 떠올랐다. 나의 외할아버지나 시아버님이나 평생 꼿꼿한 선비와 같이 누구에게 거짓말도, 나쁜 짓도, 못 할 짓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바르게 살아오신 분들에게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죄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등을 설명하여 수긍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 목숨처럼 여기는 조상제사를 다 그만두어야 한다니!

며느리가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신을 당신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난감함을 유학자이신 아버님은 진실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결혼한 이듬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나는 아버님께 예수님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씀드릴 수 없었다.

졸업식장에서 남편이 수석졸업자로, 어쩌다 보니 내가 차석 졸업으로 단 위에 올라가 상을 받게 되었다. 졸업생과 축하객으로 꽉 찬 졸업식장 어딘가에 앉아계실 아버님이 떠올랐다. 당시 부상으로 엠마오 성경 찬송 한 세트를 받았는데, 나중에 집에 와 열어보니 성경책 첫 장에 큰 글씨로 각각 성적 최우수상, 우수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편이 받은 성경책은 나의 친정아버지께, 내가 받은 성경책은 시아버님께 드리자고 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다음날 나는 내 이름이 선명히 적힌 성경 찬송가를 들고 아버님 댁으로 갔다. 아버님 앞에 부상으로 받은 성경 찬송가책을 놓고 말씀드렸다.

“아버님! 어제 졸업식장에서 많은 졸업생을 보셨지요? 거기 앉은 대부분 졸업생의 부모님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이세요. 그 부모님들은 신학교에 자녀를 보내놓고 매일 새벽마다 밤마다 기도하셨을 거예요. 아범이나 저처럼 부모님이 집사님도 아니신 분들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어제 보셨지요. 아범이 수석으로 제가 차석으로 졸업했어요.”

거기까지 말씀드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생 이백 여분이 넘는 목사님의 성함을 부르며 기도하시는 친할머니와 엄마는 계셨지만 정작 부모님 기도의 지원 없이 거기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겨우 말을 이어갔다.

“아버님, 이제 아범은 더 공부하기 위해서 외국에 나가야 해요. 앞으로 10년쯤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이제는 저희도 아버님의 기도가 필요해요. 이건 어제 제가 받은 상품이에요. 이 책을 한 번만 다 읽어주세요. 그리고 이 책 들고 교회에 나가주세요.”

아버님은 끝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감히 눈을 들어 아버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생글생글 웃으며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주던 며느리가 정색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아버님은 매우 당황하셨음이 분명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지성적이고 생의 연륜이 깊으신 아버님을 상대로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왜 아버님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지 설명하여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자식으로서 부모의 책무에 기대어 아버님께 읍소했다. 그리고 아버님이라면 성경책을 한 번만 읽으시면 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는지 바로 아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아버님께서 예수님을 알게 되시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그 진지함과 결연함보다 더한 충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시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상에!

아버님은 바로 그 주일 교회에 출석하셨다. 11시 예배인데, 9시 반에 오셔서 본당에 앉아계신다고 부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며느리의 느닷없는 눈물의 호소에 ‘그래, 내가 그럼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마.’라든가 ‘내가 교회에 다니겠다.’라는 어떤 언질도 없으셨지만 바로 그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신 아버님이 나는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했다. 칠십 연세, 평생 유학자로 살아오신 아버님의 그 파격적인 발걸음은 곧 기적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나의 믿음대로 우리가 유학을 떠나온 이후에도 아버님은 한결같은 자세로 그 무거운(성경책과 찬송가가 분리된 두 권 책의 무게!) 성경책을 들고 9시 반이면 본당에 와 앉아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멀리 미국 땅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버님 교회 가실 때 헌금도 하시고, 차비도 하시라고 소액의 달러를 송금해 드리고 간간이 전화를 드리는 일이었다.

아버님은 딱 한 번 뉴욕에 있는 내게 간결한 편지를 보내셨다.

“아가! 고생하는 너희를 돕지 못해 면목이 서질 않고 네가 참 고맙구나!”

그리고 아버님은 딱 한 번 내 꿈에 찾아오셨다. 우리가 살고 있던 뉴욕 플러싱의 한국식품을 파는 구화 식품 앞이었다. 아버님은 검은 비닐봉지에 뭔가를 담아 내게 건네주셨는데 열어보니 큰 멜론만 한 사과였다. 빨간 사과가 얼마나 크고 탐스럽던지 너무 놀라 ‘어디서 이렇게 큰 사과를 사셨어요?’ 하고 여쭤보려니 아버님은 사라지고 안 계셨다. 꿈에서 깨어 너무나 생생하고 또 허전하여 이웃의 언니 같은 전도사님께 물었다. ‘태몽이네! 그렇게 기다리더니 할아버지께서 둘째를 주시려나 보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곧이어 입덧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님이 태몽으로 주신 둘째도 품에 안겨드리고 두 손녀를 바라보시며 내가 차린 식탁에서 흐뭇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을 그리며 아버님이 우리가 귀국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시길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둘째가 태어나고 일 년이 조금 지난 즈음 돌아가셨다.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세어보니 나는 겨우 삼 년 삼 개월 아버님을 뵈었다. 그 기간도 일 년에 겨우 몇 차례 뵈었을 뿐이니…, 참 아쉽고 허망하다.


나는 글을 쓰다 말고 일어나 밀가루를 꺼내 적당히 반죽해 냉장고에 넣었다. 그 해, 아버님이 밀가루 한 부대를 갖다 주신 신혼 첫 그 해, 나는 평생 먹은 수제비보다 많은 양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남편이 수제비를 좋아해 다행이었다. 밀가루 반죽에 손목이 아프다고 하자 엄마는 냉장고 안에 잠시 넣어두면 숙성되는 비법을 일러주셨다. 먼 타국 유학 생활 동안에도 밀가루를 사다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는데, 수제비를 뜰 때마다 나는 연세 드셨으나 늘 소년처럼 맑으셨던 아버님이 그립고 또 그리워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익히 외울 만큼 들었음에도 웃으며 여전히 들어주었다.

오늘도 수제비를 먹으며 우리 가족은 또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종일 비가 내린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하였다. 저서로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