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국군 지휘관 2: 김종오 장군

6·25전쟁과 국군 지휘관 2: 김종오 장군

2020-07-19 0 By worldview

월드뷰 07 JULY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WORLDVIEW MOVEMENT 1


글/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


세계 전쟁사에도 높게 평가받는 김종오 장군


6·25전쟁 당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큰 전투마다 김종오 장군이 등장한다. 김종오 장군은 2010년 6·25전쟁 발발 60주년 당시, 명예 오성장군으로 임명하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 대한민국 현역 군인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 그때 한국의 묘한 정치적인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종오 장군은 6·25전쟁 최고의 용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대형 전투의 현장에서 지휘관으로 가장 많은 부침을 경험했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던 당시, 김종오 장군은 춘천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육군 6사단장이었다. 당시에 국군은 1, 2, 3, 5, 6, 7, 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8개 사단급 부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거의 연대 규모에 불과하였고, 중화기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군 내부 누군가 국군의 방어 전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의로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심지어 대부분 부대의 장병들이 휴가를 가거나 모내기 지원을 나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38선의 중동부 전선인 춘천 지역을 방어하던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은,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오히려 1950년 6월 22일부터 경계 태세를 강화하여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하고, 북한 공산군이 공격해올 경우 진입 예상로에서 전투 훈련을 할 정도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대한민국을 향하여 기습 공격을 시작할 때, 중동부 전선을 담당한 2사단, 5사단, 12사단으로 구성된 북한 공산군 2군단은, 24,000여 명의 병력과 중장비로 무장하고, 춘천 지역을 공격해왔다. 그런데 춘천 지역을 공격하는 북한 공산군 2군단 전력의 25% 규모에 불과한, 단지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구성된 육군 6사단은 국군의 자부심을 지켜주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훌륭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국군 6사단 7연대, 압록강 변 초산 도착.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병사들은 1950년 10월 26일 한반도와 중공의 접경 마을인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병사가, 자신의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고 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이 물을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고, 이 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은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국군 6사단 7연대는 1950년 10월 25일부터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공군의 공격에 차단되어, 많은 병력을 잃은 채, 평안북도 개천에 있던 본대로 귀환하였다. (일자: 1950년 10월 26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전쟁 초기,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서부전선의 다른 부대와는 달리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은,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공산군의 전력의 절반을 파괴하여, 전쟁의 상황을 뒤틀어 놓았다. 춘천 지역을 공격했던 북한군 2군단은 서부전선의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춘천을 점령하고, 남진하여 수원마저 점령하여, 국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할 작전을 계획했다. 만약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이 춘천 지역에서 북한군 2군단을 궤멸시키지 못했다면, 서부전선의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국군 병력의 대부분은 아예 서울 수원 사이에서 북한 공산군에 포위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오죽하였으면 전쟁 발발 일주일도 안 되어 북한 공산군 2군단장과 예하 사단장들을 교체할 정도였을까를 생각하면, 육군 6사단의 활약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6·25 한국전쟁 초기, 북한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육군 6사단은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한 육군 본부의 명령으로 충주를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여, 낙동강 전선 방어선을 형성하고, 전투에 임했다는 점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물러나는 상황에서도 북한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이로써 낙동강 전선에서도 북한 공산군이 가장 증오하는 부대가 김종오 장군의 육군 6사단이었다고 할 정도이다.

춘천에서 육군 6사단에 궤멸하여 새로 임명되었던 북한 공산군 2군단장 김무정이 “6사단을 박살 내야 한다. 남조선 사단은 그것 하나다.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릴 수 있다. 밀어 족쳐서 6사단을 격멸하고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 와라.”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의 정신력과 전투력은 대단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경북 함창 인근의 원동에서, 국군 육군 6사단 1연대 병사가, 85mm 대전차포로 북한 공산군을 공격하고 있다. (일자: 1950년 7월 26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 육군 6사단 18연대 병사가 새로 보급된 30 캘리버 수랭식 기관총 적응훈련을 하고 있다. 육군 6사단은 미 육군 24사단과 인근에서 작전 중이다. (일자: 1950년 8월 13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 육군 6사단 제6야전병원의 모습이다. 인근의 학교를 병원으로 사용 중이었으며, 의사 7명, 간호사 7명, 위생병 15명이 352명의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국군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싸웠다. (일자: 1950년 8월 2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 육군 6사단 병사들이 북한 공산군을 향해 새로 보급된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다. (일자: 1950년 8월 31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휴전협상 결렬과 백마고지 전투


6·25전쟁 중반 이후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세가 지속됐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지금의 휴전선 인근에서 전선이 형성되어, 작은 규모로 부딪히면서도 대규모의 전면공세는 없었다. 하지만 북한 공산군이나 중공군 포로 중에 자신들의 출신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반공포로들이 워낙 많아, 휴전협상의 진전이 없었다. 제네바협정을 핑계로 포로들을 무조건 본국으로 송환하여야 한다는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에 맞서, 미국은 포로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이 살아갈 나라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인도주의적인 주장을 한다. 포로 협상에서 서로 간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휴전협상이 지연되자,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장악한 전선의 주요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 공산군은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 일대에서,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일련의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중공군은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평야 지대를 장악하고, 중부 전선에 있는 유엔군과 국군의 가장 중요한 병참 보급도로인 3번 국도를 포함해 많은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여, 철원의 백마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또한, 중공군 38군은 중공군 112·113·114사단으로 구성되어, 다시 대규모의 병력으로 유엔군과 국군을 공격했다.

1952년 10월 6일~15일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국군 육군 9사단과 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8군 백마고지 전투 현장이다. 중공군에 빼앗긴 철원 북쪽의 육군 9사단 점령 목표를 보여주는 백마고지 앞면의 모습이다. (일자: 1952년 10월 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1952년 10월 6일~15일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국군 육군 9사단과 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8군 백마고지 전투 현장이다. 중공군에 빼앗긴 철원 북쪽의 육군 9사단 점령 목표에, 미 포병 부대가 화력 지원을 하는 백마고지 뒷면의 모습이다. (일자: 1952년 10월 8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이에 맞서, 김종오 장군은 1952년 5월 30일, 국군 보병 9사단장으로 취임하여 이 지역을 방어한다. 이로써 김 장군은 6·25 한국전쟁사에 한 획을 긋는 백마고지 전투를 지휘한다. 그리고 김 장군은 백마고지 사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대장과 미 9군단장 젠킨스(Reuben E. Jenkins) 중장과의 협의를 거쳐, 미군 포병의 대규모 화력 지원과 미 공군의 강력한 항공기 폭격 지원을 받아낸다. 당연히 화력 지원을 하는 것이었지만, 김종오 장군은 후방 지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6·25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최초로 전선에 등장하였을 때, 유엔군과 국군이 이들의 인해전술에 공포를 느꼈다면, 이때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은 미 육해공군의 무지막지한 화력 지원으로 인한 공포로 전투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향해 1952년 10월 6일, 최초 공격을 시작한다.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9사단과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8군은, 10월 15일까지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벌여 24회나 백마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대혈전을 벌인다. 결국, 국군 9사단 병사들의 투혼으로 10월 15일 중공군 38군 병력 중 절반에 가까운 15,000명이 전사한다. 국군 역시 3,4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치열한 전투였다. 이로써 중공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궤멸했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며 전투에 임한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백마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6·25 한국전쟁 당시, 더 이상의 인해전술을 전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소련에서 스탈린과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듯이, 중국공산당의 모택동(毛澤東)도 똑같았다. 모택동의 무모한 전략으로 중공군은 병사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너무도 쉽게 죽음의 현장으로 몰고 나갔는데, 이 백마고지 전투로 인해서 이를 중단시키게 되었다.

필자가 백마고지 전투의 많은 희생을 생각할 때, 과연 이렇게 무모한 전투를 해야 했는가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종오 장군은 6·25전쟁 내내 병사들의 무모한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무조건 돌격 명령은 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의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 김종오 장군이 참모들과 나눈 대화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인물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론 백마고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아군이 한 번 더 고지를 빼앗기게 되면, 아군을 안전 지역으로 완전히 대피시킨 후, 최대한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적을 일거에 괴멸하고 나서,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작전을 세우겠다. 적에게 최대한의 인원 출혈을 강요하여, 전투 의지를 꺾어버리겠다.”

6·25전쟁 당시, 위기 상황에서도 철저한 준비와 승리한다는 강력한 의지로 나라를 지켜낸, 전투 현장의 지휘관 김종오 장군의 활약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1952년 10월 6일~15일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국군 육군 9사단과 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8군 백마고지 전투 현장이다. 전투 중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각종 무기를 전시해 놓은 모습이다. (일자: 1952년 10월 12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육군사관학교 교장 김종오 장군이 미 9군단 활주로에 도착해, 미 9군단 참모장 로렌스 듀이 준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일자: 1953년 4월 9일. 자료: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안재철 저)>)

<mv14000@gmail.com>


글 | 안재철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재 The World Peace Freedom United(월드피스 자유연합)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꿈>, <생명의 항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