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에 신이 산다고?
2020-06-26– 아예 신을 바꾸자는 무신론자들의 도발 ‘이웃집에 신이 산다’ –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4 |
글/ 남정욱(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어느 날 불쑥 정체불명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와 당신의 남은 수명을 알려준다면?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The Brand New Testament, 2015)>는 이렇게 흥미진진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잔여수명이 1초라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다음 순간 튀어나온 화물 트럭에 받혀 죽는다. 수명이 20년이라고 통보받은 사람은 시험 삼아 10층 빌딩에서 몸을 날리고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대신 중력의 법칙을 실감한다. 예상보다 긴 수명을 통보받은 늙은이는 흐뭇하고 영원히 청춘일 줄 알았던 젊은이는 짧게 통보받은 수명으로 절망한다. 전 세계가 혼란으로 엉망진창인데 이게 다 한 집안의 불화 덕분이다. 일반 가정집이 아니다. 신(神)과 그의 가족이다. 영화 속 신은 추측처럼 2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에 살고 있지 않다. 대신 자신이 만든 지구의 브뤼셀에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과 산다. 신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과 많이 다르다. 음주, 흡연은 기본이고 툭하면 아내와 딸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빗나간 가부장제를 실현한다. 그의 취미생활은 인간을 골탕 먹이는 일이다. 심심해서 인류를 창조했지만 그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피조물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서 빵이 떨어지면 잼을 바른 쪽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피의 법칙도 실은 신이 고안한 ‘보편짜증유발의 법칙’ 중 하나다. 이런 게 수천 개나 되니 우리의 일상이 피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정도 사소한 재미로는 신의 권태를 달래지 못한다. 가뭄,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열차 탈선, 항공기 추락 같은 인재도 알고 보면 다 신의 작품이다. 가학성 충만한 신에게도 할 말은 있다. 어차피 내가 만든 세상이고 피조물인데 괴롭히면 좀 어때? 사춘기에 접어든 딸 ‘에아’는 그런 아빠가 너무 싫다. 그래서 아빠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아빠의 컴퓨터를 해킹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죽는 날짜를 문자로 전송한 뒤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고 집을 탈출한다. 이것이 ‘잔여수명 유출사건’의 전말이다. 에아의 가출은 단순 반항이 아니다. 인류를 해방시킬 새로운 신약성경을 쓰는 것이 에아의 진짜 목적이다. 술에서 깬 신은 분노에 차서 외친다. “죽는 날을 알면 누가 내 말을 들어!” 다는 아니겠지만 인간은 나약함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신을 믿는다. 그런데 죽는 날짜를 다 알아버렸으니 신을 두려워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에아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오빠인 ‘J.C’가 했던 것처럼 사도(使徒)를 만드는 것이다. 사도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6명이다. 6명인 이유는 에아의 엄마 그러니까 여신이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이고(오빠가 만든 사도 12명에 6명을 더하면 경기가 가능한 야구팀 둘이 나온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이 조화로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빠가 선발했던 사도들만큼이나 에아가 뽑은 사도들도 비범하다. 외팔이 미녀, 중증 워커홀릭, 성도착자, 킬러, 유한마담, 소녀가 되고 싶은 소년이 에아의 사도들이다. 이 사도들이 모여 에아를 돕는다는 얘기인데 솔직히 그게 어떤 프로세스로 그렇게 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한편, 노발대발한 끝에 에아를 잡으러 인간 세상으로 온 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노숙자로 몰려 매를 맞고 상대방의 잊고 싶은 과거를 들춰내 매를 맞고 치료해주는 의사를 조롱하다 매를 맞고 결국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때마다 신은 “오 마이 갓”을 외친다(대체 자기가 자기는 불러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혹시 신들에게도 신이 있다는 이야기?).
영화는 코믹하지만 불경스럽고 불편하다. 신에 대한 감독의 항변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불만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그 땅에 인간을 만들었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고 즐거워야지 왜 고통과 슬픔만 내내 이어지느냐 따져 묻는다. 그런 신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느냐 선동한다(결국 감옥에 처넣는다). 페미니즘도 과다하다. 아빠(남자 신)가 사라진 다음 세상을 관장하는 것은 엄마(여자 신)다. 엄마가 컴퓨터를 재부팅한 다음부터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에아의 사도 중 외팔이 미녀와 킬러는 연인이 된다. 임신을 하는데 배가 불러오는 것은 남자 쪽이다. 유한마담은 고릴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영화 속 새로운 세상은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지키려는 하나님의 질서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다. 그럼 대체 이 영화를 왜 소개하느냐 물으실지 모르겠다. 이유는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선제적으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고 인류의 고통 중 그 해결책이 인간의 영역에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며 기아와 질병과 전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탓임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기 때문인 동시에 서로 사랑하라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알려주었는데 절대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말하는 소생이나 듣는 여러분이나 너무 부담스럽고 그저 다만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앞에 열거한 각종 ‘때문’을 다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과다하게 심각해지지는 말자는 얘기다).
“재미만 있으면 그 어떤 신성모독도 상관없다는 얘기입니까?” 물으신다면 할 말은 없다. 세상 모든 일에는 ‘선(線)’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영화는 과다하게 이 ‘선’을 넘어 진격한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나 완고한 것과 견고한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원칙 없이 껍데기만 뻣뻣한 것이고 후자는 중심이 잡힌 채 열려 있는 것이다. 완고한 것은 도발에 분노로 반응한다. 그러나 분노는 허약한 내면의 반영이다. 이 정도 도발에 ‘경기(驚氣)’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도발에 말려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견고한 사람이라면 감독의 질문에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충분히 동감함. 그러나 모든 것을 왜 신에게 덮어씌우려는지 알 수가 없음. 아이들이 장난감을 어질러 놓고 이를 책망하는 부모에게 당신이 장난감을 사줬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임.”
영화로 돌아가자. 영상은 가볍고 대사는 발랄하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거든.” 같은 대사에 웃지 않을 사람은 없다. 도입부에도 썼지만 ‘수명유출사태’가 벌어진 직후 달라진 세상의 모습도 재미있다. 일단 국지적 군사 분쟁이 일시에 종결된다. 다들 총과 탱크를 버리고 집으로 가버린다. 남은 시간을 확인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한다. 누구는 트롬본을 배우고 누구는 정교한 타이타닉 모형을 만든다. 영화 내용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날짜만 모르지 우리는 어느 날인가 결국 다 죽는다.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현재의 생에서 하는 것, 그게 꼭 잔여수명 같은 걸 알아야만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삶이 마음에 안 들어 “내 인생은 왜 이런 식이냐”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해준다. “그것은 네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관람객 평점이 1 아니면 10이다. 호불호가 극단으로 갈리는 영화이니 이 점 유념하여 감상 여부를 결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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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정욱
작가이며 출판영화방송 등 문화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사>, <결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