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 증명 5: 종교적 논증(완)
2020-06-19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종교적 논증은 모든 인류에게 신을 숭배하는 생활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증이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모든 인류에게는 시대적으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북극의 에스키모인들로부터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신을 숭배하는 관습이 나타남을 증언한다. 그러면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신 숭배 관습은 도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첫째로, 볼테르(Voltaire)는 원래 사람들은 신에 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제사를 드리다 보니까 신에 대한 관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제사기원설이라고 한다. 인류가 신에게 제사를 드려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제사가 신을 향하여 드리는 예식이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제사 드리는 장면을 보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믿던, 믿지 않던, 제사 드리는 시간에 신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제사라는 관념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하여 제사기원설은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한다. 제사 드리는 자 자신이 제사라는 관념을 자기 자신에게 넣어 준 일이 없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제사에 대하여 배웠음이 분명한데, 제사 드리는 자 자신의 경우를 미루어 생각해 볼 때 그 누군가도 그 자신이 그 관념을 자기 자신에게 넣어 준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인간에게 신에 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제사 개념을 넣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사의 관념은 인간으로부터 올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 안에는 제사 관념이 있다. 누군가가 이 관념을 인간에게 넣어 주었으니까 이 관념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군가는 첫째로, 인간이 아니지만 인격적인 존재이어야 하며, 둘째로, 인간 안에 들어온 신 관념을 넉넉히 다룰 만한, 인간보다 더 크고 깊은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그 존재 후보로서 가장 적절한 자는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둘째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와 흄(David Hume)은 이른바 공포기원설을 주장했다. 인류는 불, 지진, 폭풍우, 맹수와 같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자연의 힘을 보고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기 마련이다.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이 해로운 힘들을 정복해 버리면 최선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제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전략은 그 해로운 힘을 주인으로 모시고 철저하게 주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나 크고 강력하여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이 해로운 힘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나온 것이 신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어떤 힘을 보고 그 힘이 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 이 질문에 대하여 공포기원설은 답변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약초꾼이 약초를 캐기 위하여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풀을 보고 “이것은 약초야”라고 알아본다고 가정해 보자. 이 약초꾼이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그 풀을 보는 순간 그 풀이 특정한 기능을 가진 약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보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람 머릿속에 이미 “이런 색깔을 띠고 있고, 이런 냄새가 나고, 모양은 이렇게 생긴 것이 바로 약초다.”라는 교육을 받아서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있고, 이 입력된 정보에 대입시켜서 들어맞으니까 그 풀이 약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해로운 힘들을 보고 이 힘들을 신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신 관념이 표준적인 틀로 이미 내장되어 있으니까 이 틀에 대입시켜 보고는 이 힘들이 곧 신이라고 규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크고 강력하며,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세력이 곧 신이다.”라는 관념의 틀이 인간의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 신 관념의 틀은 누가 넣어 주었을까? 인간 자신이 그것을 넣어 준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 나에게 그런 기억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인류에게 그런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일 수밖에 없는가? 인격적인 존재이면서 신 관념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이 조건에 맞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셋째로, 어거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인간들 가운데는 어떤 특정한 물건들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거나 이 물건들이 자기의 수호신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바, 이 습성을 반복하다가 자연스럽게 신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주물숭배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도 주객이 전도된 설명이다. 자기를 수호해 주는 물건을 신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은 신에 대한 관념이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제사기원설이나 공포기원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물숭배설의 경우에도 인간 안에 있는 신 관념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명도 하지 않는다. 앞의 두 이론의 경우와 같이 주물숭배설도 하나님만이 이 관념을 넣어 주시기에 유일하게 적합한 후보라고 말해야 결함이 보완된다.
넷째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신 관념이 인간의 꿈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앞의 세 이론들 – 제사기원설, 공포기원설, 주물숭배설 – 이 한결같이 신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스펜서는 신 관념의 기원을 밝힌다. 그러면 신 관념이 꿈으로부터 기원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사람이 꿈속에서 이미 죽은 자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타난 이미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르다. 첫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는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다. 현실 속에서 죽은 자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사람이 꿈속에서는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기도 한다. 둘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은 적어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셋째로, 꿈속에 나타난 죽은 자는 몸이 없는 존재다. 꿈속에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지만, 그 형체의 몸은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죽은 자로서 몸이라는 형체가 없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면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 – 이 존재를 우리는 귀신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꿈속에서 귀신을 본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귀신을 만나는 경험을 통하여 신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령기원설이라고 부른다.
스펜서는 신 관념의 기원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는 앞의 세 이론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스펜서도 여전히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꿈속에서 보는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또 어디서 기원했느냐 하는 것이다. 꿈속에 나타나 몸은 없이 형체만 가지고 영원불멸하는 존재로서 활동하는 귀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꿈속에 이런 장면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장면을 발생시킨 근원이 되는 자료가 인간 안에 있다는 뜻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Zigmund Freud)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심리적 기재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심리적인 조작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마치 증명된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끼친 해악이 큰 심리학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이해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인간의 영혼은 이성 또는 의식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견해는 사실이 아니며 인간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본 관점임을 증명했다. 프로이트는 세 가지 현상에 주목했다. 하나는 언어학습이다. 아이들에게 단어나 문장을 가르쳐 주면 다 잊어버린다. 단어들이 의식의 세계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면 놀랍게도 말문이 트이는데, 이때 엄청난 분량의 단어들을 구사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만일 의식의 세계가 인간의 영혼의 전부라면 이 현상은 설명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정신질환자의 횡설수설이다. 횡설수설은 이성의 세계 안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성의 세계에는 없는 횡설수설이 나온다는 것은 그 내용의 단편들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셋째는 꿈이다. 꿈속에서는 현실 속에서 곧, 의식의 세계 안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세계가 전개된다. 이 세계를 형성시킨 자료가 인간 안의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세 가지 현상에 근거하여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의 세계 밑에 의식으로는 감지가 안 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어떤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관점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본 서양철학의 관점보다 훨씬 더 성경에 가까운 이론이다. 특히 바울은 인간은 겉 사람(이성 또는 의식의 세계에 해당)으로만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더욱 깊은 차원인 속사람의 차원에까지 뻗어 있다고 보았는데, 바울이 생각하는 겉 사람과 속사람의 구도와 프로이트가 보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도는 대체로 상응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꿈속에 나타난 세계는 인간 안의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귀신의 관념 곧 신의 관념이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귀신이 꿈속에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귀신을 보고 그 특징을 간파하여 그것이 곧 신이라고 판단한다는 것도 이미 인간 안에 신의 관념이 실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그 관념은 누가 넣어 주었는가? 그 적절한 후보는 앞의 세 논증의 경우에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와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Th. 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