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의 흐름 가운데서 본 6·25 전쟁과 오늘의 과제

국제정치의 흐름 가운데서 본 6·25 전쟁과 오늘의 과제

2020-06-16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4


글/ 박명수(서울신학대 명예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


6·25를 보는 눈


6·25전쟁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많은 학자들은 6·25전쟁이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전쟁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월드뷰>가 이에 대한 특집을 기획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필자는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에 태어나 6·25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안에 6·25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친척들이 여러 명 있다. 인민군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분도 있고, 경찰 방위대에 속했었다고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된 분도 있으며, 지주 계급이라고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분도 계시다. 필자의 장인도 6·25전쟁 때 이북에서 월남하였다. 6·25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실종된 분이 당시 전체 인구의 1/10에 달하니 한국인의 대부분은 6·25전쟁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6·25전쟁을 개인의 시각보다 넓은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6·25전쟁은 내전이 아니었다. 6·25전쟁은 근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미·소 양국으로도, 또한 남과 북의 두 정권에게도 이것은 체제 수호 및 확장의 전쟁이었다. 6·25전쟁을 통해서 양 진영은 누가 자신의 편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6·25전쟁은 본질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소련과 이것을 막으려는 미국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이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싸운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냉전 사학자 개디스(John Lewis Gaddis)의 말처럼, “전쟁은 끝났지만 축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미국은 소련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패권을 지닌 미국과 언젠가는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이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승리로 끝나자 소련은 자신과 인접한 국가를 공산주의로 점령해 나갔고, 그 결과 많은 나라들이 공산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소련에게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의 협력관계는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원래 소련과의 협력을 전제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생각하였고,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산국가인 소련은 이에 협조하지 않았고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가지고 갔다. 1947년 11월에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유엔의 감시하에 한반도에서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적이고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물론 소련은 이 같은 미국 주도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남쪽 지역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로 인해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오랫동안 하나의 공동체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38선으로 갈라진 남과 북의 분단을 수용하기 어려웠고 이에 북한은 통일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김일성은 일찍이 소련의 도움으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였다. 북한으로 넘어간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은 “남한에는 남로당이 건재하고 있어서 소위 민족해방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북한의 움직임을 무시했다.

1949년 중국에서는 오랜 내전 끝에 공산당이 승리하며 국민당의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승기를 잡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소련에서 분리하여 유고와 같은 독립적인 공산국가로 만들기 원했다. 이에 미국은 1950년 1월 대만과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며 중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소련은 이런 미국의 태도를 미국의 한국전 개입 반대로 이해했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락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으로 인해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한국군에게 무기를 제공하지 않고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채 남한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남한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서 남한을 침략했다. 미국은 즉각 유엔에 이를 알렸고,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북한의 행위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유엔 회원국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공산세력과의 전쟁을 미국 단독으로 수행하기보다는 유엔의 이름으로 수행하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는 참전에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되었고, 전쟁을 유엔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몰고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미국은 왜 그렇게 빨리 전쟁에 개입했을까? 트루먼(Harry S. Truman)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가자 미국 내에서 트루먼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만일 중국 다음으로 대한민국까지 공산국가가 될 경우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이 흔들릴 것은 물론이고 공산주의의 침략을 묵인했을 때 소련에게 미국이 한없이 양보한다는 잘못된 사인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루먼은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6·25전쟁 당시 카톨릭 신자로 보이는 병사들을 위해 군종 사제가 미사를 집례하고 있다. (U.S. Army)


6·25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소련의 6·25전쟁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첫째로 소련은 6·25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스탈린(Joseph Stalin)이 김일성에게 했던 말이다. 둘째로 소련은 만일에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미국의 6·25전쟁 개입은 공산주의의 입지를 강화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소련은 두 가지 위협 속에 있었다. 소련과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서방 세력에게 밀리고 있었고, 여기에 쏟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켜 미국의 시선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신생 중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소련은 6·25전쟁에 미국이 개입할 경우 중공군이 참전할 것을 약속을 받았고, 이것은 중공을 분명히 소련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에게 6·25전쟁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유익한 전쟁이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이고, 만일 미국이 참전한다면 미국의 군대를 분산시켜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유럽의 공산국가들이 안전해질 것이었다. 게다가 중공군이 참전할 경우 중공을 분명히 소련 편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어떤가? 미국은 원래 한반도 문제의 관할은 유엔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유엔을 내세워서 한반도를 관리하고자 했고 한반도의 전쟁을 통해서 소수의 공산주의 국가 대 다수의 유엔 참여 국가의 구도로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결국 미국의 이런 전략은 성공했다. 그래서 16개 국가들이 미국과 함께 유엔의 이름으로 한반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계 지형은 소수의 공산주의 국가 대 다수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재편되었다. 6·25전쟁을 통해서 소련은 중국을 얻었지만 미국은 대다수의 국가를 자유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국제 정치의 흐름 가운데서 이승만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려고 했는가? 이승만은 1945년 8월 한반도에 38선이라는 군사적 전선이 설정될 때부터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 소, 영, 중 각국의 정상들에게 전보를 보내 “통합된 독립민주한국(A United Independent Democratic Korea)”을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해방 직후 그가 외쳤던 것은 신탁통치의 반대(독립)와 38선의 철폐, 즉 통일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에 인민정부를 세우고, 토지 혁명을 실시하고, 군대를 양성했다. 이승만은 선 통일, 후 정부 수립의 입장에서 선 정부 수립, 후 통일로 입장을 바꾸었다. 북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한 마당에 남한에 민주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공산화는 불 보듯 뻔했다. 이런 이승만의 요구를 결국은 미국도 받아들여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결국은 남한에 민주 정부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유엔과 미국 그리고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1947년 11월 유엔이 결의한 것은 남북을 포함하는 중앙 정부였고,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한 것은 한반도 전체의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전 단계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정부 수립 후 유엔과 한반도의 가장 큰 과제는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를 자유 통일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6·25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트루먼의 기본 입장은 공산주의의 공격을 저지하여 38선을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입장은 달랐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상 유지를,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한군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었을 때, 유엔과 미국은 전쟁의 목표를 수정하여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을 허락하였다. 여기에 이승만은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그제서야 자유통일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엔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의지는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은 중공군의 개입 때문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모택동은 원래의 약속대로 한반도에 개입하였고, 이제 중공군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되었다. 중공과 소련은 같은 공산 집단으로서 강력한 동맹이 되었고, 미국과 중국은 적대국이 된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계획대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자유통일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대신 자신의 진영이 내부적으로 공고화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결국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상처만 더욱 깊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


6·25전쟁과 오늘의 대한민국


6·25전쟁은 냉전 초기에 있었던 국제 정치의 산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체제가 좋은지 알지 못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산 혁명의 성공은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믿었다. 공고하리라 믿었던 공산주의는 80년대 말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이런 역사적인 변화에 대한 세계사적인, 철학적인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한에서는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었고, 이런 세력들은 북한과 가까워졌다. 이들은 공산권의 붕괴를 가슴 아파하였고, 자유진영의 승리를 애써 감추려 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민주화 세력과 종북 세력은 그 경계가 모호해졌고, 냉전의 종식과 자유세계의 승리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2020년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1950년대의 한국인보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시작된 냉전시대는 1980년대 말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역사는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을 무시한 공산주의 체제보다는 개인의 인권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에게 더 훌륭한 제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제 공산주의는 패배한 이념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존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빈곤하며 개인의 인권이 처참하게 무시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이 지금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통해서 북한의 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한반도를 자유 통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승만의 꿈은 현재에도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에 기초한 남북한의 평화 통일이다. 대한민국은 무력으로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면 북한 동포들이 자유를 맛보고, 한반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6·25 전쟁이 자유 대한민국에 부과한 과제이다.

<mspark@stu.ac.kr>


글 | 박명수

미국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학(PhD)을 공부하고 서울신대 신대원장과 한국교회사 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부회장이며 미래한국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