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기독교와 6·25전쟁
2020-06-14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2 |
글/ 김명구(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
1. 공산정권에 비협조적이어서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탄압받았고 월남해야 했나?
최근 한국 학계의 일각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첫째,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1945년 말까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비교적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둘째, 해방 직후 북한의 교회는 정치적이었다.
셋째, 1946년 3·1절 기념행사를 계기로 공산정권을 비협조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월남해야 할 정도로 탄압받게 되었다. 갓 출범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해방 후 처음 맞는 3·1운동 기념행사를 평양 시민대회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지만, 공산정권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교회는 독자적으로 기념 예배를 강행했다.
넷째, 북한의 교회가 공산정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신탁통치안에 반대한 이유도 있지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정책, 곧 교인들이 토지개혁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교회가 북한 정권의 정책에 협조적이었거나 엄격히 정교분리를 했다면 박해를 피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북한 정권은 신앙의 자유를 거듭 보장하고 민족주의를 내세웠지만, 그것은 명분이었다. 애초부터 유물론 이데올로기 아래 기독교회의 존립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기독교회와 목회자들은 친미파이며 미국의 앞잡이였고 “제국주의자들의 정탐꾼”이었다. 그리고 “민족반역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북한이 천주교회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북한 정권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공산정권이 친정부적인 태도를 보이고 정교분리를 엄격히 지키려 했던 천주교회도 예외 없이 말살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 대해서는 반공적 태도와 친미주의 경향을 문제 삼았고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외세라며 시복(諡福) 대상자 대다수를 살해했다. 2,850개의 북한교회와 수십만의 교인들, 신학교들, 숭실학교 등 수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일순에 사라졌다. 천주교회도 예외가 없었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종교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북한지역 천주교회의 안녕을 기대했다. 그런 이유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위해 서울에 입성한 소련군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신자들과 학생, 수녀, 신부들”에게 환영을 나가라고 지시했고 프랑스 대사관에 투숙 예정인 소련 장군들을 예방하겠다는 요청도 했다.
그런데 1945년 회령 본당 주임신부 비트마로 파렌코프(Witmarus Farrenkopf, 朴偉明)가 8월 21일 체포되어 소련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9월 2일에는 만주의 팔로군이 연길교구의 수도원을 접수하며 엔겔레만 첼네르 수사를 사살했다. 다음 해 5월에는 유 셀바시오 신부가 살해당했다. 팔로군 길동 보안사령부는 쁘레헬(Brehel) 주교를 비롯해 독일인 신부 십구 명과 수사 십칠 명과 스위스 수녀 15명을 가두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감 되었던 본 이파시오 신부가 옥사했다. 그런데도 한국 천주교회는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때 북한에는 약 5만 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있었다. 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하려고 했고, 최소한 일제 시대만큼의 종교적 자유를 기대했던 것이다. 북한지역의 천주교회가 의도적으로 정교분리를 선포했던 것도, 그런 목적이었다. 북한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공산정권은 함남의 덕원 수도원이 밀주를 생산했다며 1948년 11월에 엄광호(독일인)를 체포했다. 1949년 4월에는 불온 삐라를 인쇄했다며 루수(독일인) 수사를 체포했다.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를 김일성대학 농과대학으로 징발했고 한국인 수사들을 검거했다. 덕원신학교 학생들도 강제 해산시켰다. 원산 교구장과 신부들도 민족반역자라고 체포했다. 원산 천주교 성당을 극장으로, 원산 수녀원을 인민군 병원, 사택은 내무서로 징발해 사용했다. 1949년 5월까지 모든 신부를 체포했고 평양으로 압송했다. 이후 북한에는 더 이상 천주교회의 터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은 박해를 피해 월남한 천주교인들에 의해 낱낱이 전해졌다. 그들은 함남 덕원에 그치지 않고 원산, 고원, 신고산, 영흥, 평양 등 모든 천주교회와 학교들이 몰수당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부들과 수녀들, 신학생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죽어가는 과정도 고발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1947년부터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세적 비판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했고 이를 ‘가톨릭과 악마와의 전쟁’이라 명명했다. <경향잡지>는 공산정권의 탄압을 낱낱이 고발했다. 팔로군들이 연길의 교회를 전멸시킨 사건을 비로소 알렸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산주의 후보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의 구축도 독려했다. 천주교회가 세계의 공산화를 막는 장벽이요 방파제라는 다짐도 했다. 1950년 4월에는, 대한천주교 주교 일동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야말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선언도 했다. 장로교 목사인 김양선에게 천주교회 역사 자료를 제공했고 남산 신궁 자리에 기독교 박물관을 개관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 감리교 총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고, “힘을 합하여 유물 공산주의 투쟁에 앞장설 것을” 약속했다. 공산주의 타도에 개신교회와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2. 누가 어용의 기독교인가?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기독교서회에서 회장 황종률의 주재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다. 국군을 돕고 피난민을 구호하자는 취지였지만, 본능적으로 나라를 구원해야 한다는 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서울을 빠져나온 목회자들은 다시 대전YMCA에 모였고 여기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곧바로 대구로 옮겨야 했지만, 대구와 부산 등에 약 30개의 지부를 두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한기독교구국회’는 전세(戰勢)에 따라 국군들과 함께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고 1·4 후퇴 시에는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군 위문과 선무(宣撫), 원호 사업을 했다. 회장 한경직 등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선무와 구호, 방송 활동 등을 했다. 기독인 청년들을 십자군의 이름으로, 구국의 사명의식을 품게 해서 전선으로 보내는 역할도 했다.
1951년 3월 이승만 정부는 한경직과 유형기를 유엔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미국교회의 도움으로 6·25의 실상을 알리고 국제적 동조를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정치적 요청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공산정권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산화가 되면 교회의 존재가 말살된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6·25 전쟁을 영적 전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의 일과 국가의 일을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러한 한국교회 활동에 대해 한국 사회 일각, 특히 민족지상주의를 앞세운 진영에서, 한국교회가 정부 권력과 유착을 했고, 어용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용의 기준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올 때, 3․1 운동 당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이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나타났다. 종교교회 출신으로 한국 근대교육역사에 금자탑을 쌓았던, 그러나 월북해 문교상에 올랐던 이만규도 들어왔다.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1946년 10월의 대구 폭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문식도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김창준은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이승만 정부가 등장하면서 해체되었던 ‘기독교민주동맹’을 다시 조직했다. 위원장의 직함으로 피난 가지 못한 목사들을 만났고 ‘민주동맹’에 들어오기를 강요했다. 경동교회를 다니던 김욱은 사무장이 되었다. 전북 삼례 출신인 그는 김종대에게 인민군 환영 행사에 나서야 한다고 강요했다. 두 사람은 전주성경학교 동창이었다. 한국 장로교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유호준 등이 신변 안전을 요구했으나 이 말에는 어떤 답변을 하지 않았다.
미국 게렛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고 협성신학교 교수를 지냈던 김창준은 계급투쟁이 인류를 멸망시키는 반면 기독교의 복음과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죄악을 소멸시킨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1947년 1월, 일명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고 허헌,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김기전과 함께 의장단에 선출된 이후 달라졌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의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지만, 복음의 구속과 은총의 개념이 그에게서 사라졌다.
대구 출신의 최문식도, 목사가 갖추어야 할 영적 영역이 지워져 있었다. 숨어있던 목사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섰고 강제로 대중 앞에 세워 모욕을 주었다. 김일성 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에 참석하게 하고 남북통일호소문을 작성하게 했다. 강제로 끌고 다니다가 적극성과 열의가 없다며 구속시키기도 했다.
변절한 목회자들이 강요한 ‘교역자 자술서’로 인해, 서울에서만 모두 60여 명의 교역자와 교인들이 검속되었다. 자술서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목사들을 학살하고 연행, 납북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교, 곧 협성신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의 목사가 배반의 만행에 앞장섰다.
이들에게 ‘복음’이나 ‘구원의 기독교’라는 개념은 사라진 상태였다. 영적 가치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몰랐다. 수많은 사람이 고초를 겪었고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모진 수모를 당했다. 변절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거나 맞선다고 생각하면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무참하게 폭력을 가했다. 그것은 이들이 변절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에 전념한 나머지 부활과 영생을 부정하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민족을 위한 도구에만 국한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실천한다고 하면서, 영혼 구원의 영역을 외면하면 그것도 기독교로 인정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전통에서는 그것을 분명히 한다.
기독교의 복음은 민족의식과 애국적 사명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것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단독자 개념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사명과 국가적 소명을 소중히 여기지만 기독교 복음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복음의 영적인 영역을 상실하는 순간, 이미 기독교의 근원적 정체성은 없어진다. 어용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조건은 여기에서 판명이 된다. 한국기독교회에 각인된 생각이다.
<mku9@daum.net>
글 | 김명구
감리교 목사로 연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장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소죽 강신명 목사>, <영주제일교회 100년사>, <서울YMCA운동사 100-1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