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민간인 학살, 누가 했나?
2020-06-13
월드뷰 06 JUNE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1 |
글/ 이희천(자유리더캠프 공동대표)
1. 문제 제기
6·25전쟁은 김일성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고, 남한에 있는 “20만의 남로당원”, “빨치산”, “반이승만세력” 등의 협조를 기대하며, 처음부터 반동분자를 숙청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가지고 시작한 사상전쟁이며 체제전쟁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북한군과 합세하는 남한 좌익세력을 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시작부터 사상이 다른 민간인들이 학살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노근리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미군, 한국군, 경찰 등에 의한 민간인 처형사건만 부각 될 뿐 북한군과 남한 좌익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적 이해가 필요하다.
2. 한국 정부와 미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
(1) 국민보도연맹사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이승만 정부가 조직한 전향자 단체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반란사건(1948.10.19) 이후 좌익세력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1949년 들어 숙군작업, 남로당 척결, 빨치산 토벌 등에 주력했고,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좌익 성향의 인물들을 전향시키는 노력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북한군이 서울과 인천 등을 점령했을 때, 좌익분자들뿐 아니라 보도연맹원들도 북한군을 환영하고 북한군에 협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정부는 좌익 전력자들의 북한군 협조사태를 우려해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군첩보 기관(CIC)과 사찰경찰 주도로 좌익분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하고, 그 일부를 집단 처형하는 일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경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고, 경북에서도 다수 발생했다. 좌익세력과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의 규모에 대해,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수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2009년 11월 과거사위원회에서는 “6·25전쟁 기간동안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국민보도연맹원 4천934명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많았던 점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공산화의 공포가 있는 상황에서, 전쟁 초기 대응기준과 매뉴얼이 부족했던 점과 사상검증 능력이 부족한 경찰과 군 기관 등이 과잉 대응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참고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이승만 정부가 취한 부역자들에 대한 보복 방지를 위한 대응조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대한민국 국회는 인천상륙작전 성공(9·15) 직후인 9·18 사형(私刑)금지법을 가결했고, 육군본부는 서울 수복을 3일 앞둔 9·25 민간인에 대한 사적인 가해를 금지하는 훈령을 발포했다. 서울을 수복한 9·28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는데, ‘탈환지역에서의 사적인 원한에 의한 타살, 구타, 구금 등을 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국회는 10·13 부역자처리법을 확정하고 가결했다.
(2) 노근리사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문제는 1990년대에 본격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근리사건이다. 1950년 7월 말 미국 제1기병사단 소속 부대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인근 경부선 철로 위에서 전투기에 의한 포격과 기관총 사격, 쌍굴다리에 모인 피난민들을 향한 총기 사격 등을 통해 다수의 사상자(300-400여 명 설, 확인자는 182명)를 낸 사건이다. 미군은 왜 갑자기 피난민을 향해 전투기 공격을 하고 육군 병사들이 피난민들을 집중 공격 했을까?
미 제1기병사단의 전투일지에 따르면, 북한군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난민 속에 숨어들어 미군을 공격하거나 피난민의 소달구지를 이용해 탄약과 중무기를 실어 나르기도 했고, 첩보탐지 활동을 하는 간첩들이 숨어드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는 미군이 피난민을 공격한 이유가 피난민을 민간인 복장을 한 공산 게릴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전투 초기 참전 미군의 미숙함도 일조했다. 이들은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참전해 당황하거나 공포에 사로잡혔고 미군끼리 교전하는 등 오판도 많았다.
3. 인천상륙작전 이전 북한군 점령지역의 민간인 학살
북한군은 전쟁 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7월 말에는 경상도 일원을 제외하고는 전 국토를 장악했다. 북한군은 점령 후 인민위원회(행정조직), 내무서와 치안대(치안조직) 등 통치조직을 만들고 그 동네 좌익분자들을 동참시켰다. 북한군과 남한 좌익분자들이 행한 악행은 우익인사 학살, 의용군 징집, 유력인사 납북 등이었다.
북한군과 남한 좌익분자들은 경찰, 군인 가족, 지주, 자본가 등을 반동분자로 지목하여 살생부 명단을 만들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체포한 후 인민재판, 무단처형 등을 통해 학살했다. 이러한 악행에는 북한군보다 그 지역 사정을 잘 아는 동네 좌익분자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은 “그때는, 이웃이 더 무섭더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북한군과 남한 좌익분자들은 젊은 청년들을 선전·선동하거나 강제로 체포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 투입했는데, 이를 의용군이라고 했다. 그 규모는 15만 명에 이르렀는데, 훈련도 없이 전선에 투입되어 상당수가 총알받이로서 낙동강을 피로 물들였다. 의용군의 이 같은 죽음은 강제 징집된 사람의 경우는 학살을 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북한군 점령 3개월 동안 북한군은 8만 명이나 되는 유력인사들(정치인, 학자, 교사, 예술가 등)을 체포해 납북해 갔다. 이들을 설득, 체포한 것은 북한군과 동네 좌익분자들이었다. 납북자들은 평양 등지에 가서 부대별로 학살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4. 인천상륙작전(9·15)과 서울 수복(9·28) 이후 민간인 집단학살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전형무소 6,000여 명, 전주형무소 1,000여 명 등 주요 형무소(우리의 교도소)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산재한 내무서(우리의 경찰서)에 체포해 두었던 우익인사들을 집단 학살한 후 북한으로 후퇴했다.
북한군이 후퇴한 후, 남은 동네 좌익분자들과 북한군 패잔병으로 이루어진 빨치산에 의해, 지역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집단학살극이 일어났다. 특히 9·28서울수복 이후에서 10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은 2002년 월간조선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6·25사변 피살자명부”(1952년 공보처 발행)를 찾아냄으로써 실체가 드러났다. 이 명부에 있는 5만 9,964명의 피살자 중 전남이 72.6%(4만 3,511명)에 이르렀고, 전북까지 포함하면 83%에 이르렀다. 대한민국통계연감(1952.10)에 따르면, 3개월 북한 통치 기간 피살자가 12만 8,9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피살자 규모가 더 클 것으로 추측된다.
5. 마무리
6·25전쟁은 단순히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공산세력과 자유민주세력 간의 사상전, 체제전쟁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6·25전쟁을 이해해야 전쟁 와중에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 학살문제를 감정적이 아닌 객관적 시각에서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6·25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남침했다는 점과 공산주의는 우익세력을 반동분자로 학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북한군과 남한 좌익분자들의 민간인 학살행위가 더 규모가 크고 잔혹했다.
우리는 “Freedom is not free”라는 명언처럼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인지 깨달았으면 한다.
<amje25@naver.com>
글 | 이희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국가안보교육원 교수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사, 사상사, 공직 가치 등과 관련된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