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주범은 김일성과 박헌영

6·25전쟁의 주범은 김일성과 박헌영

2020-06-03 0 By worldview

월드뷰 06 JUNE 2020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1


글/ 김용삼(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우리는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은 김일성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추적해 보면 6·25의 전범은 김일성과 남로당의 주역 박헌영이며, 그들을 이용한 스탈린(Joseph Stalin)과 마오쩌둥(毛澤東)도 책임을 져야 한다.

박헌영은 북한 정권 수립 후 북한 제1부수상 겸 외상으로서 남한 및 국제정세 분석과 판단, 대남혁명전략 수립의 책임자였다. 그는 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국제관계 및 대남 담당)으로서 남한에 합법·비합법 정보조직망을 운영했다. 박헌영을 보좌한 인물이 이승엽이다.

박헌영과 이승엽은 남로당 지하조직을 통해 남한 주요기관에 침투시킨 프락치를 통해 남한 정세 분석과 판단을 했고, 이를 토대로 김일성에게 남침전쟁을 부추겼다. 6·25 공모 과정에서 박헌영의 역할은 보조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주역 내지는 확실한 공범임을 수많은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우선 첫째 증거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1949년 봄과 1950년 봄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의 허가를 받아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그들 용어로 ‘국토 완정’을 이룩하기 위해 1949년 3월 3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스탈린을 면담한 날짜는 1949년 3월 7일이다. 이날 스탈린-김일성·박헌영 면담에서 두 사람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미군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며 남침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탈린은 북한과 경제문화협정, 상품교류협정, 차관공여협정 등을 체결했다. 3월 17일 체결한 조·소 비밀 군사원조협정에 의해 소련 특별군사고문단이 1949년 5월 북한에 도착하여 인민군 훈련을 담당했고, 소련의 첨단 무기 제공이 시작되었다.


1949년 3월, 스탈린 남침요청 거부


다음날인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의해 중국공산당은 무기와 병력을 북한에 제공하고, 타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중공이 개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로써 김일성·박헌영과 스탈린·마오쩌둥은 6·25 공동전범임이 증명되었다.

소련은 인민군 1개 사단에 소련 장교 15명씩을 배치했다. 그리고 180대의 군용기,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타이거 전차를 격파하는 데 전공을 세운 T-34형 전차 300대, 야포와 자동화기 등 다량의 현대 무기를 북한으로 반입했다.1)

1949년 6월 30일 미군을 태운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남한에는 미 군사고문단(KMAG) 475명만 남았다. 이승만은 철군 조건으로 미국 정부에 P-51 전투기 30대, 전폭기 12대를 보유한 2개 전투비행단, 폭격기 1개 편대와 구축함 2척, 잠수함 2척, 소해정 5척, 그 외에 부속함정과 정규군 10만 명, 예비군 5만 명의 육성 및 무장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소총 10만 정, 소총탄환만 넘겨주고 철수했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자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은 1949년 8월 중순까지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8월 말에는 박헌영이 선거위원장으로 복직하며, 9월 20일에는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 선거가 끝난 후 북한 수도를 서울로 옮긴다는 준비를 했다.2)

평양에 있는 박헌영과 대남공작 총책 이승엽은 1949년 6월부터 9월 중순까지 7회에 걸쳐 1,400명 이상의 월북한 남로당원을 빨치산으로 훈련시켜 남한에 침투시켰다. 과거 남로당 군사부책이었던 이현상은 이때 남파되어 전남북 지역의 지하당 청년들을 동원해 인민유격대 제2군단을 편성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 수립 1주년인 1949년 9월 9일을 전후하여 ‘9월 공세’를 전개했다.

1949년 9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침투한 공산 게릴라는 3,000명이 넘었으며, 그 가운데는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한 간부급도 600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3만 5,000명 병력을 투입하여 토벌작전을 전개, 대부분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까지만 해도 남조선 해방의 방법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 정규군의 무력남침에 의한 남조선 해방을 주장했다. 반면에 박헌영은 남한 혁명을 완수할 주체는 인민군이 아니라 남한 내의 남로당 지하조직과 빨치산이라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남쪽에는 20만에 이르는 지하당원이 있다. 남로당만으로도 남조선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 공연히 전면전을 벌였다가는 미군이 개입할 위험이 있다.”고 허세를 부렸다.3)

1950년 3월 들어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로 남로당 서울지도부가 사실상 와해되자 박헌영은 조직 재건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아끼던 800여 명의 김문연 부대와 김상호 부대를 남파하여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와 연계를 시도했다. 이 부대들은 근거지에 도착하기 전에 토벌대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투항해 소멸됐다. 이로 인해 남조선 통일은 인민군 정규군 남침을 통한 남조선 해방으로 결정되었다. 박헌영 세력이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소련 인민위원회를 방문했다. 연설문을 낭독하는 인물이 김일성, 원 안의 인물이 박헌영 당시 부수상이다.


1950년 4월 10일 스탈린, 남침요청 허가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1950년 4월 10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또 다시 스탈린에게 남침전쟁 승인을 요청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이 작성한 문서(「1950년 3월 30일~4월 25일 김일성의 소련 방문 건」)에 의하면, 이날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남침을 허락했다.

이날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 지역에서 남로당 지하조직 20만 명이 봉기하여 인민군은 한강을 건너 남진을 할 필요도 없이 이승만 정권이 쓰러지고 미국은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남침 허가를 승인받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은 남침을 개시했다. 6월 28일 오전 단숨에 서울로 달려온 김일성은 서울 점령 축하 퍼레이드를 벌인 후 사흘 간 인민군의 남진을 멈추고 “남로당 20만 명 총궐기” 소식을 기다렸다. 무슨 까닭인지 남로당 봉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몸이 후끈 단 박헌영은 6월 28일 남로당원과 당 조직에 총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그것은 연설이 아니라 남로당원들을 향한 힐책과 비난이었다.

“인민군은 여러분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숙한 시기에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 같이 일어서서 이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의 후방에서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서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4)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한 3개월 간 남쪽으로 내려온 남로당 인사들은 즉시 남로당 조직을 구축했다. 이 작업의 총 지휘자는 서울시장 겸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 이승엽이었다. 투옥됐던 남로당원들은 석방됐고, 7월 1일부터는 징집법을 공포하여 남한 내 청년들을 강제로 인민의용군으로 끌어가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7월 4일 토지개혁법을 시행하여 남한의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했다. 8월 18일에는 수확된 모든 곡식의 25%를 거두는 현물세를 제정했다.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 반공주의자, 군인과 경찰 가족 등을 학살했다. 6·25 당시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것은 대부분 남로당원들이었다.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 상륙을 감행했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다음날인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이날 밤 김일성은 북한주재 중국대사 니즈량(倪志亮)에게 중공군 개입을 요청했다.

같은 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마오쩌둥에게 “적이 시간을 주지 않고 38선 이북지역으로 진격할 경우 우리 자체 역량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특별 지원을 요청하니 중국 인민해방군이 출동하여 작전을 지원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0월 1일 박헌영과 유성철·이유민(노동당 중앙위원)을 베이징에 급파했다.

김일성·박헌영의 간절한 요구로 중공군의 한반도 출병 날짜는 10월 19일로 결정됐다. 중공군 사령관에는 펑더화이(彭德懷)가 임명되었다. 중공군은 야간에 은밀히 수면 약 10㎝ 아래 물에 잠기는 나무다리(수중교)를 설치했다. 10월 19일 중공군은 이 수중교를 이용하여 제1파 25만, 제2파 15만, 제3파 20만 등 총 60만 명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으로부터 최첨단 무기와 항공기, 각종 야포와 작전계획까지 제공받았다. 또 중공군으로부터 베테랑 전투부대 3개 사단과 실전경험이 풍부한 연인원 300만 명의 병력까지 지원받았다. 그러고도 남조선 해방은커녕 북한마저 통째로 빼앗길 뻔했다. 압록강까지 밀려난 김일성이 기적처럼 기사회생한 것은 오로지 중공군 덕분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전이 되면 스탈린이 모험적 전쟁을 일으킨 죄를 물어 김일성을 권좌에서 내쫓을 위험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의 향방에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닌 김일성은 먼저 선수를 쳐서 박헌영과 남로당파를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대숙청을 감행했다. 패전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파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미제의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6년 무렵 교수형에 처했다. 처형한 후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미국 놈의 고용간첩인 박헌영은 남조선에서 지하당원이 20만 명이나 되고, 이 가운데 서울에만 6만 명이 있다고 떠벌렸는데, 20만 명은 고사하고 우리가 낙동강 경계선이 진출할 때까지 단 한 건의 폭동도 없었다. 만약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 천 명이라도 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반드시 부산까지 해방시켰을 것이고, 미국 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것이다.”5)

<dragon0033@hanmail.net>


1) 매튜 리지웨이, <한국전쟁>, 정우사, 1984, 21.
2) 김남식, <실록 남로당>, 신현실사, 1975, 487.
3)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 선인출판사, 2014, 298~307 참조.
4) 하기와라 료(萩原遼)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주)한국논단, 1995, 266~267.
5) 유성철, “나의 증언(10)”, <한국일보>, 1990년 11월 13일.


글 | 김용삼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조선일보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을 역임했다. 근현대사 관련 연구활동을 통해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김일성 신화의 진실> 등 다양한 저작을 발표했다. 현재는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이승만학당 교수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