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론에 대한 책갈피
2020-01-18
월드뷰 01 JANUARY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8 |
글/ 송인규(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시민론(市民論)이란 책갈피 기고자가 만든 말이다. 이것은 시민의 정체성, 시민 개념의 유래와 역사, 시민 의식의 형성, 시민의 역할과 참여 등 시민에 관한 여러 사항을 총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채택한 용어이다. 공식적으로는 시민학(市民學, civics)이라는 명칭이 사회 과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서서히 부각되고 있다 [이동수 편, <시민학과 시민교육> (경기 고양: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7), pp. 9-11].
시민 사회나 시민 의식에 관한 논의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예를 들어 <한국사회와 시민의식> (1988년)이나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 (1992년), <한국 시민사회의 전개와 공동체 시민의식> (1997년) 등을 보라 ─ 그래도 이런 주제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2008년의 촛불 시위 이후였다.
사실 종전에는 정치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시민”이라는 용어가 그저 “∼시”의 거주자라는 평범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 만일 권리와 의무를 지닌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개인을 지칭하고 싶으면 “국민”이라는 말을 쓰면 되었다. 그런데 촛불 시위에의 참여자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제는 “시민”이 단지 ∼시의 거주자일 뿐 아니라 국가의 정책이나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시민론에 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탐구 서적들이 줄지어 출간되었다.
나는 이번 호 책갈피에서 네 권의 책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의 세 가지는 주로 서양의 발전 상황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 실정에서의 시민론을 다룬 것이다.
먼저 서양의 시민론을 소개하는 책자 [비록 이 책자의 일부 내용이 한국에 대한 것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서양의 상황을 담고 있으므로 “서양” 취급서로 분류했다]부터 출발하자. 첫 권은 한국인의 저서이다.
신진욱 지음, <시민> (서울: 도서출판 책세상, 2008).
이 책은 Vita Activa라는 개념사 시리즈의 제3권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신진욱은 연세대학교와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의 시민 이념은 “시민은 자유롭고 권력 앞에 당당하며, 만인이 동등하게 존엄함을 믿고 다른 시민들과 기꺼이 연대하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대화와 협동으로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간다.”(p. 12)라는 초두의 발언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처음 네 장은 주로 서양에서의 발전 양상에 집중되어 있고, 마지막 한 장은 한국의 실정을 묘사하고 있다.
1장 시민-개념과 이념
2장 시민의 개념사, 시민의 사회사
1. 고대와 중세의 시민
2. 프랑스 대혁명과 근대적 시민권
3. 시민 계급: 부르주아와 교양 시민
4. 시민, 시민 사회: 현대적 재발견
3장 시민과 인접 개념들
1. 시민과 국민
2. 시민과 계급
3. 시민과 세계시민
4장 시민의 이념
1. 자유로운 시민
2. 연대하는 시민
3. 참여하는 시민
5장 한국의 시민과 시민 사회
시민의 개념과 사회적 변화는 서로 맞물려 있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이해하기 쉽게 적절히 풀어내고 있다. 책이 어렵지 않게 줄줄 읽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루는 내용이 결코 피상적이거나 허접한 것은 아니다. 시민에 대한 안내서로서 이 책만큼 간결성·명료성·체계성을 두루 갖춘 책자를 찾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두 번째 책은 역시 서양의 시민론 관련서인데, 저자는 영국인이다.
데릭 히터 지음, 김해성 옮김, <시민교육의 역사> (경기도 파주: 도서출판 한울, 2007).
저자 히터(Derek Benjamin Heater, 1931- )는 대졸 자격증을 취득한 뒤, 고등학교[1957-1962년]와 대학교[1962-1984년]에서 교편을 잡았다. 후자의 경우 브라이튼 교육대학에서 14년[1962-1976년] 동안 역사를, 그리고 브라이튼 과학기술대학에서 8년[1976-1984년] 간 사회·문화학을 가르쳤다. 이 책은 원제가 A History of Education for Citizenship (2007년 발간)인데, 그는 그 이전에도 The Foundation of Citizenship (1994년), A Brief History of Citizenship (2004년), Citizenship in Britain: A History (2006년) 등의 시민권 관련서를 저술했다.
<시민교육의 역사>는 제목 그대로 시민·교육·역사의 세 가지 모티프가 적절히 밀착되고 촘촘히 연계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탐구하고 가르쳐 온 교육·역사·시민권의 주제를 이 한 권에 농축적으로 담아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시민”의 시각에서도, “교육”의 관점에서도, “역사”의 각도에서도 손색없이 읽힐 수 있다.
이 책자는 주로 역사적 흐름에 따라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3장의 내용이 상당히 길므로 역자가 두 장(3장 및 4장)으로 나누어 놓았다.]
제1장 고전적 기원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의 시민권 교육을 다루고 있다.
제2장 반란과 혁명의 시대
16세기∼18세기의 유럽 상황을 취급하는데, 주로 영국·프랑스를 대상으로 삼고 후에는 건국 초기의 미국까지도 언급한다.
제3장 자유민주주의 교육 1
19세기∼20세기 동안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견되는 서구 자유주의적 발전 과정을 관련 인물 및 사건에 따라 추적한다.
제4장 자유민주주의 교육 2
3장과 같은 시대에 미국, 유럽의 식민지들, 독립 쟁취 후의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에 있어 시민권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설한다.
제5장 전체주의와 그 이행
전체주의 국가들에서도 시민권 교육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물론 이때 “시민권”의 의미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겠지만), 소비에트·붕괴 이후의 러시아·나치 체제·1945년 이후의 독일·일본 등의 시민권 교육을 기술하는 것이 5장의 목적이다.
제6장 다중 시민권 교육
진정한 시민은 자신의 국가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전 세계적인 의무 또한 잊지 않음을 마지막 장에서 밝히고 있다.
<시민교육의 역사>에는 주장점과 주장점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 저자는 자신의 주된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매번 상당한 양의 사료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동원한다. 그러다 보니 책의 분량이 456쪽에 달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결코 만만한 읽기 자료가 아니지만, 세계 여러 곳의 시민 교육을 고래로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작업이니만큼 어찌 그 정도가 많다고 하겠는가?!
다음에 내놓을 책은 시민론에 관한 한국인 저자들의 글 모음집이다.
이동수 편, <시민은 누구인가> (경기도 고양: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3).
이 책의 편집자 이동수는 서울대학교[학사 및 석사]와 밴더빌트 대학교[박사]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경희대 NGO 대학원 원장(2007-2011년)과 공공대학원 원장(2011-2014년)을 역임한 후, 현재는 공공대학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민은 누구인가>는 <시민교육 연구총서>의 1권으로 출간되었는데, 편자 외에 6명의 전문가가 시민론 관련의 논문을 기고했다. 한 사람이 두 편의 글을 쓴 경우도 있기 때문에 책은 서론을 포함하여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각 글의 저자와 글의 대체적 내용이다.
서론 시민사회와 시민 (이동수)
시민은 시민권(citizenship)[시민 됨의 자격과 소속 및 권리]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민성(civility)[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사회적 정의와 선을 추구하는 덕목]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I부 시민의 탄생
1장 고대 중세 시민의 역사적 전개: ‘호모 폴리티쿠스’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이현휘, 고려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박사; 현재 경희대학교 NGO 국제연구소 연구교수)
저자는 서양 근대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토양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게마인데(Gemeinde) 개념을 도입하고 이에 따라 호모 폴리티쿠스[고대 시민]와 호모 에코노미쿠스[중세 시민]라는 시민적 이념형을 소개한다.
2장 근대 시민의 형성 (장명학,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 박사; 현재 경희대학교 NGO 국제연구소 연구 교수)
유럽의 중세 사회가 어떻게 근대 사회 –> 정치 혁명 –> 국민 국가 –> 대중 사회로 변천하는지, 동시에 그에 따라 시민의 역할 기능 또한 어떻게 바뀌는지 추적하고 있다.
3장 현대 시민의 확산 (장명학)
유럽의 68 혁명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현대적 시민 사회를 바라보며, 당면한 지구화의 문제[전 세계적 이슈]와 민주화 이후의 전망 문제[한국 특정적 이슈]를 다룬다.
II부 시민의 덕목과 가치
4장 근대적 덕목과 가치 (김윤철, 서강대학교 정치학 박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이 누릴 권리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을 배려할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민적 덕성의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5장 탈근대적 덕목과 가치 (이동수)
탈근대성(postmodernity)은 주관성이 아닌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전제하기 때문에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횡단하는 소통이 요구되며, 삶의 양식 및 그 실행으로서의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6장 동양적 가치: 동양 전통의 관계적 가치의 원형 (유병래, 동국대 동양 철학 철학박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시민 의식의 문제를 유가 및 도가의 관계 가치에 의해 풀어내고 있다.
III부 시민의 성장
7장 시민 성장의 환경 (김윤철)
시민의 성장은 (i) 사회경제적 발전과 주축 계급의 형성, (ii)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색의 등장과 확산, (iii) 정치적 기회구조의 개방이 전제되어야 함을 밝힌다.
8장 시민 의식과 교육 (정재원,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박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 교수)
시민의 자격 조건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유럽을 거쳐 현대[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에 이르기까지 서술하고 있다.
9장 시민 참여와 행위 (채진원, 경희대학교 정치학 박사;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전임연구원)
성숙한 시민이 탄생하려면 시민 편에서의 참여와 행위가 필수적인데, 특히 한나 아렌트(Hannah Arend 1906-1975)의 설명에 시사점이 많다고 밝힌 후, 전태일(1948-1970)과 신세종(2008)을 사례로 제시한다.
내게는 이상의 글 가운데 특히 1장과 5장의 내용이 매우 유익했고 또 시사적이었다.
이제 끝으로 한국 상황에 대한 한국인의 시민론 관련서를 선보이고자 한다.
정상호, <시민의 탄생과 진화: 한국인들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강원도 춘천: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3).
저자인 정상호는 정치학에 몰두하여 한양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고, 고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원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 논제는 부제인 “한국인들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라는 질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책자의 앞표지에 “우리의 시민 개념이 제국주의·국가수립·산업화·민주화라는 격한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만의 웅장한 역사를 만들어 왔다”라고 설명한다. 과연 이 책자는 조선 시대부터 2008년까지의 한국 역사를 훑으면서 한국인들의 시민 개념이 시대적 변천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책은 모두 6장과 하나의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기존 연구의 정리 및 방법론
2장 해방 이전 시민 개념의 등장과 변화 과정
3장 국민국가의 형성과 산업화 시대의 시민 개념
4장 민주화 시대의 시민 개념
5장 지나간 미래: 시민 개념의 내일
6장 결론: 한국인들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보론: 동아시아 공민(公民) 개념의 비교 연구 서설
1장은 책 전체 내용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시민에 관한 세 가지 이미지, 최근 한국에서의 시민(및 유사) 개념 연구, 연구 방법론에 대한 해설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고 나서 2∼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시민 개념의 변화에 관한 역사적 탐구가 시작된다. 2장은 조선 시대부터 대한제국(1897-1910년) 및 일본 통치 시절(1910-1945년)까지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3장에서는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1945-1959년)·4·19 혁명 당시(1960년)·산업화 시대(1961-1980년) 등 파란만장한 역사의 파노라마 가운데 시민 개념과 시민 의식이 어떤 굴곡을 겪었는지 설명이 이어진다. 4장은 비교적 최근세인 민주화 시대의 시민 개념에 관한 것으로서, 광주 민주화 운동(1980년)·6월 항쟁(1987년)·다양한 시민운동(1990-2008년)이 거론되어 있다.
5장은 시민 개념의 미래와 관련하여 2008년의 촛불 시위를 화두로 미래의 시민상을 어림하고 있다.
마지막 6장은 지금까지의 시민 개념을 다시금 시간화·민주화·이데올로기화·정치화라는 네 가지 특성과 추이에 따라 정리해 준다.
비록 내가 시민론의 비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시민의 탄생과 진화>를 읽으면서 받은 몇 가지 인상만큼은 나누고 싶다. 첫째, 저자가 시민의 개념을 찾아 조선 시대까지 추적해 올라간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비록 이런 학문적 기획이 얼마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적잖은 흥미를 자아내었다.
둘째, 시민의 세 가지 이미지 ─ 토론하고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시민 계급, 도시의 주민으로서 시민 ─ 를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하여 한국의 민주화 과정까지 꿰뚫는 주지(主旨)로 삼은 것은 합당한 시도로 여겨진다. 이 또한 정확한 평가를 하려면 세부 사항까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일단은 책 전체의 다양하고 복잡한 내용을 따라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적절한 길라잡이 노릇을 하는 것으로 판정이 된다.
셋째, 역사학자 코젤렉의 “현존하는 과거와 과거의 현재”라는 테제 역시 참으로 지당하고 놓쳐서는 안 될 방법론적 가이드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테제가 이후의 내용 기술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히 활용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내 편에서의 인식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의 명시성 소홀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또 시민 개념의 변화 시기를 제국주의 –> 국가 수립 –> 산업화 –> 민주화로 상정한 것이 과연 “현존하는 과거와 과거의 현재” 테제와 조금이라도 모순은 없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한국인들의 시민 개념(및 의식)의 변천에 대해 알고자 하면서 「시민의 탄생과 진화」를 소홀히 한다면,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못한 처사다.
이제 시민론은 우리로 하여금 이론적 차원에의 천착을 등한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의식 있고 책임성 넘치는 시민으로서의 참여와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seniosong@hanmail.net>
글 | 송인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칼빈 대학교에서 변증학(Th.M.)과 시라큐즈 대학교에서 분석철학(Ph.D.)을 공부했다. 한국기독학생회(IVF)의 총무 및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