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사회구조
2019-12-14
월드뷰 12 DECEMBER 2020●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BIBLE & WORLD VIEW 1 |
글/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성경은 특정한 사회구조, 곧 정치경제구조를 이상적인 롤모델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정치경제구조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규범적인 방향은 분명히 제시한다.
역사상 등장한 모든 정치경제구조는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반영하고 있어서 기독교 사회윤리는 모든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에 등장한 모든 정치경제구조는 하나님 일반은총의 표현이요,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의 결과물이기도 하므로 이 구조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사회윤리는 역사 안에 등장한 정치경제구조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수정 및 보완을 거쳐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제도들을 선택해야 한다.
이미 정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왕정 및 군주 정치체제와 극단적인 신정 체제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전무후무한 독재 정부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가 통합된 사회구조와 헌법적 민주주의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가 통합된 사회구조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전자는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향하여 닫힌 구조로써 기독교인들이 선택해서는 안 되는 사회구조임을 밝히고, 후자는 또한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구조로써 기독교인들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함께 갈 수 있는 사회구조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는 두 트랙으로 사회구조변혁을 추구한다. 첫 번째 트랙은 현존하는 사회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가 자본과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받는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을 통하여 부르주아계급을 축출하고, 부르주아계급이 가지고 있던 부를 국유화하고, 국유화된 부를 기반으로 배급 제도를 시행하고자 한다. 두 번째 트랙은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를 대안적 사회구조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트랙은 기독교 사회윤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결함들을 안고 있다.
첫째는 인간관의 문제다. 사람들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이타적이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타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능력만큼 일하면 일한 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의 보상을 받기 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층은 악의 무리로 보지만, 프롤레타리아 계층은 선한 무리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무리인 민중이 자율적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죄인들로서, 결코 이타적이 아니다. 인간을 잘못 보았다는 점 때문에 이미 마르크스주의는 처음부터 필패(必敗)할 운명을 안고 시작한 것이다. 능력만큼 일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제배급제가 불가피했고, 강제배급제가 시행되자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일할 의욕을 잃었으며, 능력만큼 일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생산량의 급격한 저하와 생산품의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마침내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는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낙관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을 타락한 인간으로 보는 성경적 인간관에 대하여 닫힌 사상이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적인 힘으로 이루어내야 할 절대적인 선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간의 자율적인 힘으로,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조물에 절대적인 신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우상화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상사회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반역이다. 이상사회는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써, 하늘로부터 내려와 역사 안에 영적인 왕국으로 임할 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나라의 회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주시는 이상사회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벨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죄다. 마르크스주의의 절대선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하여 닫힌 사상이다.
셋째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율적인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를 현실 속에서 이루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일종의 집단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집단 강박증은 과정의 도덕성을 무시하고, 목표를 추구하는 독재 권력을 낳는다. 부르주아의 재산을 강제로 국고로 귀속시키는 첫 번째 전략의 실천에서부터 이미 과정의 도덕성의 무시와 독재적인 권력 행사는 불가피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의 문화혁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천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거짓과 음모로 점철된 전략을 구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강제배급제의 시행과 노동의 강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재적 권력의 공포통치가 필요했다. 가정윤리는 가차 없이 파괴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념과 경쟁 관계에 있는 종교 특히, 기독교는 가혹하게 탄압당했으며, 사람들의 창의성은 박탈당해, 사회는 공포가 곳곳에 배어 있는 두려움의 터전이 되고 말았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도덕적 원리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과정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기독교윤리에 대하여 닫힌 사상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들 때문에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는 기독교인들이 함께 갈 수 없다.
헌법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가 통합된 사회구조
그러면 헌법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가 통합된 사회구조는 어떤가? 이 구조는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
첫째로,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가 서구에서 태동하게 된 배경들 가운데 하나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교, 불교, 기독교가 서로 간에 사상적인 갈등은 있어도 한 공간 안에서 비교적 화합하면서 잘 지내 온 한국과는 달리 서구에서는 종교의 차이, 그것도 같은 경전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이 갈등을 일으키면 필연적으로 살육전으로 나아갔다. 이 같은 비극을 피하고 다양한 종교들이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보장해 주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등장한 것이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다. 물론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가 정치적 주권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국민에게서 찾는 것, 다수결의 원리를 절대화하는 것, 종교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것 등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구조다.
자유시장 경제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인간의 이기성을 충분히 반영하는 경제체제라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도전을 극복하고 현재 유일하게 유효한 경제체제로 살아남았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경제는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관과 입장을 같이 한다.
둘째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아무리 철저하게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서 경제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the invisible hand)의 작용 때문에 행위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타인들의 행복과 부가 증진되는 열매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탁월한 통찰이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논증을 구상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 시장경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열려 있는 구조다.
셋째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정심(compassion)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의 이기심은 동정심에 의하여 통제되기도 하고 또한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것도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타락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일반은총,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 곧, 그 빛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인 동정심이 있으며, 이 동정심이 시민사회에서 기능을 발휘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이고 사적 사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제와 자유시장 경제의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안전망의 확충 등이 바로 이 동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 시장경제는 동정심의 실재를 말한다는 점에서도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관과 조화될 수 있다.
물론 자유 시장경제는 돈이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체제라는 점, 독과점의 폐해, 소비예측의 실패 등과 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긴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특징들을 볼 때 일정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체제다.
<swlee7739@hanmail.net>
글 | 이상원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에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Th. M.)와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교(Th. D.)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와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