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환대

인권과 환대

2019-12-12 0 By worldview

인권과 환대


월드뷰 12 DEC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9


글/ 이경직(백석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인권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인권 보장만으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필요를 파악하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채워주는 환대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먼저 인권 주장의 필요성과 한계를 다루고 환대의 필요성을 다루고자 한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인권에, 특히 정치적 인권에 관심을 두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복음주의 교회도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한 로잔 언약에 따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1)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는 특히 경제적 인권 문제가 부각되었다. 오늘날 일자리가 부족한 시대에 청년 세대, 특히 남성 청년 세대의 불만은 매우 크다.

그런데 인권은 모든 인간의 보편성을 전제한다. 사람들을 갈라놓는 모든 차이와 다름을 넘어서도록 한다. 그 결과 인권 논의는 특정 공동체의 고유한 전통과 역할을 부정하는 역할을 하며,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라크를 향해 전쟁을 선언했을 때 내세운 명분은 이라크 민중의 인권 보장이었다.2)

인권을 자유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 개인과 권리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개체로서의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로 사회와 국가, 정부가 생겨났다.3) 21세기 세계화의 근간을 이루는 신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abstract individual) 개념에 근거를 둔다. 추상적 개인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개인과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사람들을 서로 구별해주는 개성, 즉 개별적 속성들을 모두 제거할 때 추상적 개인에 도달한다. 그의 고향이 어디이며 누구의 형제, 자매인지, 어떤 나라에 사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추상적’으로 번역되는 ‘abstract’는 동사인 경우 ‘빼다, 뺄셈을 하다’를 뜻한다.

우리가 서로를 추상적 개인으로 대할 때 그를 인간으로서만 대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대하는 경우 공정성이 사라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상대방을 구체적인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만나는 경우 추상적 개인으로 대할 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법정에서 서로 크게 다투며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서로 같은 동성동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곧바로 화해한 사례가 그것이다.

추상적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의 경우 조그마한 문제까지 모두 법정으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편하게 산다. 변호사를 선임해서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강조하던 한국 사회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닌 것을 법정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을 곱게 보지 못한다. 그 문제 자체는 법정에서 다툴 수 있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개별 상황을 고려하지 않기에 냉정한 정의만 구현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 다툴 수 있지만,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 그 이후 부부의 삶은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추상적 개인으로서 서로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 규정을 지닌 존재로서 서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를 합의로 해결하던 한국 사회도 법정 소송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경우가 이전에 비해 많아지고 있다.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이 더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의 발전으로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도 세계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세계화는 인류가 처음 겪은 것이 아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해체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가 열렸을 때, 소규모 도시국가가 제공했던 안정되고 친숙한 공동체가 해체되고 거대한 우주 속에서 개인은 마치 원자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지켜야 했다. 세계화와 개인주의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자신이 희생하고 섬길 때 사랑과 환대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개인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히 계산하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사해동포주의(cosmopolitianism)는 폴리스(polis)가 우주(cosmos) 단위로 커져 버린 것을 반영한다. 개인이 권리의 소유자이며 권리의 주체로서 타인을 대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구 3~4만 명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던 시대는 지나갔다. 한 몸이라는 유기체를 이루는 지체로서 하는 역할보다, 보편적 인간이라는 추상적 규정 속에서 개인이 인간으로서 지니는 권리가 더 중요해졌다. 특정 공동체 속에서의 역할이 나의 존재와 역할을 규정하기보다는, 보편적 인류 공동체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나의 존재와 역할을 규정하는 셈이다.

Immanueal Kant.

서양 근대 이후의 윤리 이론들은 인권, 즉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서양 근대의 대표적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al Kant, 1724–1804)는 인권 존중을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 즉 무조건적 명령으로 여겼다.

칸트는 “나는 무엇을 해야 마땅한가?”라고 인간의 의무에 관해 물었다.4) 그런데 인권 담론은 의무 언어를 권리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내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제 ‘의무’는 자발적이기보다 상대방의 권리 주장에 따라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의무라는 용어는 자발성과 기쁨이라는 용어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나 스스로 상대방을 향한 의무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 의무를 수행하는 일은 어렵게 된 것이다.

권리 요구가 지나치게 되는 경우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자기 권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침해받는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권리 주장 만능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사회적 강자의 권리를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권리에 대해 잘 알고 조언해주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의 권리까지 내려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교회 공동체 내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위해 그 권리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더 어려운 학우를 위해 그 권리를 내려놓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자신에게 권리가 있으면 무조건 그 권리를 사용하려는 태도는 이기주의적 태도라 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보지 않고 추상적 개인으로 볼 때 나오는 태도이다. 추상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권리만 강조하다 보면 그 권리가 인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매사 모든 일을 법정으로 가지고 가서 자신의 권리를 관철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피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국운에 따르면 인권 담론이 세계화됨에 따라 각 나라에서 고유한 전통과 종교를 고수하려는 근본주의 운동이 이에 반발하는 경향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5) 인권 담론이 각 나라의 고유한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권은 보호되어야 마땅하지만 “인간이 자기 삶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주체이다.”라는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삶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권이 그 자체로 자명한 윤리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인권이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칸트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특히 동물의 권리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 왜 인간의 권리가 동물의 권리보다 더 소중하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란 어렵다.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인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동등한 생명권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성경은 인간의 권리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실에서 찾는다(창 1:27). 이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지위에 올려놓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에서 비로소 서로 평등하다.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 측면에서보다 관계적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자녀로서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 관계를 영생, 경건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마치 거울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것이다.

Emmanuel Levinas,


불완전한 우리 인간보다는 완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권을 보장하실 때 우리의 인권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칸트가 인권을 무조건적 도덕법칙으로 규정한 이유는 인권의 근거를 하나님께서 찾으려 하지 않은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비기독교인까지 인권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인권 개념의 자명성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권은 추상적 개인을 자율적 주체로 여기는 자아 중심적 모더니즘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환대는 특정 시간에 다양한 필요를 지니고 있는 개인을 고려한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필요와 표정을 지니고 있는 ‘타인의 얼굴’ 앞에 반응해야 하는 책임을 지니는 타자의 윤리를 주장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에 따라 만드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 인간을 하나님을 대하듯이 해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명령을 받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자질과 지위, 재력 등을 보지 않고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세 명의 나그네를 주님을 대하듯이 그들에게 약속한 것 이상을 대접함으로써 환대를 실천했다. 그런데 그 나그네들이 바로 그를 축복하게 될 천사들이었다. 성경은 우리가 상대방의 권리 주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상대방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의무를 책임 있게 기쁨으로 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kjiklee@bu.ac.kr>


1) 손승호, “한국교회의 인권 이해. 최근 차별금지법 논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사상」 720 (2018.12): 29.
2) 이국운, “기독교와 인권, 그리고 정치,” 「통합연구」 41 (2003): 142.
3) 이국운, “기독교와 인권, 그리고 정치,” 145.
4) 이국운, “기독교와 인권, 그리고 정치,” 148.
5) 이국운, “기독교와 인권, 그리고 정치,” 152.


글 | 이경직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백석대에서 목회학석사,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백석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대학원 교학처장과 개혁주의생명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