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정교분리

2019-11-15 0 By worldview

복음과 정교분리

 

월드뷰 11 NOVEMBER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5

 

글/ 김영재(전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6월 초에 한기총 대표 목사가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얼마 후에, 이에 동조하지 않는 기독교계 몇몇 원로들이 공동명의로 비판에 대해 반대 성명을 냈다. 그런데 그 반대 성명에서 원로들은 한기총 대표가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와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주로 한기총 대표와 한기총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인물이나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반대 성명을 낸 원로 중, 국내에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한 분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빙자하여 목사가 개인적으로 정부에 대하여 비판할 수는 있어도, 기독교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부당하니 잠자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교분리”란 말의 뜻을 오늘의 상황에서 다시 따지는 건 진부한 일일 수 있으나, 그 말이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뜻을 살펴보려고 한다.

“정교분리”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그리고 정치 권력과 교회 그 어느 쪽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적용되었다. 교회가 “정교분리”를 말할 경우, 그것은 국가가 교회 일에 간섭하거나 교회를 탄압하지 말고, 교회의 자유와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선포이다.

반면에, 국가가 그것을 말할 경우, 그것은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거나, 국가 정책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그랬듯이, 종교를 껄끄럽게 여기거나 압제하려는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권이 “정교분리”를 말할 때, 그것은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을 전제로 할 뿐 아니라, 국가가 교회를 쇠퇴하도록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권리와 활동마저도 제한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말하는 “정교분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헌법에서 정교분리를 명시한 것은 여러 교파 교회나 종교가 균등하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정교분리”와 선교 전략

 

“정교분리”는 우리나라에 복음과 함께 도입되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억불정책을 시행해 왔으며, 천주교를 새로운 외래 종교요, 사상이라고 배격하며 수많은 신자를 처형하면서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견지해 오던 조선 정부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외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를 시작할 무렵에 조선 정부는 이들이 외세의 대변자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정교분리”를 내세워 자신들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그들은 국가가 내세우는 의미의 “정교분리”로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같은 말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한국 신자들에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정교분리”는 외래 종교를 거부하는 문화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복음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를 얻게 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19, 20세기 초에 선교사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 이외에, 의료 사업, 교육 등 문화 사업을 통하여, 선교지에 문화를 전수함으로써, 선교지에 많은 유익을 주었다. 외국 선교사가 외국에 와서 순수하게 영혼 구원의 복음만 전해야지, 정치나 사회의 급격한 변혁을 바라거나 꾀하는 것은 월권이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영혼 구원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본래 가졌던 가치관과 세계관을 회복하게 해 준다. 즉, 복음은 현실 사회에서 사람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여러 다른 자유들과 평등, 인권 등에 눈을 뜨게 해 준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남기 위해, 선교사들이 가르친 “정교분리”를 잠자코 따랐다. 그러나 1919년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선교사들 몰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온 겨레와 함께 독립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것을 당연히 할 만한 일을 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정치에 순응하는 한편, 종교의 자유만 누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정교분리”의 의미는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이지 어떤 경우에도 범할 수 없는 철칙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 보는 “정교분리”

 

“정교분리”라는 말은,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부터, 즉 교회가 국가 기관과 버금가는 기구로 성장하여, 권세를 갖게 된 후부터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긴 역사를 가진 단어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어느 지역 교회의 설립에 관여하려고 했을 때,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회의 독립을 주창하며, 황제의 교회 간섭을 거부했다.

정치와 교회의 유착으로 정치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가 서로 우위를 다투던 중세에는 “정교분리”란 말은 잊히었다. 16세기에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종교개혁운동을 탄압하려는 중세 교회와 국가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국가가 교회와 하나가 되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정교분리”를 내세웠다.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위그노의 혁명이라든지, 화란의 독립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한다는 대의명분이기도 했다.

 

로마서 13장의 말씀과 “정교분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의 미소리움(Missorium of Theodosius). 음식 담는 이 쟁반은 약 227kg 정도에 달한다.

 

“정교분리”를 정권에 대한 순응과 동의어로 아는 한국교회의 이해는 권세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므로 각 사람은 그들에게 복종하고 권세를 거스르지 말라고 엄히 명하는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의 말씀과 연계해서 이해하면서 더 강화되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징벌하고 치안을 유지함으로써 납세의 의무와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직무를 맡아 수행하는 자므로,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라고 말씀한다. 여기 국방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려면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국방은 필수이다.

권세자에게 복종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라는 말씀은 많은 뜻을 함축한다. 국가의 안위는 백성들의 삶이나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어 있다. 국가가 건재할 때, 교회의 존립이 보장되고, 정치 권력이 교회에 호의적일 때,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본다. 7세기에 팔레스타인과 중동과 북이집트에 있던 나라들이 반기독교적인 이슬람에 지배당하면서부터는,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압제 아래 겨우 신앙의 명맥을 이어 왔을 뿐,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국가 권력이 기독교를 국교로 했을 때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났다. 교회는 정치 권력에 지배를 받고 이용된 여파로 부패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하여 개혁을 시도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를 외침과 동시에 “정교분리”를 내세웠다. 14세기와 15세기에 교회 개혁과 신앙의 자유를 개별적으로 외쳤던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는 이단으로 처형되고, 개혁의 싹은 잘리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제후들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거세게 항거하며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면서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슈말칼덴 전쟁(1544-1545)과 그다음 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은 신, 구교 제후들 간의 전쟁이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전쟁을 치르는 씁쓸한 곡절을 겪어,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버금가는 지역과 교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교회 개혁을 도모한 위그노들이 가톨릭의 세력과 전쟁을 치렀으나, 대등하게 대항할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어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 반면에 가톨릭을 옹호하던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독립 전쟁에 승리함으로 인하여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맺는말

 

“정교분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보면, 조선 정부와 일제 식민시대에 선교사들이 선교 전략으로 적용하여 한국교회에 가르친 “교회는 정치 권력에 순응해야 한다.”라는 해석보다, 정치 권력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구가한 말”로 더 많이 이해되고 적용되었다. 독일 나치 정권은 자유주의 신학에 함몰된 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조직한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앞세워, 독일 교회를 정권에 순응하는 어용 교회로 만들었다. 소수의 신자로 구성된 “고백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고, 나치의 민족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히틀러의 우상화를 경고하였다. 종전 후 이들과 온 독일 교회는 다 같이 나치에 항거하지 못하고, 굴종한 죄를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다.

1930년대 중반과 후반에 각각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의한 한국의 소위 주류 교회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예배에서 먼저 천황을 향한 동방요배와 신민선서,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부터 하고 예배를 시작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해 때때로 연보까지 해야 하는 처참하게 굴종하는 교회로 전락했다.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이해해 온 “정교분리”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일제의 권력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장기간 옥고를 치렀으며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반기독교 정책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고, 어떤 이는 자신들을 정죄하는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법정에서 “일제는 반드시 망한다.”라고 일갈(一喝)하기도 하였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이미 1930년대 초에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을 비판하고 장차 다가올 박해에 대비하도록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렸다. 해방 후 북에서는 공산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기독교 목사와 지도자들이 정당을 조직하였다. 다른 정치세력이 없으므로 목사들이 나선 것이다.

오늘의 한국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의심스러운 정책을 편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조항에서 자유를 삭제하자는 제안을 한다. 헌법 수정은 미결로 있으나, 자유 시장경제는 정부가 개입함으로 이미 수정 단계에 있다. 적폐 청산이라면서 전 정부의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을 감금한다. 원전 폐기, 4대강 보 철거 등도 적폐 청산의 일환인 것 같이 보인다. “보수는 씨를 말리겠다.” “현 여당이 20년 아니 100년을 집권하도록 하겠다.”라는 등의 섬뜩한 말을 여당 지도자가 예사로 한다. 중국과 북한처럼 일당 독재 체제를 염원하는 발언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법안을 만든다.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그것을 교회가 성경 말씀에 따라 정죄하지도 못하고, 만일 한다면 범법자가 된다. 6.25 전쟁을 두고 북의 주장대로 북침이라는 역사 왜곡을 허용하는가 하면, 남침의 주모자를 국군의 창설자라고 하며 미화한다. 나라를 어디로 이끌려는 것인지 국민이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만일 현 정부가 인권을 탄압하고, 종교 자유를 비롯한 제반 자유를 박탈하거나 억압하며,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펴온 무신론적 공산주의 독재 정권과 하나 되기 위해,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한다면, 국민은 억압 아래 살게 될 것이고, 교회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목회자는 교회의 화합을 위하여 정치에 대하여 논평하는 말은 아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보고 국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가 그냥 침묵하고만 있으면, 우려하던 것은 현실이 되고, 그 목사는 나라와 교회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범한 것이 된다.

 

<sarabose@daum.net>

 

글 | 김영재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영국과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독일교구 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에서 다년간 목회했으며,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합동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2006년에 은퇴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교회사>, <기독교 교회사>, <교리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미국 기독교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