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와 정신 건강

2019-04-13 0 By worldview

은퇴와 정신 건강

 

월드뷰 04 APRIL 2019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ISSUE 3

 

전우택/ 연세의대 교수

 

1. 시작하는 말 : 현재 한국 은퇴자들의 세 가지 특징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이 일제히 은퇴 연령에 들어섰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가장 많은 은퇴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 은퇴자들은 과거 은퇴자들과 다른 근본적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과거보다 훨씬 더 유능한 은퇴자들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정식 교육들을 받았고, 한국 경제 발전기의 주역으로서, 매우 유능하게 활동을 하다가 은퇴하게 된 사람들이다. 둘째, 과거보다 훨씬 더 건강한 은퇴자이다. 과거에는 은퇴할 나이가 되면 신체적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직장을 더 다니라고 해도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다. 그러나 베이비부머들은 과거로 치면 45세 정도 연령대로 육체적으로도 충분히 건강한 사람들이다. 셋째,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은퇴자들이다. 과거에는 은퇴를 하게 되면, 자식들에게 봉양을 받으면서 빠르게 노쇠해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은퇴 후 자신의 삶과 삶의 방식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큰 고민도 없었고, 그것에 적응해 나가는 것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은 여전히 매우 유능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퇴직을 하고 있기에, 자신들에게 남은 25-35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아주 특이한 세대인 것이다.

 

2. 한국에서 은퇴하기를 힘들어하는 이유 

 

은퇴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칠레에서도 전 세계 어디서나 다 있는 일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은퇴자들이 더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나이에 의한 강제 은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퇴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 둘째, 사회 복지시스템이 아직도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만으로는 은퇴 후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우며 그에 따라 재정 수입의 압박을 많이 받게 된다. 셋째, 한국 사회의 가족부양 문화로 인하여, 은퇴 세대는 자녀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과도한 심리적 부담을 가진다. 자녀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을 부모의 책임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재정적 압박을 더욱 크게 받는 것이다. 더구나 청년 실업 등의 문제로 인하여 자식들의 경제적 자립이 늦어지는 것이 이 문제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 넷째, 돈 중심의 세계관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면서 은퇴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경제규모 11위의 나라로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만들어 오면서,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돈 중심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부족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하여 과도하게 천시하고, 불안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재정 수입이 줄어드는 은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다섯째, 앞의 것과 연관되지만, 자신만의 내적인 가치관이나 철학의 빈곤이 문제가 된다. 그저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자식 키우는 것 이외의 생각 없이 살아왔던 삶이 막상 은퇴를 하면서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 전체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삶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섯째, 은퇴와 노화, 죽음이라는 세 가지 주제는 서로 연결이 되면서도, 사실은 그 각각이 독립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화시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를 만든다. 은퇴는 은퇴일 뿐인데도, 그리고 이제부터 은퇴 후의 새로운 삶을 풍성히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도, 은퇴를 급격한 노화, 그리고 반쯤 진행된 죽음이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3.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은퇴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 

 

1)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로든 일을 계속하기

 

보통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은퇴 후 늦게까지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신문 보고 책 읽고 여유 있게 브런치를 먹고, 산책하며 친구들과 담소하다가, 저녁 늦게까지 마음대로 TV 보고 또 자는 그런 꿈(?) 같은 삶을 기대한다. 은퇴 후 그 꿈은 쉽게 실현된다. 문제는 그 꿈이 정말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막대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삶은 스스로도 지치고 불안하게 하지만, 배우자도 지치고 불안하게 만든다. 은퇴 후 부부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진짜 여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의 최대 기간은 3개월이라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 기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보통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너무도 많이 남는 시간이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되고, 배우자의 잔소리도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줄어드는 은행 잔고와 자녀들을 위하여 필요한 돈의 액수가 압박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경제적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즉 풀타임이든지, 파트타임이든지 무언가 경제적 활동의 일을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중요하다. 단, 이런 일을 할 때 가급적이면, 자신이 평생 해 왔던 일들과 경험, 관심 사항, 취미들이 의미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권장한다. 과거와 아무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일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시작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그 결과도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은퇴 전에 미리 여러 가지 정보를 모으고, 부분적인 활동 경험을 미리 쌓는 것이 필요하다.

 

 

2) 규칙적이고 절제된 삶을 살기

 

은퇴 이후,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신체적 건강이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사회적 활동의 제한이 있을 뿐 아니라, 재정적 어려움을 더 겪게 되고, 우울과 불안이 심해지면서 정신 건강에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 건강을 위해서 신체적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은퇴자들의 신체 건강을 지키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규칙적인 운동이다. 이것은 젊은 시절에도 당연히 가장 중요한 신체 건강 유지 방법이지만, 나이가 들면 더욱 큰 중요성을 가진다. 둘째, 정기적인 건강검진이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직장에서 주는 기회를 이용하여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지만, 은퇴 후에는 그런 지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재정적 제한이 있다 할지라도, 정기적 건강검진은 조기에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돈을 아끼지 말고 받아야 한다. 셋째, 정확한 시간에 자고 깨는 것이다. 낮잠을 조금이라도 자거나, 극단적으로는 잠깐만 졸아도 밤에 불면증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불면증은 우울 등 전반적인 정신 건강의 악화뿐 만 아니라, 신체 건강의 문제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정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더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시간이 고정되는 것이다. 또한 은퇴 이후에 일부 사람들은 출근 시간도 따로 없고, 모든 것이 자유롭다는 이유로 음주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령의 과도한 음주 행위는 쉽게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은퇴 후 음주의 절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친구들을 만난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3) 공부 열심히 하기

 

학생 때도 열심히 공부한 일이 별로 없다든지, 또는 그렇게 지겹도록 열심히 한 공부를 은퇴 후 이 나이에 또 하라는 것이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은퇴 후 정신 건강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은퇴 전까지의 인생 전반기 삶에서 공부란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전문성을 키우며, 타인과 경쟁을 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은퇴 후, 인생 후반기의 공부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그것은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 자기 발전의 도구,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지식과 통찰력의 습득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같은 외국어를 배운다 할지라도 젊었을 때 하는 외국어 학습과 은퇴 후 하는 외국어 학습은 다른 것이다. 다양한 내용의 공부를 스스로 집이나 도서관에서 할 수도 있고, 동사무소, 구청 또는 백화점이나 대학 등에서 개설되는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을 통하여 이룰 수도 있다. 아예 어떤 사람들은 새로 학원이나 방송통신대학에 등록을 하거나, 또는 석사,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공부들은 두뇌의 활동을 잘 유지시키는 의미도 매우 크며, 동시에, 생활을 규칙화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여행 역시 좋은 공부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유명한 국내, 해외 관광지를 찾아가서 즐기는 여행이 아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사적지, 박물관, 기념관 등의 특별 장소에 가서 나름대로의 깊이 있는 문화 공부, 역사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이것은 새로운 성취의 경험을 주며,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다. 일반적으로 은퇴자들은 은퇴 전에 자신이 평생 하였던 그 일 이외의 것에 대하여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상태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공부는 자신의 생각과 시야를 더 넓혀주고, 동시에 젊은 사람들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줄 때도 있다. 결국 치매 예방에도 좋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

 

4) 자원봉사 및 좋은 팀 만들기

 

설사 은퇴 후 다른 일자리를 구하여서 다시 직장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 자원봉사이다. 은퇴 후 다른 직장을 구한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은퇴 이전의 직장에 비하여 보수도 낮고, 동시에 근무 시간도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일주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재정적 보상 없이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타인을 돕는다는 점에서 큰 심리적 만족감과 자부심을 준다. 그것이 은퇴자들에게는 다시 받게 되는 월급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을 때가 많다. 새로운 직장 일의 양과, 그에 따른 근무 시간이 점차 줄어들수록, 자연스럽게 그동안 해 오던 자원봉사를 더 늘리는 것이 가능하기에, 은퇴 이후 가급적 빨리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일부 조사 결과들을 보면, 직장 생활을 할 때 봉사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계속 자원봉사 등을 하지만 봉사활동을 하지 않던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자원봉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퇴 후에 자원봉사를 나가는 것이 왠지 초라해 보이고 스스로 궁색해 보인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원봉사는 매우 자랑스럽고 떳떳한 일이기에,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같이 자원봉사를 하는 팀’에 속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어떤 일을 어디 가서 해야 할지도 잘 모르고, 참가해서도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두 번 다시는 안 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팀이 구성되어 함께 활동하게 되면, 훨씬 더 생기 있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은퇴 이전이나 이후에 가급적 빨리, 함께 여행 다니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자원봉사 다닐 수 있는 마음에 맞는 그룹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4. 마치는 말 : 새로운 가치와 목표, 정체성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은퇴 

 

은퇴 전의 인생 전반전과 은퇴 후의 인생 후반전은 몇 가지 차이를 가진다. 은퇴 전에는 성공, 힘(power), 취임식에 오는 하객들이 중요하였다면, 은퇴 후에는 의미, 영향력(influence), 장례식에 오는 조문객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은퇴는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일이다. 과거의 자신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완전히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를 위하여 과거 자신의 직장과 일이 규정하던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이제부터 내 인생의 마지막 기간은 더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과, 가족을 넘어서는 더 넓은 세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내 모든 경륜과 능력을 천천히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도움을 주며 살겠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수입이 줄어들었으면, 삶의 모든 씀씀이를 다운사이징 하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지혜와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그것이 그의 정신 건강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하지만 확실한 평가 지표가 된다. 힘들더라도, 배우자와 가족들에게 더 너그럽고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는 태도를 새로이 배워 나가며 자신이 정말 살고 싶었던 그런 인생의 모습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영적인 일이다. 사실, 하나님을 만날 날짜가 과거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졌으니, 당연히 하나님 앞에 더 겸손히 서야 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삶이라 부른다. 은퇴는 영적인 삶의 입구이다.

<wtjeon@yuhs.ac>

 

전우택 |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이다. 사회정신의학 분야를 다루며 주로 북한과 통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통일보건의료학회 이사장 및 한국의학교학회 부회장으로 있으며, 한국자살예방협회 이사장 및 한국누가회 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