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문화 참여

크리스천의 문화 참여

2024-09-02 0 By 월드뷰
권순도 (영화 “기적의 시작” 감독)

월드뷰 SEPTEMBER 2024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OVER STORY

권순도 감독은 호주 그리피스(Griffith) 대학교 영화제작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동티모르 파병에 참여했다. 2007년부터 순교자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문준경을 비롯 유관순, 이도종, 독도의용수비대, 제주 4·3 사건 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감독·제작하였다. 최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기적의 시작”을 제작해 전국 극장 개봉 후 KBS에서 방영, OTT 서비스로 상영을 이어가고 있다(편집자 주).


권순도 (영화 “기적의 시작” 감독)


권순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습니다. 영화의 놀라운 위력을 어렸을 때부터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치원 때 솔로몬제도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거기 원주민들이 저를 무서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그런가 봤더니 거기 사람들이 동양인을 모두 오래된 쿵푸 영화를 통해서만 접한 겁니다. TV가 있는 집에서는 옛날에 우리도 있던 VHS 카세트 비디오로 영화를 돌려보는데, 그 사람들이 쿵푸나 동양인들의 무술 영화만 보고, 동양인이라면 모두 싸움을 잘하는 줄 알고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한국에 왔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솔로몬제도에 갔을 때는 또 상황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제 할리우드 영화가 그곳에 보급되었는데, 거기에 동양인은 모두 악당으로 나오거나 우스꽝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기 사람들이 동양인인 저를 우습게 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영화가 그냥 오락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그때는 영화를 만들어서 한국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외국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저도 거기 현지인들에게 한국을 좀 알리고 한국인인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권순도 중학교는 한국에서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어른들도 이상하게 보셨습니다. 1999년도에 영화 “쉬리”가 나오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에서 영화제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사실 영화감독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다시 호주로 유학갔는데, 그곳에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고등학교부터 있었습니다. 사실 영화는 촬영 장비부터 방송 편집 장비까지 각종 장비가 없으면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지금은 영상 제작의 문턱이 상당히 낮아졌지만, 당시는 영화를 전부 필름카메라로 촬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주에는 그런 장비들을 다 갖춘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이후 대학교도 호주에서 영화제작 전공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호주에서 학교 실습으로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결과물을 보여드리기도 하니까 그제야 어른들이 제가 좀 열정과 재능도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권순도 저는 목재회사를 다닌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해외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 해외에 나간 게 유치원 때였는데, 호주 북동쪽에 있는 태평양의 솔로몬제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제도에 어마어마한 목재 자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국내외에서 학교를 11군데나 옮겨 다녔습니다.


권순도 아버지께서는 원래 꿈이 탐험가셨는데, 자라면서 이제 더는 새로 발견할 곳이 없겠구나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육군사관학교를 가려고 준비했는데, 육사 시험이 주일을 포함해 나흘에 걸쳐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었던 할아버지께 “이번 주일에는 교회를 가는 대신 육사 시험을 좀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야단은 안 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별 네 개를 달아 육군 대장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작은 말씀 하나에 순종하는 것을 더 귀히 보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사 입학을 포기하고 일반 대학을 가서 ROTC를 지원했는데, 거기서도 주일에 훈련이 있어서 결국 ROTC도 내려놓고 사병으로 입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 들어가신 목재회사를 통해 결국 탐험가의 꿈을 이루시고, 이제는 군인은 아니시지만 군사학자의 꿈도 이루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솔로몬제도에 가시게 된 것은 당시 회사에서 거금을 주면서 해외를 마음껏 다니며 임지를 확보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개발이 되어 있지 않던 솔로몬제도에 가서 임지를 확보하고, 그곳을 통해 우리나라가 원목 수출국으로 탈바꿈하도록 완전히 새롭게 개척하신 것이죠. 결국 1995년도 즈음에 솔로몬제도에 여의도 90배 규모의 땅을 확보하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의 화사에서 다른 경쟁국 업체들보다 입찰에 적게 써냈는데, 아버지께서 그동안 현지인들과 쌓은 신뢰 관계 덕분에 입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벌목을 하시면서 동시에 한쪽에 교회와 병원도 짓고, 항상 조림(造林)도 같이 하셔서 현지인들의 신뢰를 받으셨습니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솔로문제도에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또 그곳이 과거 대영제국의 영토였고, 지금도 영연방 소속이기 때문에 대영영국의 훈장(OBE)도 받으셨습니다.


권순도 네. 아마 2007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 순교자들 소재의 영화를 주로 찍었던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이기풍 목사, 문준경 전도사, 이도종 목사 등의 이야기를 극작이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주기철 목사님 영화만 만들어보고 일반 작품을 하려고 했는데, 저예산으로 극영화를 만들고 보니 소품이나 고증 등 완성도가 너무 아쉬워서 또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순교자 목사님에 대해서도 연결이 되어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에서는 제 작품이 계속 상영되고 있습니다.

권순도 감독의 아버지 권주혁 박사


권순도 사실 순교자 목사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기 전부터 북한 정치범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을 인터뷰해 다큐멘터리를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꽃동산”이라는 15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였는데, 2005년 12월에 열린 서울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상영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유럽 의회에서도 상영이 되었더라고요. 그러다가 북한 인권영화제가 생겼는데, 거기서 북한 인권 관련 단편영화제작을 의뢰를 받아서 2011년 “선처”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권순도 제 유튜브에 올려놨습니다. 그런데 영어 자막이 있는 버전으로만 올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DVD로 판매되었던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해 놓으면 구매해 주신 분들께 공정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영어 자막이 들어간 버전만 올려두었습니다.


권순도 Pureway Pictures입니다. 제 이름 ‘순도(純道)’를 영어로 바꾼 겁니다.


권순도 그렇죠. 그런데 주기철 목사님 영화도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면서 모금해서 찍은 건데 참 감사하게도 채워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영화 찍겠다고 후원해 달라고 하면 저도 안 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대학교 졸업하고부터는 부모님께 돈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은 아니었는데 나태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제대로 수입활동을 할 때까지는 교통비조차 아끼려고 대여섯 정거장은 걸어 다녔습니다. 스스로 훈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순도 사실 어디에서 간증하라고 하면 저는 군대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와 정말 닮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자대에서 훈련병 기간을 보냈는데 입대 후 첫 주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보내주지 않고 훈련을 계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부대장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교회를 가는 등의 종교생활은 보장되는 것으로 알고 입대했는데 왜 주일에도 계속 훈련을 시키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저를 잘 타일러서 설득하려다가 나중에는 명령 불이행으로 영창을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든 생각이, 만일 다른 일로 영창에 간다면 창피한 일이지만, 이런 일로 가면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영창에 갈 각오를 하고 다시 말을 했더니 부대장이 그날 훈련 마치고, 저녁에 군종병과 저, 딱 둘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한 10분 후에 조교들이 교회 갈 사람을 한쪽으로 모으고, 성당 갈 사람도 한쪽으로 모으는 겁니다. 부대장이 마음을 바꾸고 훈련을 중지한 겁니다. 저와 군종병뿐 아니라 모두가 원한다면 주일에 교회에 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에게는 무척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물불 안 가리고 하나님만 의지해서 밀고 나갔더니 금방 문이 열리는 겁니다.
그런데 입대 3일 만에 일어난 이 일로 하나님께서 저의 군 생활을 크게 축복해 주신 것 같습니다. 유엔군으로 동티모르에 파병도 가게 되어서 6개월 치 월급으로 총 1천만 원 정도 모을 수 있었고, 또 휴가도 유독 많이 받았습니다. 보통 육군 병사들은 당시 군 복무 기간 동안 최소 50일에서 55일을 가고, 포상 등을 통해 휴가를 정말 많이 받는 경우엔 90일 정도 받았습니다. 90일 이상 휴가를 다녀오면 부대 내에서 전설이 되지요. 그런데 저는 제가 휴가 간 일수를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총 140일을 휴가로 받아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군 생활 동안 특이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특별히 받은 혜택들이 참 많았는데, 아마 입대 초반에 주일을 지키려 했던 노력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제가 딱히 한 것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순도 영화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저는 일단 영화에는 어떤 ‘기운’이 흐른다고 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단순히 영화로 끝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관객에게 어떤 기운을 남깁니다. 그 기운은 그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영화는 굉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기 때문에 또 이념적으로 많이 이용도 하는 것입니다.


권순도 드라마를 예로 들자면 그건 호흡이 훨씬 깁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 몇 시간이라는 단짧은 시간 안에 관객의 모든 집중력을 독차지하며 어마어마한 체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라는 매체를 굉장히 선호합니다. 사실상 사람이 어떤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이 영상입니다. 냄새를 뺀 오감을 모두 사로잡습니다.


권순도 저는 문제없다고 봅니다. 단지 좀 건전하고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를 좀 더 사랑하게 하고 건실하게 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권순도 맞습니다. 저도 이 때문에 불리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가령 정부 지원 같은 경우, 제가 제주 4·3 관련 영화를 찍은 후로는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독립영화에 대한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능력을 떠나서 어떤 이념에 따른 차별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주 4·3 사건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표현한 작품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독립영화 지원을 쉽게 받습니다.


권순도 네. 그런 영화의 특징은 개인의 삶을 다루면서 감성적인 터치를 잘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작품의 결론은 제주 4·3 사건이 국가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민간인이 국가에 두들겨 맞고 죽은 것으로만 묘사합니다. 희생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묘사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죠. 분명히 무고한 희생도 있었고 국군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시대적 사건의 부작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작용이 마치 사건의 원인이거나, 전부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저도 제주 4·3 사건 관련 작품을 만들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국가 폭력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사건 때 민간인들 사이에 좌익분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옷차림이나 거주지가 전혀 구분이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국가 폭력이라고 따지기 전에 왜 좌익들은 비겁하게 민간인들 사이에 들어가 있었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3·1절 기념행사 때 거기 참여한 사람들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3·1절 행사는 미 군정이 애초 열지 말라고 불허한 불법 시위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순전히 평화적으로 열린 행사에서 일어난 공권력의 폭력으로 몰고 가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일이 있기 바로 두 달 전에 전국을 강타했던 대구 폭동이 겨우 수습되었기 때문에 당황한 미 군정이 3.1절 집회 자체를 불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법 시위에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1년 후인 제주 4·3 사건까지 끌고 와서 울분에 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처럼 왜곡하고 있습니다.


권순도 사실 이 내용은 작품에서 표현을 못 했습니다. 그 작품을 만들 때만 해도 이것을 좀 이해하기 쉽게 묘사할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서야 조금 정리가 되고 말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성공하는 현대사 영화에는 거의 왜곡이 많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알면서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성을 터치해 주기 때문입니다.


권순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맞는데,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보수 진영이나 소위 우파는 이제 관심사가 너무 분열돼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주 4·3 사건도 있고 여순 반란 사건도 있고, 또 북한 인권 문제도 다뤄야 하고, 납북자 문제도 있습니다. 납북자 문제는 6·25 전쟁 납북자가 있고 또 전후 납북자도 있지요.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너무 많고 다양하다 보니까 이런 사건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제대로 바로잡으려는 노력들이 분산되는 것 같습니다.


권순도 사실 배우들이 자기 소신대로 하면 너무 불이익이 많습니다. 영화 한 편 때문에 다른 작품에서 안 불러주는 상황이 많이 생기는 것을 아는 겁니다. 전 이해는 갑니다. 배우들은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권순도 저는 이것을 ‘DNA’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새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타고난 DNA를 통해서 지푸라기를 엮어 둥지를 만듭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는 타고날 때부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우익의 DNA가 있고 좌익의 DNA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좌익의 DNA가 문화 활동에서는 훨씬 더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서로 도와주고 밀어주는 연대 문화가 매우 강합니다. 우익은 사실 공익신고도 잘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냥 각자 자기 스스로 해내고, 또 불이익도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형편입니다. 영화를 만들려고 해도 어떤 연대와 단합의 분위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우익에게는 매우 어색합니다. 이런 의식을 바꾸면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중국도 공산화가 되기 전에는 장개석이 훨씬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택동이 인민들의 동지애를 자극하면서 중국을 다 먹어버린 겁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좌익의 감성이 통합니다. 좌익에게는 그런 동지애가 DNA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사실 이 일을 하면서 그런 면에서 굉장히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서로 다 자기가 감독을 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가면 좀 밀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뒤에서 끌어당기면서 개입하고 좌지우지하려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에 단지 우리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라는 취지로 큰 대가 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러면 처음에는 감격하다가 금방 또 대가 없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좌익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덜하다는 겁니다. 우파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좌익의 동지애를 흉내라도 내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순도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DNA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계나 문화계에도 크리스천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교회는 가고 크리스천인데 이상하게도 문화계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작품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친북적이거나 하면 당연히 거절할 것 같은데 안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저는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 자동적으로 반공(反共)적인 생각을 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는 특히 공산당에게 순교 당하신 분도 많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공산당에게 순교당한 분들의 후손들 중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권순도 네. 저도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봅니다. 비록 지금 문화계의 주도권은 좌익세력이 가지고 있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 또한 지금 우리와 똑같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 바꾸는 건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중심을 지키면서 조직적으로 차근차근 해나가면 판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우리나라의 바탕이 사실 건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30~40년 걸렸던 것보다 빨리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좌익보다 우익은 해야 하는 일 자체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좌익은 무너뜨리고 반대하는 것이 일이지만, 우익은 설득하고 만들고 일으켜야 하는 것이 일이니까요. 그들은 생산이 없고 남의 것을 갖다 쓰는 것이 일이고, 일자리가 모자라면 그저 공무원 수를 늘립니다. 그런데 우익은 산업과 경제를 일으키는 데 힘쓰고,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40대나 50대와 달리 조금만 깨우쳐주면 확실히 쉽게 돌아옵니다.


권순도 저는 스토리텔링이나 문화적 재능은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공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첫 번째는 정말 영감이에요. 그래서 저도 항상 작품을 만들 때 기도를 많이 해요. 그러면 지혜를 주시더라고요.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영역이 문화·예술계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자만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히트 칠 정도의 우수한 작품이 있다고 해도 사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흥행이기 때문에 끝까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실 재능보다 열정이 더 중요해요. 재능은 열정을 만들어 내지 못하지만, 열정은 재능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과 열정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반기독교적인 코드로 물든 영화계에서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예술인이라고 해서 다른 경제활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예술인 중에 자존심 때문에 다른 경제활동은 안 하고 작업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경우도 많이 보는데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각자 형편에 맞게 주어진 환경과 가정에도 책임을 다하면서 소명을 추구해야 합니다. 잠깐씩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와도 좋습니다. 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작품 활동이 끊겨있는데요. 당시 한 5년 동안 일반 기업체의 외주를 받고 홍보영상을 찍으면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한때는 개인택시라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CF 등 영상 제작 쪽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권순도 네. 아마 백선엽 장군의 영상 자료는 우리나라에서 제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전후방 전투 현장에서 인터뷰한 것이 많습니다. 다른 분들이 찍은 자료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앉아서 인터뷰한 것들이지만, 저는 특별한 기회를 얻어 백선엽 장군을 모시고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시에도 벌써 연세가 90이 되셔서 힘들어하셨는데, 감사하게도 흔쾌히 인터뷰에 잘 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영상 자료들을 취합해서 백선엽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권순도 내년 6월쯤 하고 싶은데 사실 개봉 시기는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많습니다. 경기라던가 사회적인 분위기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일단 내년 3월까지는 제작을 완료하고 적당한 때를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