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그물 안에

그리움의 그물 안에

2021-09-20 0 By 월드뷰

월드뷰 SEPTEMBER 2021

●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 CULTURE & WORLD VIEW 2


글/ 조혜경(작가)


“혜경아, 할머니 재봉틀 네가 가질래?”

할머니 할아버지 추도예배를 마친 후 선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큰이모께서 내게 물었다.

“이모 이제 안 쓰세요?”

“안 쓴지는 한참 됐어. 이제 재봉틀로 뭐 할 게 있어야지.”

이모부도 돌아가시고 큰이모는 홀로 살고 계셨다. 내 어린 날의 기억에 이모는 재봉틀로 뚝딱 옷을 만들어 이모의 어린 두 딸에게 똑같은 원피스를 맵시 있게 입히곤 하셨다. 솜씨 좋은 이모는 재봉틀로 많은 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그에 반해 할머니의 다른 두 딸인 엄마와 막내 이모가 재봉틀로 뭘 만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 짐을 정리하면서 재봉틀을 큰이모가 가져가신 것은 당연했다.

할머니의 짐은 낡은 주택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정리된 것 같았다. 나는 외국에서 돌아와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기 위해 출국 인사를 드렸던 한옥 대신 시내의 고층 아파트로 찾아가 뵈었다. 인사를 드리고 집을 둘러 보니 평면의 아파트에 걸맞게 짐은 이미 단출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얼핏 보아도 두 분 살림살이의 많은 것들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 윤이 반질반질 나게 날마다 닦으셨던 장독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메주와 붉은 고추, 숯과 달걀을 둥둥 띄워 간장을 담그셨던, 내가 두 팔을 힘껏 벌려도 감싸지지 않았던 배가 불룩한 서너 개의 커다란 간장독, 땅에 묻혀 겨우내 김장김치와 동치미를 담고 있던 김칫독, 간장독 앞 열에 서 있던 고추장, 된장 항아리며 맨 앞 열의 젓갈과 장아찌 단지들, 투박한 소금독, 겨울엔 부엌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놓여 살얼음을 얼려주었던 식혜 항아리…. 용도와 크기에 따라 줄을 맞춰 정돈되어 있던 할머니의 풍요로웠던 장독대가 통째로 사라졌다. 여름날 한차례 퍼붓던 소나기가 지나면 번들거리는 몸통으로 강하게 햇살을 튕겨내던 장독들. 밤새 내린 함박눈을 머리에 소복하게 이고 있던 겨울의 장독대. 어린 시절 숨바꼭질할 때 빼고는 이용해본 일이 없었지만 나는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장독대가 못내 그립고 아쉬웠다. 아파트 베란다엔 풍성했던 시절의 흔적처럼 작은 항아리 서너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수돗가에 점잖게 앉아 있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원형의 돌확이 아파트에 함께 입주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열무나 얼가리 배추가 풍성하게 나오는 초여름, 할머니는 손에 가득 잡히는 둥근 돌로 학독이라 불렀던 돌확에 힘주어 고추와 마늘을 가셨다. 적당히 갈아졌다 싶으면 물기 빼놓은 열무를 채반 채 들어 학독에 붓고 옆에 준비해 둔 양념을 얹으시고 설설 두 손으로 뒤적이셨다. 그러면 보기에도 맛깔스러운 여름 김치가 되었다. 깨까지 뿌린 후 할머니는 옆에 앉아 구경하는 내게 한 입 넣어주시곤 늘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맛있장!”

음악 소리가 나던 오동나무 장도 보이지 않았다. 한옥의 안방엔 키가 천장까지 닿는 큰 오동나무 서랍장이 있었다. 총 다섯 단으로 된 서랍장 맨 밑단은 긴 서랍으로 그곳엔 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한복이 곱게 개어 들어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단은 아랫단의 삼 분의 이 정도 길이였는데, 그곳엔 두 분의 스웨터나 바지, 내복 등을 넣어두셨고, 그 오른쪽 남은 길이엔 네모난 여닫이문이 달린 공간이 있었다. 그곳엔 할아버지만 보시는 서류가 들어있었다. 그 윗단에 작은 서랍 세 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작은 서랍들에서 여닫을 때마다 신기하게 뿜-뿜- 하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서랍을 여닫는 사람에 따라 소리가 조금씩 달랐다. 이를테면 할아버지께서 열면 매우 맑고 고운 긴소리가 할머니께서 닫으면 크고 짧은소리가 들렸다. 왜 소리가 나는지 할머니께 여쭤보자 ‘노래하는 놈이 붙어 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 나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서랍 하나의 내용물을 다 빼고 서랍 안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 서랍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해보았는데, 여전히 뿜-뿜- 맑고 고운 노래 소리를 내었지만 ‘노래하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못내 궁금한 나는 어느 날 서랍을 통째 빼내고 손전등으로 서랍이 빠져나온 어두운 곳을 비춰보았는데, 아! 서랍이 빠져나온 끝, 서랍장의 뒷면에 과연 무엇이 붙어있었다. 언뜻 보기엔 커다란 매미 한 마리 같았다. 하모니카의 떨림판이었다. 겉의 쇠판 없이 공기가 들고날 때 떨리는 그 떨림판이 그곳에 붙어있었다. 잘 마른 오동나무의 관을 통해 들고 나는 바람에 그리도 고운 소리가 났던 것이다. 특별한 장식이나 문양이 없던 나무빛깔의 오동나무 서랍장! 전쟁과 이사를 겪으며 여기저기 난 흠집으로 아파트에 함께 들어오기에는 너무 허름하다고 판정되었던 걸까. 오래 세월로 어쩌면 더 영롱한 소리를 내주었을 서랍장은 어디로 실려 갔을까.

아파트로의 이사로 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동나무 서랍장이 서 있던 한옥의 안방엔 커다란 벽장이 있었다. 어른 허리춤 높이에 달린 두 짝의 미닫이문을 밀면 나타나는 길고 깊은 공간. 날마다 사용하는 이부자리를 주로 넣어두고 벽장의 깊은 안쪽엔 알 수 없는 짐들이 보자기에 잘 싸여 놓여 있었다. 그러고도 공간이 남아 벽장은 할아버지 손주들이 숨바꼭질할 때 꼭 한번은 들어가 숨는 최적의 장소였다. 숨바꼭질이 아니어도 동굴 같은 어두움과 아늑함이 좋아 어린 날 나는 한동안 벽장에 들어가 있기를 좋아했다. 이야기책과 손전등을 가지고 들어가 이불 틈에 누워 책을 읽었다. 괴도 루팡과 셜록 홈즈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이 만드는 동그란 불빛 안에서 활동했다. 몸을 일자로 다 펴지 못하고 대개는 접히거나 웅크린 모습으로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한날은 그렇게 자다가 깨어 나왔는데 집엔 아무도 없고 꼭 아침 학교 갈 시간을 놓친 것만 같았다.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골목을 나서다가 마침 들어오던 막내 이모와 만나 학교까지 갔다 오는 낭패는 면했다. 짓궂은 삼촌을 만났거나 그 짧은 골목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면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을 것이다. 일몰의 시간이 자아내는 그 혼돈이라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 다락으로 진출하면서 나는 벽장과 멀어졌다. 한옥의 부엌은 바닥이 두 계단 내려와 있었는데, 그만큼 낮아진 부엌 천장과 지붕 사이 공간에 넓은 다락이 있었다. 따로 계단 없이 다락문을 열고 사다리를 내려 세워놓아야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다락의 출입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려도 위험하지 않다고 인정이 된 나이에 허락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다락에 백열전구를 하나 달아놓으셔서 나는 손전등 없이도 다락에 엎드려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다락엔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이 쌓여 있는 커다란 궤짝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구독하셨는데, 날짜 지난 신문을 버리지 않으시고 연재소설과 만화, 만평 같은 것들을 각각 따로 모아 책으로 만드셨다. 송곳으로 신문지에 구멍을 뚫고 잘 찢어지지 않는 장판 종이로 표지를 대고 미농지를 돌돌 말아 만든 끈으로 단단히 묶으면 보기에도 멋진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수십 권의 스크랩 책 중 단연 인기는 ‘고바우 영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4단짜리 만화였다. 훗날 알고 보니 당시 시대와 사회를 유쾌하게 풍자하는 촌철살인의 만화였는데 그런 의미를 전혀 알 길 없는 어린 내게 ‘고바우 영감’은 만화 자체로 재미있었다. 어린 내 주먹에 가득 잡힐 만큼의 분량으로 한 권씩 묶어진 ‘고바우 영감’은 굵은 머리카락 한 올이 기역 자로 서 있는 평평한 대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영감님의 속마음이 곧잘 그 한 올 머리카락으로 표현되는 것이 우스웠다. 반듯하게 서 있던 머리카락이 어이없음이나 실망으로 지그재그로 구부러지면 동시에 내 마음도 아, 하면서 함께 탄식하곤 했다. 그린게이블스의 빨강 머리 앤, 사막의 어린 왕자, 좁은 문의 알리사와 제롬,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세계명작 속의 수많은 주인공과 함께 뒹굴었던 꿈의 다락방.

가끔 송충이가 떨어져 나를 질겁하게 하던 키 큰 포플러, 줄기를 꺾으면 하얀 진액을 뚝뚝 흘리던 무화과나무, 까만 씨앗을 맺는 분꽃, 꽃대를 뽑아 단맛을 빨던 사루비아, 토방과 경계를 짓던 채송화, 빈약한 송이를 맺어 마당을 들고 날 때마다 고개를 젖혀 포도알을 세게 했던 한 그루 포도나무가 있던 꽃밭. 노란 호박꽃이 피고 한여름 튼실한 보랏빛 가지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작은 텃밭. 벽장과 다락이 있던 할아버지의 한옥은 그 일대가 개발되면서 헐리고 그 자리엔 현대식 빌딩이 들어섰다고 막내 이모가 전해주셨다. 나는 매년 할머니 할아버지 기일이면 J 시에 내리고 가족 지인의 애경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종종 들르지만, 할아버지의 한옥이 있던 그 자리에 아직 가보지 않았다. 크게 변했을 그곳의 풍경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할머니의 재봉틀을 가지겠냐는 큰이모의 제안에 나는 ‘네, 제가 보관할게요!’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버코트 단추를 다는 일도 서툰 내가 앞으로도 재봉틀을 배울 일은 없겠지만 할머니의 재봉틀은 옆에 두고 싶었다.

한옥의 윗방 윗목에 자리 잡고 있던 재봉틀은 멋진 철제 다리와 발판을 가진 위풍당당한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발로 발판을 구르면서 재봉틀의 오른쪽에 달린 둥근 바퀴를 돌려가며 재봉질을 하셨다. 작은 바늘이 실을 귀에 걸고 쉼 없이 빠르게 달리며 옷감을 박아내는 것은 늘 신기했다. 재봉틀은 보통 때는 머리 부분이 밑으로 내려가며 옆으로 눕고 왼쪽의 상판을 접으면 평평해지는 구조를 하고 있어 내가 앉으면 딱 공부하기 좋은 책상구조가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그 재봉틀에 앉아서 한달음에 밀린 일기를 쓰곤 했다. 할머니의 재봉틀이 내게 오면 어린 시절 일기를 쓰듯 그곳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글을 써야지, 나는 기대했다.

기대의 또 다른 짝은 실망이다. 큰이모 돌아가시고 막내 이모부께서 할머니의 재봉틀을 내 집으로 날라 오셨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진 철제 다리와 발 구름판은 간 곳 없고, 그저 네모난 작은 나무상자가 내 앞에 놓였다. 큰이모는 재봉틀 본체를 떼어 나무상자에 맞춰놓아 앉아서 재봉질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해 놓으신 것이다. 너무도 허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나는 나무상자를 열어 재봉틀을 꺼내 세워보았다. 여전히 멋진, 잘 달리는 단단한 말의 모습과 같은 검은 빛 몸통에 SINGER라고 씌어 있었다. 수건으로 먼지를 닦으며 가만 쓰다듬자니 내 어린 날 여름밤마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해주셨던 할아버지의 6·25 이야기 한 자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재봉틀 얘기 부분에 이르면 부러 잠시 숨을 고르시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도록 기다리셨다.

“하이고! 그놈들이 집집마다 쳐들어와서 쓸만한 것은 숟가락 몽딩이까지 다 거둬간다고 소문이 쫘 허니 어찌겄냐. 재봉틀을 냅둘 리가 있겄어? 그리서 모가지만 띠가지고 둘둘 말아 마당에 땅 파고 묻어뒀당게!”

많은 것들이 사라져간다. 사라지는 것이 어찌 물건과 장소뿐이랴.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다 놓고 가야 하는 날도 올 것이다. 뒤돌아 지나온 날에 그리움의 그물을 던지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가득 건져 올라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9).

<hkcho7739@naver.com>


글 | 조혜경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 대상(2006)을 수상하였고 문예진흥기금을 수혜(2006) 했다. 저서로는 <꿈꾸지 않는다>가 있다.